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의 화원-7화 (7/62)

〈 7화 〉 리오나 (7)

* * *

가스파르는 분홍색 액체가 든 주전자와 고급스러운 선물상자를 들고 리오나가 있는 손님방으로 향했다. 다른 메이드를 시킬까 했지만, 역시 리오나를 또 보고 싶었다.

지금 상태의 리오나를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최대한 자주 보고 기억에 새겨야 한다. 경멸과 욕정이 뒤섞인 리오나의 얼굴이 뇌리에 선명하다.

이만큼 흥미로운 아이는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다른 메이드들도 물론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리오나는 그 누구보다도 특별했다.

일단 크게 보면 작은 체구에 앳된 얼굴이 보호 욕구와 소유욕을 자극한다. 투명한 피부가 덧없는 느낌을 준다. 그 작은 손을 꼭 붙잡지 않으면 금세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그러면서도 짙은 색의 금발과 깊고 푸른 눈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자연스럽게 오뚝하고 가지런한 이목구비에 눈길이 간다. 크고 동그란 눈에 작은 코가 사랑스럽다.

작고 도톰한 입술은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도 붉고 선명해서 어딘가 야하다. 몸과 얼굴의 모든 요소가 세련되고 오밀조밀해서 한번 보면 눈을 뗄 수가 없다.

외모도 외모지만 리오나의 가장 큰 매력은 그 성격이었다. 자신감이 강하고 심지가 올곧았다. 주인인 가스파르 앞에서도 기죽지 않았다.

일부러 까다롭게 문제를 지적하면 다음엔 더 완벽하게 일을 해냈다. 다른 메이드가 없을 땐 거의 대들기까지 한다. 그가 처음 겪는 캐릭터였다.

사랑을 받고 자란 티가 났다. 처음엔 이따금 헤어진 이들을 걱정하기도 했지만, 뿌리부터 밝은 아이라 금세 이곳 생활에 적응했다. 선배 메이드들을 졸랑졸랑 따라다니며 순진한 얼굴로 궁금한 것을 묻곤 했다.

무엇보다 스킨쉽이 잦았다. 심심하면 선배 메이드 손을 잡거나 팔짱을 꼈다. 아일라가 선배에게 버릇이 없다며 몇 번이고 주의를 시키었으나,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인지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

메이드들은 그런 스킨쉽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리오나에 치인 메이드들이 많이 보였다. 리오나에게 일부러 짓궂게 굴거나, 일을 떠넘기고 몰래 지켜만 보는 아이를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도대체 저게 뭐 하는 건가 싶었지만, 둘 다 귀여워서 그냥 뒀다. 아일라는 리오나의 팬티를 훔친 적도 있었다. 아니 걔는 원래 그랬나.

여기엔 살아오면서 겪은 여러 인간 군상과 세파 탓에 상처 입거나 더러워진 영혼을 가진 아이가 많다. 가스파르는 언제나 전장에서 자신의 그릇이 될 이를 찾았다. 모두 한때 군사를 이끌었거나, 암살과 밀정을 생업으로 하던 이들이다.

삶의 한순간 한순간마다 유혈이 낭자하고, 배신과 술수가 난무한다. 방식이야 어떻든 그런 상처를 쓰다듬어주고 치유하는 게 자신이 할 일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그런데 리오나는 거의 순수했다. 배신이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자기가 지난 1년간 꽤 고생한 줄 알던데 다른 메이드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거다.

엘프인 아일라나 드워프인 미나는 수백 년을 전장에서 살았고, 용들과도 십수 년을 싸웠다. 300년 동안 평화에 젖어있다가 1년도 안 돼서 완전히 정복당한 인간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앞으로 시간이 얼마가 지나든 그 둘이 리오나 같은 미소를 짓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리오나는 두 달 만에 이 성에서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아무도 표현한 적이 없으니 아무것도 모르지 않을까. 리오나라면 그럴 거 같다.

“하아…….”

왜인지 갑자기 한숨이 나왔다. 용이 이 짓거리를 시작한 지도 벌써 만 년이 지났다. 용이 어디서부터 왔고 무슨 기원을 가졌는지는 사실 용들도 잘 알지 못한다.

단순한 돌연변이거나, 특수한 마력에 노출된 도마뱀이 그들의 선조일 거라 추측만 할 뿐이다. 아무튼, 용들은 꾸준히 그 강인한 육체와 높은 지능을 진화시켜왔다.

그러다 점차 무리를 이루기보단 혼자 생활하는 용이 많아졌다. 초기 용들은 무리의 중요성을 깨닫고 사회를 이루고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다.

하지만 사회가 발달하고 계층이 세분되자, 전통과 규율에 싫증을 느낀 용들이 하나둘 무리를 떠났다. 어차피 생존을 위협하는 천적도 없고, 하늘은 넓었다. 혼자 살아도 불편할 게 없었다.

문화와 기술의 요람이자 용들의 고향이었던 하늘 대륙은 금세 황폐해졌다. 대신 암석과 흙을 마법으로 띄워 만든 용의 둥지가 하늘 곳곳에 생겼다. 다들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버렸다.

마법 연구에 매진하거나, 지상의 작고 빤짝이는 돌에 집착하거나, 모습을 바꿔가며 다른 생물들과의 성관계에 몰두하는 이도 있었다.

