야안 381화
겨우 스물도 안 되던 나이였을 때부터 세상을 구할 운명을 걸었던 아버지가 느꼈던 그 고독과 고통이 느껴져 애절했으며, 그러한 것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나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에게 있어 경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아! 아버지. 현명했던 나의 아버지여. 평생을 그 강인하였던 모습을 닮고 싶어 달려왔건만……저는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한 가지 바랄 것이 있다면 아버지의 기억에 제가 못난 모습이 아니었기를…….’
그의 마지막 기도는 이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악마의 마법 앞에 끝이 났다. 검을 들어 올릴 기력 따위도 없을 만큼 마나도 체력도 바닥을 친 지금 그는 그렇게 제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이이잉-’
그러나 눈을 감은 그에게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질 않는다. 기묘한 울림이 있을 뿐인 것으로 지쳐 마나를 느끼는 감각마저 현저하게 떨어진 그는 결국 눈을 떠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 했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기적이 일어났음을 말이다.
자신이 언제 움직였는지 어느새 그의 몸은 알지 못하는 미증유의 힘에 의해 바닥에 내려앉고 있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챈들러, 한스 등 살아남은 56인의 마지막 결사단 또한 그처럼 미증유의 힘에 의해 천천히 대지로 내려앉았다.
물론 그러한 현상을 악마들이 가만히 놔 둘리 없을 일이니 이를 두려워해야 했으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을 구한 그 미증유의 힘을 일으킨 이가 그들의 앞에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저 사내의 등장에 악마들이 긴장한 듯 그 오만함을 감추고 몸을 물려설 정도라 그들 모두가 궁금증을 떠올렸다.
‘누구지?’
기력이 다해 초점이 흐릿한 눈 속에 나타난 사내에 한스는 마지막 마나의 한 점으로 그를 살폈고, 곧 그가 누구인지를 알았다.
“아!……리트담 님.”
스승님을 따라 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온 희대의 천재. 전설의 현자와 고대 주술제국조차 해내지 못한 주술의 정립을 이뤄낸 자.
리트담 리케하르산이 그곳에 있었다.
마치 어릴 적 스승님을 보듯 그만큼 듬직할 수 없는 터라 한스는 이제 마법이 다해 다시 흐릿해지는 세상 속에 돌아왔지만 이제 걱정하지 않았다.
‘살았다…….’
한스의 그 생각은 어쩌면 너무 이른 것인지 모른다. 아직도 악마의 숫자는 스물하고 여덟이나 있기 때문이다. 하나 어쩐지 다시 나타난 리트담에 그들조차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뇌리에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예상은 맞았다.
“하마터면 주군의 가슴에 피눈물을 흘리게 할 뻔했구나.”
그 옛날 야안이 수련을 위해 떠나기 전 악귀 같았던 리트담과 달리 지금의 리트담은 마치 처음 제국에 모습을 보였을 때의 그 모습처럼 밝고 강인하였으며 또한 빛이 났다.
마치 그가 그토록 올라서려 했던 무언가를 이룬 것처럼 절로 그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악마들은 리트담의 몸을 덮은 그 빛에 큰 두려움을 느꼈다. 성기사들이 지닌 신력과는 또다른, 천적 같은 두려움을 불러오게 한 것으로, 이 때문에 그들은 감히 먼저 움직이지 못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과 달리 리트담은 그처럼 아쉬움이 섞인 일갈을 지르며 곧 허공에서 한 걸음을 내밀었다.
‘쿠우우웅-’
그리고 동시에 세상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28마리의 악마들의 감각이 뒤죽박죽된 것으로, 놀랄 일은 거기가 다가 아니었다.
리트담이 손을 들어 그들에게 장난처럼 뒤흔들자 백배에 달하는 중력이 그들을 향해 뭉쳐 압박을 가했다.
