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리오나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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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 떠오르는 건 지난 기억뿐.
레온하르트의 가문은 기헨에서 왕가 다음으로 가장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기헨의 초대 왕의 옆엔 언제나 레온하르트의 선조가 있었다.
당시 대륙은 수없이 갈라진 작은 나라들의 끝없는 전쟁으로 황폐해졌다. 한 가정의 아버지와 아들들이 서로를 찌르고 베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폭도들의 약탈과 끝도 없이 올라가는 세율을 견뎌야만 했다.
세상을 바로잡고 만백성을 구원하겠노라 대륙 구석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기헨 초대 왕 그리프다. 그의 죽마고우이자 그가 가장 신뢰한 장군 하츠펠트야말로 레온하르트의 선조다.
본디 둘은 대등한 관계였으나 그리프의 고고한 이상에 감복한 하츠펠트가 그의 부하를 자청했다.그들은 강도와 강간범으로부터 마을을 구하고, 높은 세금을 강요하던 관리를 때려잡아 광장에 내걸었다. 굶주리고 떠도는 자들에게 병사로서 일할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이상을 주장했고. 공정하고 합리적인 통치와 안전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약속했다.
소문을 듣고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 그들 모두 그리프라는 사람과 그의 이상에 매료되었다. 그와 하츠펠트가 성 하나를 점령했을 때에는 이미 전 대륙에 그 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차례차례 그 이상을 실현할 실력을 입증해 나갔다. 그들을 따르고 추앙하는 백성이 점차 늘어나는 건 당연했다.
그 이후로도 수많은 시련과 시험이 그들을 덮쳤지만, 신념 없이 세워진 나라의 도적떼는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둘은 평생을 이상에 바쳐 예순이 될 때까지 전장에 섰고, 전시체제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하츠펠트가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리프가 침실에서 눈을 감기 바로 전날, 마지막 적성국으로부터 항복문서가 날아들었다. 통일 국가 기헨이라는 그들의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하츠펠트가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기헨의 왕을 보좌하는 전통은 그때부터 이어진다.
벽난로 앞, 아버지의 곁에서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들었던 이야기다.
어린 레온하르트는 그럴 때마다 선조 님처럼 믿고 충성을 바칠만한 왕의 곁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건 정말 끝내주게 멋졌다.
시간이 나면 부모님과 하녀들 몰래 집을 빠져나와 길거리의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즐겼다. 레온하르트는 언제나 가장 선봉에 섰다.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인자하시고, 항상 레온하르트의 말을 가장 먼저 들어주셨다. 그 시절 레온하르트는 집안의 모든 하녀가 알아주는 말썽꾸러기였지만 부모님 앞에서만큼은 얌전했다.
아버님은 다정하고 온화하신 분이셨다. 착한 일을 하면 상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는데, 그 따스한 감촉이 정말 좋았다.
그 손에 뺨과 머리를 비비며 아버님의 얼굴을 올려다보면 아버님은 못 참겠다는 듯, 그를 꽉 껴안아 주었다. 그 힘센 팔이 가져다주는 포근함이 정말 좋았다.
어머님은 말수가 적고 감정표현이 서툰 분이셨지만 레온하르트 앞에선 달랐다. 그녀가 정원에 홀로 앉아 티타임을 즐길 때면,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졸래졸래 따라가 그녀의 다리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똥글똥글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그날 있었던 일을 두서없이 재잘거렸다. 어머님께선 그저 조용히 미소지으며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주었다.
사실 레온하르트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다. 그냥 어머님과 말하는 게 좋아서 그랬다. 그날 티타임의 디저트는 언제나 레온하르트의 것이었다.
어릴 적 꿈꾸던 모험 활극이 현실에 펼쳐질 수 없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들지 않았다.
기헨은 너무나 평화로운 통일왕국이었다. 치안은 안정되었고, 별다른 적대 세력도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나무칼과 막대기 대신 책과 펜을 드는 날이 많아졌다.
그래도 정말 행복한 하루하루였다. 레온하르트를 감싼 세계는 언제나 완벽했다. 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랬듯, 젊은 나이에 근위대장의 자리에 올랐다.부관으로는 사관학교에서 얻은 신뢰할만한 친우 핀을 발탁했다.
하루는 병사들을 훈련하고, 하루는 국가행사에 얼굴을 내밀었다. 공주의 변덕에 장단을 맞추고, 원정이란 이름으로 왕족들과 야외 나들이를 나갔다. 부족한 것도, 변하는 것도 없는 나날.
