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리오나 (8)
* * *
“진정했나? 이제 뭐가 문제였는지 말해 주게.”
“뭐? 문제? 다 너 때문이야! 너희 용들 때문이라고! 니들이 뭔데 마음대로 남의 인생을 짓밟고 가지고 놀아!”
아직 진정이 덜 되었나 보다. 솔직한 감정을 부딪쳐 온다. 다 사실이니 뭐라 해줄 말도 없다.
리오나는 자기 인생을 짓밟혔다는 원통함과 한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감에 격해진 감정을 드러내는 중이지만, 가스파르에겐 이 또한 익숙한 일이었다.
용의 문장이 처음 각성하면 잠시 호르몬 분비가 이상해져 쉽게 격양되고 우울감에 빠진다. 다른 메이드들도 다 겪은 일이다.
“미안하네. 하지만 우리도 생존이 걸려 있는 일이야. 그래도 최소한 그 전보다 행복한….”
퍽. 입술에 주먹이 박혔다. 아프진 않았지만, 꽤 기분이 나쁘다.
“행복? 누가 그런 걸 바랬다고 그래! 왜 남의 인생을 네 멋대로 정하냔 말이야! 왜!”
“그 말이 맞아. 정말 미안하네. 그래도 일단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겠나.”
손을 잡고 지긋이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한다.
용들이 왜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 가스파르가 무슨 생각으로 리오나나 다른 아이들을 거둬들였는지. 당연히 불리한 부분은 쏙 뺐다.
“흥! 모두 다 너희 사정이잖아. 우리랑 무슨 관계가 있는데? 그리고 자기가 무슨 신이라도 된 것 같아? 누가 구원해 달랬어? 누가 구원해 달랬냐고!”
리오나한테는 딱히 그런 생각 한 적 없는데. 뭐, 아무튼.
“용과 인간이 관계없는 건 아니지. 리오나. 네가 쓰는 언어부터 어디서 왔는지는 아나?”
리오나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서는 뭔가 분한 듯 눈을 피하고 입을 다물어버린다.
“우린 언어와 문자는 물론이고, 마법과 문화까지 인간에게 전수해 주었네. 용이 아니었다면 인간은 아직도 동굴 속에서 쥐나 잡아먹으며 살았겠지. 수많은 사람을 미개와 기아로부터 구한 거라고 생각되지 않나?”
궤변이다. 하지만 이걸로도 지금의 리오나를 구슬릴 자신이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용의 문장의 색이 변하고 작은 한숨 소리가 들린다. 두른 팔에 힘을 주어 리오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렇다고 해서 너희가 하는 짓이 정당화될 거 같아? 게다가 너희가 떠난 후로도 인간은 멀쩡히 발전해 왔어. 너희 도움 따위 없었어도….”
“기헨이 어떻게 수십 년 만에 대륙을 통일했는지 궁금하지 않나?”
리오나가 무섭게 노려본다. 말이 잘려서 불쾌한 건가. 아니, 그것보단 소중한 걸 빼앗겨 분해하는 아이 같다.
“…더 말하지 마.”
“아니, 해야겠네. 아무런 기반도 없던 그리프가 그렇게 짧은 시간 만에 대륙을 통일한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우리도 인간이 전쟁과 기근으로 멸망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네.”
“말하지 말라니까!”
리오나가 품속에서 발버둥 친다. 그저 꼬옥 하고 안아준다.
“우린 가장 고결한 인간을 찾아 우리의 힘과 지혜를 나누어 주었지. 그리프와 하츠펠트가 어떤 남자였는지 들으면 놀랄 걸세."
퍽퍽. 가슴에 주먹이 박힌다.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잇는다.
"우리도 탄복할 정도로 고고하고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들이었어. 우린 그저 그들에게 그 이상을 실현할 힘을 준 것에 불과해. 그래, 리오나. 네 말대로 인간은 자신들의…. 리오나?”
갑자기 얌전해졌길래 얼굴을 들여다보니, 셔츠에 머리를 박고 소리 없이 또 울고 있었다. 자신의 근본을 부정당한 것처럼 느끼는 것 같다. 기헨과 하츠펠트가 레온하르트의 성장에 미친 영향이 막대했나 보다.
하츠펠트의 그날과 리오나의 오늘은 용이 처음 인간과 만났을 때부터 정해진 미래였을 뿐인데. 남은 한 손으로 마법을 사용해 손수건을 만든다. 그 손수건으로 조용히 그녀의 눈물을 닦아준다.
“흑. 조금 더 강하다고 해서, 멋대로 간섭하고 가지고 놀고…. 우리가 개나 고양이로 보이지?”
점차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이제야 조금 진정이 되었나 보다.
“우린 자네들을 사랑하고 존중한다네. 자네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비참한 꼴을 더 보기 싫었을 뿐이야.”
거짓말이었다. 다 죽으면 그릇으로 써먹을 수가 없으니 스스로 세운 원칙을 어기고 부랴부랴 개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말한 것 중 그나마 사실인 건 가스파르가 다른 인간이나 리오나를 개나 고양이로 보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개나 고양이보다는 꽃.
물과 햇빛만 주면 아름답게 피어서 주인을 기쁘게 하는 꽃. 혼자서 살 수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는 화분 속 나만의 작은 꽃. 가스파르에게 메이드들은 그런 존재였다.
리오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 귀엽다. 계속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사과하지, 리오나.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지 말해주게.”
몇 분이나 그러고 있었을까. 차분한 어조로 물어 본다.
“…내 부모님께선 안녕하신 거지?”
“물론이지. 지금이라도 만나게 해줄 수도 있네.”
“그, 그건 괜찮아. 좀 나중에.”