‘우드득. 우드득-’
이러한 현상 속에 괴물체의 악마들은 그나마 나았지만, 인간형 악마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감각이 뒤흔들려 백배의 중력에 대해 쉽사리 대응 못 하는 지금 그 중력을 오롯이 자신의 육체로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드래곤의 육체만큼이나 단단한 악마였기에 이를 견딜 수 있었지, 다른 존재였다면 그것으로 압살 되어 몸이 터졌을 것이다.
하나 그들도 그나마 상황이 좋았던 괴물체의 악마들도 올라갔던 리트담의 손이 점점 내려가면서 상상을 못한 고통을 맞이해야 했다.
‘콰드드득. 크륵. 크륵-’
백배였던 중력이 배수가 되어 올라가기 시작했던 것으로 종국에 이르러 천배에 달했을 때 그들 중 멀쩡한 악마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저마다 크기가 다른 스물여덟 개의 공이 대신 있을 따름이다. 자신이 만든 그 놀라운 성과에도 리트담은 한 점의 감정 없는 모습으로 남은 한 손을 올려 그들에게 검지를 튕기니 이내 반짝이는 무언가가 그의 검지에서 터져 나왔다.
존재의 의의를 지우는 주술인 것으로 다만 그 격은 이전과 달랐다.
그 양과 농도가 다른 것으로 이내 하나도 아닌 스물여덟에 달하는 악마가 그것에 대해 완전한 소멸을 이루어내었다.
예전이었다면 여섯, 일곱도 상대하기 힘든 악마들을 그 네 배가 넘는 숫자를 간단히 지워낸 리트담은 대지 아래로 내려섰다.
‘쿠우웅-’
그의 발이 내딛자 땅에서 거대한 울림이 퍼지더니 곧 지진이 일어난 듯 땅이 솟아올랐고 그것은 돌거인이 되었다. 수백에 달하는 주술로 만들어진 이 돌거인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엉망이 된 황도와 황성을 바로 세우기 시작했다.
리트담은 그 모습을 채 보지도 않은 채 다시 발을 내딛자 이번에는 돌거인과 크게 비교되는 아주 작은 난쟁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숫자는 백이 넘지 못했지만, 이들은 저마다 쓰러진 결사단에 하나, 둘씩 다가가 치료를 해 나갔다.
그들 이외에도 열 명의 작은 난장이들이 간신히 숨이 붙어 있는 다섯에 붙어 치료해나갔는데, 놀랍게도 그 치료되는 수준이 주술의 수준을 넘어섰다.
마치 신관의 신성회복마법 리젠이 지속적으로 펼쳐지는 정도로, 덕분에 기력은 물론 떨어져 나간 살과 뼈가 다시 생겨나 올라서기 시작했다.
마치 전지전능과도 같은 일을 벌인 리트담은 천천히 다시 한번 이들을 살펴보더니 곧 말없이 서쪽 하늘을 바라본다.
“바쁘겠군.”
28마리의 악마들을 소멸하느라 주술력의 소모가 적지 않았던 그였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 황도를 시점으로 제국 곳곳에서 일어난 악마로 난리가 난 세상을 진정시키려면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탈인에서 한 차원 높은 무언가에 닿은 듯 곧 그는 공간을 접는 것을 넘어 시공간을 접더니 이곳에서 사라졌다.
리트담이 보았던 것처럼 황도를 시점으로 죽음의 지배자의 난이 벌어진 구역은 라 대륙만 해도 스무 곳에 달했다.
샤 대륙에서는 열두 곳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졌으며, 타 대륙에서도 드래곤과 인간의 연합을 흩뜨리는 악마들이 다수 투입된 상태였다.
황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악마들이 등장한 지역은 저마다 신전의 방어 능력을 뚫고 나타난 터라 엉망이 된 지 오래였다.
통제를 맡는 중앙 지역이 엉망이 되었으니 힘의 집중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고, 당연히 각개 격파를 당하며 수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천만이 넘는 대도시가 사라지기도 했는데, 악마들이 벌인 악행은 거기서 끝이 나지 않았다. 그들이 사라진 대도시 위에는 인간들의 피로 그들의 육신으로 거대한 탑이 세워졌던 것으로 그 안에서 느껴지는 그 불길함은 절망의 탑 그 이상이었다.