그래, 이런 게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인가. 몇 년 후면 내 앞에 수많은 귀족영애들이 줄을 서고 나는 그중에 가장 아름다운 여성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려 행복한 여생을 보내게 되겠지.
그는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때까지 그래왔듯이 미래도 모든 게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기헨이 세워지고 300년 동안 그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저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며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술자리에서 이따금 핀에게 사는 게 재미없다고 농을 던지기도 했지만 그게 복에 겨운 헛소리란 건 핀도, 그 자기 자신도 잘 알았다.
용이 기헨을 덮쳤던 그 날 아침. 레온하르트는 한창 근위대 훈련 중이었다. 그는 핀과 함께 신참 병사들의 검술을 봐주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다. 아무런 특이점이라곤 없는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갑자기 훈련장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소나기라도 내리나 하며 올려다본 하늘엔 상상도 못 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새들이 하늘을 빽빽이 메우고 있었다. 아니, 저건 새라기에는 너무 크다. 뭣보다 저렇게 많은 새가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홀연히 나타날 수 있을까? 실루엣을 자세히 보니 분명 새가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핀도 다른 병사들도 그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모두가 아연실색하고 있을 때, 바로 옆 왕궁에서 병사 하나가 달려와 외쳤다.
왕께서 사로잡히셨고, 왕궁은 함락당했다고.
그렇게 그가 누려 온 모든 것들과 미래는 한낱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렸다. 충성을 바쳤던 왕은 가장 먼저 사로잡혀 버렸다. 지금껏 단련한 기술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 어떤 교본이나 기술서에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적을 상대하는 전술은 쓰여있지 않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가 겪은 충격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모두 어린아이에게 밟힌 개미떼처럼 우왕좌왕했다. 이곳저곳에서 좋지 않은 소식만 들렸다. 가장 먼저 제정신을 차린 건 핀이였다. 장군께선 지금 뭐 하시는 거냐, 남은 병사들만이라도 살려 도망쳐야 한다며 소리를 질렀다.
레온하르트도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책임감을 쥐어짜 내어 간신히 공포를 이겨냈다. 하나둘 용의 발톱에 붙잡혀 하늘 너머로 사라져간다. 한시라도 빨리 도망쳐야 했다.
수도는 이미 가망이 없었다. 왕궁 지하 비밀 통로를 통해 일단 성 밖으로 나가야 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그리프가 고안한 마지막 탈출로였다.
남은 병사들을 되는대로 갈무리해 시가지로 달렸다. 때아닌 날벼락에 도망칠 길도 찾지 못한 시민들을 진정시키고 지하 통로로 이끌었다.
그렇게 병사들과 함께 최대한 많은 시민을 대피시키던 중 귀족 대부분이 용의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물론 그 중엔 레온하르트의 부모님도 있었다.
마음속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사람들을 이끄는 자리에 선 사람으로서 절대 내색할 순 없었다. 그저 속만 썩어 문드러진다.
마지막 시민이 지하 통로를 내려간다. 핀과 함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대피행렬의 가장 마지막에 합류했다. 비밀 통로는 성 외곽 이름 없는 작은 숲으로 이어져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안전한 곳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수풀 너머로 함락된 수도를 바라보며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왕과 부모님을 구할 거라고. 그러고선 용의 비늘로 제련된 갑옷과 용의 이빨을 갈아 만든 창검을 두르고 돌아와 자랑스럽게 개선문을 지날 거라고.
거기서 눈을 떴다. 꿈보다도 더 꿈같은 현실로 돌아왔다.
새 이불의 푹신하고 매끈한 감촉이 레온하르트의 맨살에 전해진다. 첫날 눈을 떴던 그 빈 손님방이다.
눈가가 촉촉하다. 베개에 젖은 자국이 선명하다. 일어날 기분이 들지 않는다. 두 손을 눈두덩이에 올린다. 아무것도 보기 싫었다.
하하. 헛웃음이 나온다. 나는 결국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였다. 왕과 부모님을 구한다고? 내가?
지난 1년간의 기억이 물밀듯 쏟아진다. 그건 투쟁이 아니라 비겁한 도피였다. 마지막엔 기헨을 버리고 미지의 북쪽으로 도망치려 하지 않았나?
