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리오나 (2)
* * *
드디어 비질이 끝났다. 앞으로 한 시간이면 주인이 돌아올 것이다. 잠깐이라도 쉬고 몸을 단정히 하여 주인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경력이 일천하고 소질도 뛰어나지 않은 리오나지만, 그녀는 마치 레이디스 메이드처럼 물론 주인은 남자이지만 주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며 봉사해야 했다.
주인이 돌아오면 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것이다. 사정을 알면서도 막내라고 정원 청소나 시키는 선배들이 밉기만 하다. 분명 주인 몰래 하는 짓일 테다.
"…또 젖었네."
휴식실에서 한숨을 돌린다. 작지만 잘 정돈된 리오나의 유일한 안식처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치마를 들춰보니 팬티가 젖어있었다.
비질하면서 떠올린 건 강렬한 그 날의 기억. 그저 치욕 그 자체였을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몸이 뜨거워지고 숨이 가빠진다.
탁자에 놓인 분홍액체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주인은 그녀가 먹는 것에는 특별한 제약을 두지 않았지만, 음료는 오로지 이 달고 기름진 분홍액체만 마시게 했다.
어느 날은 시험 삼아 주인과 선배들 몰래 물이나 커피를 마시고 시치미를 떼봤다. 바로 그날 밤 용의 발달 된 후각에 발각되어 매를 맞아야 했다. 전혀 아프지 않았지만, 아무튼 기분 나쁜 일이다.
"맨날 이런 짓만 하고…. 그가 곧 오는데…."
자연스럽게 팬티 속으로 손이 간다. 이 새로운 몸은 이상할 정도로 민감하고 탐욕적이다. 신경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쾌락을 갈구한다. 여기에 처음 왔을 때보다 심해진 것 같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이러지 않았는데, 하며 자연스럽게 다시 그날을 떠올린다.
낯선 천장이다.
레온하르트는 아주 희고 폭신폭신한 침대에서 눈을 떴다. 몸의 피로가 싹 가시고, 어떠한 불안이나 고통도 없는 아주 편안한 잠이었다. 1년 동안 느끼지 못한 행복에 도저히 일어날 기분이 들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둥글게 말고 이불을 끌어모아 놀란 달팽이처럼 웅크렸다. 가능만 하다면 평생이라도 이러고 있고 싶었다.
"헤으응…."
그렇게 한껏 늘어지고 있을 때.
"이제야 일어났나. 레온하르트 장군."
"끼야아아악! 당신 누구야!"
레온하르트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방심하던 차에 단순히 깜짝 놀란 것도 있지만, 가장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들켰다는 부끄러움이 가장 컸다. 그 모습이 마치 마음 여린 여자아이 같았다.
"종이 주인에게 누구냐니. 인간에게 그런 예법을 가르친 기억은 없는데."
침대 옆에는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나이가 적잖이 들어 보인다. 그렇다고 중년이라 하기엔 젊다. 기품있는 은색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넘긴 올백에 각진 턱. 사납다기보다는 냉소적인 인상이다.
쪽빛 눈은 세로로 갈라져 본능적인 공포와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도 족히 2미터는 되어 보이는 큰 키가 레온하르트를 압도했다.
듣는이에게 신뢰감을 주는 굵고 낮은 목소리. 어투는 사무적이고 딱딱했다. 인간과 다른 동공에선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도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절망적이고 비참한 현실이 무겁게 두 어깨를 짓누른다.
"당신 누구야."
숨을 가다듬고 다시 진지하게 물었다.
"또 그건가. 이거 답하지 않으면 나아가질 않겠군. 3군단장이자 너의 주인 되는 가스파르다. 잘 부탁하지."
목소리와 억양은 진지하기 그지없으면서도 어딘가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말투다. 주도권을 잃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바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궁금한 건 차고 넘쳤다.
"너희들의 군단이란 건 어떤 전술 단위의 부대지? 규모는 어느 정도고? 애초에 너희들에게 그런 군사체계가 있었다니 금시초문이다."
질문에 질문이 이어진다. 인간과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른 존재. 도적이나 반란군을 상대하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매일같이 크고 기다란 쇠 창을 용의 가슴팍에 쑤셔 넣는 것만을 고민한 그로서는 용에 관한 거라면 아주 사소한 점이라도 알고 싶었다.
"하, 아직도 자기가 장군인 줄 아는군."
"뭐?"
역시 이 노땅 마음에 안 든다. 레온하르트가 자신은 반평생을 넘게 군인으로 살았다며 항변하려는 찰나.
"병정놀이는 끝났다네 아가씨. 그런 것보다는 좀 더 개인적인 질문을 하는 게 어떻겠나? 이를테면 '내 예쁜 자지는 어디로 갔나요?' 라던가."
"갑자기 무슨 미친 소리야. 이 변태 용…이…."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기분이다. 나의 목소리, 나의 몸, 내가 나라고 믿었던 그 모든 것. 그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는 이미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다.