악마들은 뭉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하룻밤 사이에 총 일억이 넘는 시체로 이루어진 탑들을 세워 올렸다.
탑의 숫자로는 스물에 달했는데, 그 크기에 따라 불길함의 기운의 크기 또한 크고 작았다.
그나마 혜성처럼 나타난 리트담에 의해 생명의 구함을 받았던 이들이 뒤늦게 반격을 나섰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상당 숫자가 그들의 습격에 죽어나갔던 것으로, 이외에도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리트담이 주술력을 아끼지 않고 악마들을 처리한 결과 리트담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결국 신전을 대신해 바, 샤, 타 대륙의 곳곳에 절망의 탑과 유사한 시체의 탑들이 일으키는 불길함은 점차 구체화되어 나가 공명을 하기 시작했다.
공명을 시작한지 반 나절이 지나 곧 그 옛날 뒤틀어진 인과를 되돌렸을 때도 나타났던 현상이 다시 세상에 나타났다.
검은 구름에 휩싸인 세상은 미친 듯이 뇌전을 동반한 폭풍에 몸살을 앓았으며, 그 속에 그 불길한 탑을 막기 위해 나아가던 리트담과 드래곤들은 그 혼돈에 막혀 움직이지 못했다.
리트담의 도움으로 악마들의 기습에서 살아남은 하나가 이 현상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탄식 어린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그가, 그가 깨어나는구나.”
그저 그가 깨어난다는 말이었으나, 현 상황에 하나가 말한 그가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리트담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마지막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가부좌를 틀어 앉았다. 막을 수 없다면 적어도 상대할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을 냉정히 판단한 것이다.
곧 저 멀리 세상에 끔찍한 기운이 거짓말처럼 세상을 뒤흔들더니 이내 무언가가 그 속에서 생겨났다.
마치 허상이 격을 올려 현실로 존재하는 듯한 현상으로, 그 허상에서 현실로 그 격을 올려 존재하는 이의 모습은 하나가 아니었다.
모두 아홉으로, 그 첫 번째는 본 드래곤이었다. 온통 청 녹색으로 뒤덮인 본 드래곤으로 그 크기는 하나에 비해도 배 이상은 커 보였다.
다음으로 독기가 가득한 기운을 일으키는 괴상한 형태의 물고기가 모습을 보였으며, 산과 같은 크기의 거인, 세계수 크기 못지않은 거대한 꽃, 한 나라 위에 있는 구름들을 모두 뭉쳐놓은 것 같은 엄청난 크기의 회색 구름, 마치 드래곤의 분신 요정을 생각게 하는 장난기 어린 난장이, 마지막 황제였던 오크 같은 괴물, 드래곤을 잡아먹어도 놀라지 않을 엄청난 크기의 불새가 등장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온몸이 붉은 인간이 등장했다.
이 붉은 인간의 등장에 하나가 몸을 뒤흔들었다. 카사블랑카 이후 죽음의 지배자가 즐겨 찾는 모습인 것으로 이미 두 차례 나타난 바 있었다.
이들 아홉은 저마다 죽음의 지배자라 불리는 존재들이었으나, 통상적으로 드래곤들이 말하는 죽음의 지배자는 이 마지막에 등장한 붉은 인간이었다.
그들은 아홉이나 하나인 존재들로, 이들과 싸우는 것은 대단히 큰 어려움이 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대악마와 비슷한 힘을 지닌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다행이라면 대악마처럼 신성을 띈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홉이라…….’
하나를 비롯해 레드, 블루, 그레이, 골든, 블랙족을 대표하는 조율자들인 둘, 셋, 넷, 다섯이 그들의 숫자가 아홉이라는 것에 절망의 표정을 보였다.
자이웅이 그들을 상대하던 시절의 숫자가 다섯에 불과했던 것을 생각하면 거의 배에 달하는 숫자였던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