사실 가스파르는 레온하르트의 부모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굳이 찾아보면 알 수도 있지만,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
설령 알았다 해도 만나게 해줄 생각은 없었다. 리오나가 여자가 된 지금 모습을 부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한 빈말이다. 나중에도 없다. 어차피 앞으로 몇 달만 있으면 부모 따위 생각도 나지 않을 것이다.
“핀이나 다른 사람들도 잘 지내는 거 맞지?”
“당연하지. 다른 메이드들을 보면 모르겠나. 모두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네.”
그저 행복의 크기나 양만 따진다면 그쪽이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지경이다. 그래, 정말 단순히 행복의 총량만 따진다면 말이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여자들은 다 어떻게 한 거야? 너희한테는 쓸모가 없을 텐데.”
“우리도 인간이라는 종을 완전히 절멸시키고 종속시키려는 게 아니야. 인간도 다시 인간만의 사회를 구축해야 하지 않겠나? 모든 인간 남자가 그릇이 된 것도 아니지. 지금은 잠시 잡아두고 있지만, 곧 다시 지상으로 내려보내서 원래의 생활을 하게 할 걸세.”
“흐응…?”
뭔가 납득이 되지 않는 표정이다. 그야 그렇겠지. 거짓말이니까. 완전히 지배할 게 아니었다면 그렇게 대대적인 침공을 하지는 않았을 거다. 1년 동안이나 레온하르트 무리를 쫓지도 않았을 거고.
살며시 용의 문장을 쓰다듬어준다. 하앙. 작은 신음이 들린다. 손등을 한 대 맞았지만, 리오나의 집중을 흩트려 놓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리고 인간 여성은 절대 쓸모없지 않다. 100명의 인간 아기를 위해서는 한 명의 인간 수컷이면 충분하지만, 인간 암컷은 100명의 인간 아기를 위해서….
“됐어. 물 줘. 울었더니 목말라.”
이젠 종이 주인을 부려먹는다. 더 생각하는 것도 귀찮은 모양이다. 그래, 그거면 된다. 만년 넘게 이곳에서 생활한 아일라도 밖의 일은 잘 모른다. 꽃에게는 다 필요 없는 것들이다.
리오나를 침대 위에 살포시 내려놓고, 가지고 온 주전자에 든 분홍색 액체를 잔에 따라준다. 벌컥벌컥 잘도 마신다. 정말 목이 말랐나 보다.
“푸핫. 하아. 이제야 진정되네.”
다시 리오나의 곁에 앉았다. 리오나의 아름다운 금발을 만지작만지작 장난쳐 본다. 리오나도 딱히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주고 싶은게 있었는데.”
탁자 위에 올려둔 선물상자를 인제서야 개봉한다. 원래 이걸 주려고 왔었다. 천천히 케이스를 연다. 리오나도 일어서서 상자 안을 들여다본다. 내용물은 검고 심플한 디자인의 초커다. 가운데 달린 옅은 분홍색 보석이 포인트다.
“받아주겠나. 아주 예전에 모았었던 보석이네. 그 목에 걸면 아주 예쁠 것 같아서.”
보석이 음란한 분홍빛을 발한다. 리오나도 홀린 듯 눈빛이 변하고 보석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리오나의 눈에 분홍색 안개가 낀다.
“으, 응. 고마워….”
조심스럽게 목에 초커를 채워준다. 리오나의 볼이 빨개진다. 선물까지 받으니 마음이 풀린 걸까. 약간 당황한 것 같으면서도 나쁘진 않다는 표정이다.
해가 구름을 벗어난 걸까, 창문 너머 햇빛이 침대 위에 쏟아진다. 초커의 보석이 밝게 빛나고, 리오나의 몸의 윤곽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거룩하고 고귀한 느낌마저 준다. 지금까지 보아 온 어떤 예술품보다도 아름답다. 자연스럽게 가스파르의 몸이 기운다.
얼굴이 가깝다. 분위기도 좋다. 이대로 키스까진 해버려도 될 것 같다. 그대로 얼굴을 밀착한다.
톡.
일방통행하던 가스파르의 입술이 리오나의 두 손가락에 가로막힌다. 그대로 일시정지.
“적어도 오늘은 안 돼. 내가 다 납득한 것도 아니니까.”
리오나는 단호하다. 이번에는 가스파르의 얼굴이 붉어진다. 메이드 상대로 이렇게 민망한 경험을 한 건 처음이다. 씁쓸하고 오묘한 감정이 끓어오른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걸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래, 그. 뭐, 그렇지. 맞아. 으음. 나도 뭐, 어? 그렇게. 응?”
고장 난 축음기처럼 말을 더듬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 씨. 쪽팔리게.
그러거나 말거나 리오나는 받은 초커를 드러내며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한다. 아직도 알몸인 채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런저런 자세를 잡아 본다. 선물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초커의 보석엔 가스파르가 건 마법이 숨겨져 있다. 불안정해진 호르몬 분비를 다잡고, 아직 남아있는 남성스러운 생각이나 행동 아주 사소한 몸짓이나 습관까지 를 리오나가 모르는 사이 여성스럽게 교정하는 마법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레온하르트란 이름의 남자였다는 건 그저 단순한 사실이 되어 리오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성스럽게 웃고, 말하며 행동하게 될 테니까. 자연스럽게 가스파르와의 행위에 대한 거부감도 없어질 거다.
가스파르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정말 고마워. 앞으로 계속 쓰고 다닐 테니까. 응? 그러니까 이제 좀 얼굴 풀어.”
리오나는 선물까지 받아놓고 조금 미안해졌는지, 가스파르의 표정을 살피며 위로한다.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가스파르는 그대로 뒤로 넘어지듯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서는 리오나의 향기가 났다. 리오나는 아직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 이런 일에 기분 상할 이유야 없지. 미래는 어차피 정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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