서로의 거리가 멀어지자 임신하는 용의 수가 급감했다. 수컷은 굳이 암컷에게 구애하지 않았고, 암컷도 이를 아쉽게 여기지 않았다.

하늘에서 새끼 용을 찾아볼 수가 없어졌다. 하지만 이에 위기감을 느낀 용도 없었다. 어차피 자신들은 거의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고령화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진행되었다.

결국, 예정된 일이 일어났다. 용끼리 성관계를 해도 알이 배이지 않았다. 마력과 정신이 늙지 않아도 육체는 늙어 간다. 남은 모든 암컷이 알을 배기엔 너무 늙어버린 것이다. 용의 너무나도 긴 수명과 간격이 넓은 배란기 때문에 비롯된 비극이었다.

종의 위기를 맞이한 용들은 회의에 회의를 거듭했다. 인간이 그러하듯 늙은 수컷 용의 정자는 아직 쓸만했다. 다른 종의 암컷의 도움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의 실험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용들은 자손들이 자신들과 비슷하거나 더 나은 마력과 지능을 갖길 원했다. 온갖 마법과 개조를 거듭해서 다른 종의 암컷을 임신시키는 것에 성공해도, 결과물은 언제나 참혹했다.

새끼는 용에게는 불순물에 지나지 않는 어미의 유전 정보에 큰 영향을 받았다. 암컷 오크는 오크를, 암컷 엘프는 엘프를 배기로 세상이 정한 것처럼 무슨 방법을 써도 어미의 영향을 지울 수 없었다. 지상에선 나날이 용에 대한 흉악한 소문이 떠돌았다.

마력 시험관에서 세포를 배양하거나, 만들어둔 용의 자궁을 다른 종의 암컷에게 이식하는 실험도 진행되었다.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용은 성체가 되지 못했고, 자궁 이식은 극심한 거부반응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면서 용들은 마력과 생명에 관한 방대한 지식을 축적했다. 마력은 곧 생명의 근원이자 힘이었다.

생명체의 마력을 조작하는 것만으로 육체와 정신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마력으로만 구성된 생명체를 탄생시키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그 또한 모두 실패했다.

모든 프로젝트가 벽에 부딪히고, 지상의 주민들이 위험을 느끼고 용들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제시되었다. 다른 종의 수컷을 암컷으로 만들고, 그 내부마력으로 용의 자궁의 모방 기관을 만드는 것이었다.

대상의 내부마력을 이용한 기관 생성은 그전부터 거부반응을 줄이기 위해 고안된 방법이었다. 그러나 암컷에게 같은 방식으로 모방 기관을 만들면 기존 기관과 충돌하거나, 모체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큰 충격을 주어서 폐기된 방법이었다. 그러나 수컷에게는 달랐다.

수컷을 암컷으로 바꾸는 일 따윈 이미 간단했다. 단지 자궁과 성기를 완성하는 일만 미루면 되었다. 같은 기관끼리 충돌할 일도 없어서 육체에 가해지는 충격도 거의 없었다.

당연히 거부반응도 없었고, 시험관과는 다르게 알에 항상 적절한 온기와 영양을 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온전히 용이 창조해낸 생식기능이기에 암컷과는 다르게 유전 환경을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었다.

엘프를 대상으로 한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용들은 그날밤 바로 지상에 선전포고문을 보냈다.

생각해보면 참 끔찍한 짓이다. 아무리 용의 생존을 위해서라지만 다른 종족으로선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에 대한 죄책감일까, 가스파르는 적어도 그 과정에서 상처 입고 병든 이들에게 행복한 둥지를 마련해 주고 싶었다.

리오나가 그렇게 밝고 무구한 아이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뭐, 리오나 같은 아이가 한 명쯤 있는 게 다른 아이들에게도 좋겠지.

다른 용들은 트라우마라도 생긴 건지 번식에만 열중이다. 용왕은 벌써 또 다른 대륙의 다른 종족에 씨앗을 뿌린다고 한다. 있는 것만 먹어도 몇만 년은 떡을 칠 것 같은데. 좋은 게 좋은 거란 생각이겠지. 그러려니 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손님방 문 앞이다. 마법을 안 쓰고 걸어 다니면 역시 이 성은 너무 넓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리모델링을 해야 하나.

힝힝, 힝.

문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린다. 당황해서 다급히 문을 연다.

“우우…. 우와아아앙!”

리오나가 목청 높여 울고 있다. 홀딱 벗은 채로 침대 가운데 W자로 앉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자지를 물다 지쳐 쓰러졌던 년이 뭔가 싶다. 침대 옆 탁자에 주전자와 선물상자를 내려놓고 다가선다.

“흑, 나가! 다 누구 때문인데! 변태! 머저리!”

“그래, 그래. 또 뭐가 문젠가?”

“나가! 나가라고! 에잇! 잇!”

조막만 한 손으로 때려댄다. 전혀 아프지 않다. 침대 위로 올라가 강제로 끌어안는다. 우는 모습도 그저 사랑스럽다.몸이 참 가볍다. 보드라운 맨살이 기분 좋다. 머리까지 쓰다듬어 주자 차츰 얌전해진다. 용의 문장이 밝게 빛나는 게 보인다.

“진짜…. 진짜 나쁜 놈….”

리오나가 품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