용을 이기기 위해 아무리 연구하고 고민해도 활로는 보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용은 하늘을 날았다. 눈, 코, 귀 모든 감각이 발달하였고 탐색 마법까지 사용했다.당장 하루 잠들 곳도 마련하지 못 하는 경우가 많았다.
먹을 것도 점점 부족해졌다. 얼마 안 되는 곡식 가루를 최대한 불린 허여멀건한 죽이 모두의 주식이 되었다. 평생 부족함 없이 살아온 기헨의 시민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언젠가부터 인가 피난민 사이에서 묘한 소문이 돌았다. 용들은 웬만해선 사람을 죽이지 않고, 포로를 인간적으로 대해준다는 소문이었다. 자유를 아주 조금만 포기하면 오히려 예전보다 더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말이다.
실제로 용들은 인간을 습격할 때 최대한 생포를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떨 때는 작은 상처를 입히는 것도 꺼리는 듯이 느껴졌다. 사상자의 대부분은 붙잡히기 직전의 자결이나 사고로 발생했고, 그 수도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괴소문은 그전에도 많았다. 용들이 인간을 산 채로 가마솥에 끓여 생명력과 마력을 추출한다던가, 계속해서 피와 살을 먹어야 해서 인간 목장을 운영하려 한다던가.
그중에서도 가장 황당한 건 용이 인간의 성별을 바꾸어 노리개로 삼는다는 소문이었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다.
그래도 다른 괴소문과 그 묘한 소문은 달랐다. 용을 긍정적으로 말하는 소문은 그게 처음이었다.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기대는 전염병처럼 퍼져 불안과 불만에 불을 붙였다. 편안한 잠자리와 부족하지 않은 한상차림을 위해 무리를 떠나는 이들이 점차 많아졌다.
그날 그저 가만히 있었으면 되었을 것을 왜 우리까지 도망치게 만들었냐고 소리치는 이도 있었다. 이미 계급이고 지위고 없었다.
네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소리에는 무심코 주먹이 나갈 뻔했다. 핀이 말려주지 않았다면 그 녀석을 때려죽였을지도 모른다. 수도를 떠날 때 이백 명도 넘었던 행렬이 종국엔 이십 명도 남지 않았다.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아무리 눈두덩이를 막아봐도 손 틈으로 눈물이 새어 나와 또 베개를 적셨다. 그때 그 녀석의 말이 사실이 아니었을까. 레온하르트도 마지막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현실에서 도망쳤었다.
가스파르에게 붙잡히고 난 후부터 계속 고민했었다. 바뀐 몸이 너무 황당하고 분해서 눈물짓던 밤도 많았지만, 귀족일 때 부럽지 않은 풍족한 식사와 포근한 잠자리를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가스파르는 재수 없는 녀석이고, 다른 메이드들도 이따금 짓궂게 굴거나 잡무를 떠넘겨왔지만, 눈부터 퀭한 피난민들을 보는 것보단 백번 나았다.
이 성의 사람들은 가끔 짜증이 날 뿐 절대 나쁜 이들은 아니었다. 모든 게 낯선 리오나를 충분히 배려해 주었고 이해해 주었다. 지난 두 달이 그전 일 년보다 훨씬 행복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다른 메이드들도 그랬다. 리오나나 다른 인간들보다 훨씬 먼저 용에 굴복한 그녀들은 언제나 행복해 보였다.정해진 일과가 끝나면 서로 담소를 나누고 유유자적하게 뜨개질이나 독서 같은 취미생활을 즐겼다.
무엇보다 가스파르를 향한 연모와 충성심은 대단했다. 그를 보는 건 물론이고, 상상하는 것만으로 행복해하는 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자신은 대체 뭘 한 건가.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그제서야 조금 전까지 자신이 했던 행위가 떠올랐다. 뭐가 개선문이냐. 왕과 부모님을 구한다고? 그 원흉의 자지나 빠는 년이?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다.
정말 한심한 놈이었다. 스스로 해낸 건 무엇 하나 없으면서 주어진 행복을 그저 누리기만 했다.
정작 중요할 때 혼자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을 이끄는 자리에 있으면서 그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했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고집을 부려 핀같이 가까운 사람부터 실망시켰다. 긍지 같은 헛소리를 하며 육욕에 허덕였다.
자신이 한없이 작고 하찮은 존재로 느껴진다. 감정이 주체 되지 않는다. 리오나가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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