목소리를 가늘게 떨고,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두 팔을 애처롭게 가슴 앞에 모은다. 확실한 볼륨감이 손끝에 전해지고, 의식하지 못했던 무게에 갑자기 어깨가 불편하다. 무엇보다 사타구니와 속옷 사이에 있어야 할 그 무언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차라리 용이 쳐들어온 그 첫날 죽는 게 나았을 텐데. 왕도에서 들려온 소문은 그저 헛소문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린 여성으로 변하게 하여 노리개로 삼는다는 그 소문.
이런 가냘픈 소녀의 모습으로 당할 치욕을 생각하니 몸이 부르르 떨린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삼키며 억지로 입을 연다. 아무리 그래도 눈물이라니, 이래서야 진짜 마음마저 계집이 된 것 같지 않은가. 스스로를 다그치고 또 다그친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되었지…?왕과 공주께선 안녕하신 거겠지?"
가스파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어이없다는 듯이 레온하르트를 쳐다본다. 자세를 고쳐 침대와 똑바로 마주 앉는다.
"굳이 자네들이 반감 가질만한 일을 할 이유가 없지 않나. 모두 편히 잘 있다고밖엔 할 말이 없네."
"병사들과 백성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지? 너넨 항상 우릴 죽이는 것보다 사로잡는 것에 집착했지."
용들은 마치 승리나 지배가 목적이라기보단 인간 그 자체가 목적이자 전리품인 것처럼 인간을 생포하는 것에 집착했다.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침략 첫날을 제외하곤 시체를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정말이지 남 일 말곤 관심이 없는 건가? 개인적인 질문이 싫다면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하는 게 어떤가? 우리가 누구고, 왜 자네들을 침략했는지를 말이야."
"네놈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침략의 이유 따위야 물어볼 것도 없지. 우리를 능멸하고 땅과 재산, 나아가 자유마저 빼앗아 네놈들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게 아니냐?"
가스파르가 갑자기 손을 뻗어 레온하르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레온하르트가 잽싸게 손을 쳐내고 가스파르를 노려본다. 가스파르는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다.
"우리 아가씨에겐 예절교육뿐 아니라 역사교육도 필요하겠군. 용이 인간에게 마법은 물론이고 문자까지 전해주었다는 전설은 들어봤겠지?"
계속해서 노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누구에게 쓰다듬어진다는 감각이 낯설지만 불쾌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러기에 더 섬찟하고 두려웠다. 속에서부터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강한 레온하르트를 계속 연기했다.
"그 당시 우리가 그렇게 문명의 씨앗을 심은 생명체는 한둘이 아니야. 이번엔 자네들 인간만이 성공했지. 우린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언제나 자네들을 보고 제어해 왔다네. 실제로 그 작은 대륙을 천하로 알고, 통일왕국이니 뭐니 하는 웃기는 나라를 세우지 않았나?"
리오나의 눈빛이 더 험악해진다. 기헨을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다.
"세상엔 자네들이 모르는 대륙과 생명체들이 넘치지. 시간이 되면 내 어깨에 너를 태우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꽃 구경을 하는 것도 좋겠군."
도저히 믿지 못할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저 근거 없는 자존심과 여유로운 태도가 짜증 난다. 참 입을 열면 입을 열 수록 얼굴값을 못하는 용이다.
"그리고 왜 멀쩡한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거지? 치욕을 주고 강제로 겁탈…꺄악!"
갑자기 가스파르가 레온하르트의 턱 끝을 잡고 강제로 마주 본다. 팔을 쳐내려 해도 이번엔 꿈쩍도 안 한다.
"치워! 이 발정 난 용! 네가 지금 누굴…!"
"네 병사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았지. 네가 그렇게 남들을 생각한다면 말과 행동을 가려야 할 거다."
"크읏…!"
가스파르는 마치 미술품을 감상하듯 얼굴의 요소 하나하나를 뜯어본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상대가 용이라 해도 지금은 인간의 모습인데 온 힘을 다해도 팔 하나 쳐낼 수 없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굳은 표정을 지어보지만, 미지의 공포가 가슴 깊은 곳에서 꿀렁거린다. 가스파르가 점점 더 다가온다. 참지 못해 소리를 지른다.
"지, 지금 협박하는 거야?! 네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내 긍지는…!"
"흥."
가스파르는 흥미가 식었다는 듯 손을 거두고 등을 보인다. 어안이 벙벙하다. 질문하라면서 자기 할 말만 하더니, 행동 하나하나가 갑작스럽고 자기중심적이다.
"곧 내 메이드가 올 거다. 궁금한 게 남았으면 그쪽에 묻도록. 묻지 않더라도 차차 알게 될 거다. 내일의 재회가 좀 더 낫길 바라지."
문을 닫고 쌩하니 사라져버린다. 끝까지 두서없고 짜증 나는 행동만 한다. 레온하르트는 이불에 얼굴을 처박고 참았던 눈물을 흘린다. 모든 감각이 생소하고 두렵다. 얼마나 이 몸으로 살아야 할지 알 수도 없다.
아예 몸을 되돌릴 방법이 없어서 저 재수 없는 용과 평생을 같이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 감정이 격해져 엉엉 소리를 지르며 손발로 침대를 팡팡 쳤다. 십 수년간 한 번도 흘리지 않은 눈물을 얼마나 흘렸을까. 또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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