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리오나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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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침부터 분주하다.
오늘 저녁, 가스파르의 성에서 용과 인간의 종전을 기념하는 파티가 열린다. 오늘 처음 열리는 파티는 아니고, 본연회는 이미 일주일 전 용왕궁에서 열렸다.
용들은 흥에 취해 성에서 성을 돌며 이차, 삼차를 거듭하더니, 이제는 육차회라며 가스파르의 성까지 도달한 것이다. 요 근래 가스파르가 성을 자주 비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엄청난 양의 식자재와 술이 주방을 날아다닌다. 마법에 능숙한 미나가 아니었다면 메이드 모두가 온종일을 씨름해도 재료 손질조차 끝내지 못했을 거다.
아일라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메이드들을 진두지휘한다. 성 구석구석을 먼지 한 톨, 얼룩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청소한다. 가구와 미술품들의 위치가 이리저리 바뀐다.
용왕도 행사에 참여하기 때문인지, 가스파르도 메이드들을 도왔다. 리오나에게는 아직 준비도 안 된 연회장 중앙에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가스파르는 지금 온갖 일을 마법으로 처리하고 있다.
성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백 개는 넘는 그릇과 식기들이 하늘을 날아 수십 개가 넘는 테이블 위에 안착한다. 온갖 진수성찬들이 그 그릇에 담긴다. 저녁까지 온기와 신선함을 유지하기 위해 보존마법이 덧씌워진다. 가스파르 혼자서 한 시간 만에 연회장의 준비를 끝낸다.
가사 경험도 부족하고 마법의 소양도 없는 리오나는 선배들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며 잡무나 처리하고 있다. 이번 파티의 개최 이유를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갑갑하다. 말이 종전 기념이지 사실상 승전 기념 파티다.
이번 파티 참석자 명단에 용의 이름은 빼곡히 적혀 있지만, 인간의 이름은 찾을 수 없다. 단지 용들끼리 승리를 자축하며 질펀하게 먹고 마시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지금 누가 인간의 대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그저 용에게 허수아비처럼 세워져 종전 협정을 강요당했을 것이다. 용에게 둘러싸여 억지스러운 주장과 어처구니없는 조약이 적힌 문서에 벌벌 떨며 서명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대외적으로는 인간의 자치를 인정하는 척하면서 모든 권한과 재산이 용의 소유가 되었을 게 뻔하다. 명목상 전쟁포로인 리오나나 핀과 같은 이들의 존재는 철저히 무시당한 채 말이다. 종전이라니 정말 웃기지도 않는다.
용들도 참 인간 같은 짓을 하는구나. 아니, 인간이 용과 같은 짓을 해왔던 건가.
구슬땀을 흘리며 일에 열중하는 선배 메이드들을 바라본다. 갑자기 혼자가 된 기분이다. 자신이 가스파르에게 붙잡혀 여자가 된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나도 저들처럼 타성에 젖어 가스파르만을 위해 살아가게 될까.
아무리 용들이 다른 종족의 행복을 보장해 준다고 해도 그들의 존엄과 자유까지 보장해 줄 리 없었다. 오늘 일어날 일만 봐도 그렇다. 용들은 그저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 먹고 마시며 즐길 뿐이다. 그들을 위해 그림자에서 고생하는 건 언제나 다른 종족의 몫이다.
…괜스레 목이 마르다. 오늘은 늦잠을 잤다. 아일라의 호통에 서두르느라 아침에 물 한 잔 마시지 못 했다.
리오나가 물을 찾으러 발걸음을 돌렸을 때.
“어~? 리오나~? 찾고 있었다고요~.”
마야다. 찾고 있었다면서 느긋하게 손을 흔들며 천천히 리오나에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일을 하기나 한 건지 땀 한 방울 흘리지도 않고, 아주 여유로운 태도다.
“아일라~? 리오나를 잠시 빌려도 될까요~?”
“어머, 마야. 갑자기 왜…. 아, 그래요. 리오나에게 오늘 파티에 대해 좀 알려 주세요. 리오나. 당신도 지쳤을 텐데 마야하고 잠시 쉬었다 와요.”
“…? 네, 선배님.”
아수라장을 떠나 마야를 따라간다. 마야가 리오나를 찾다니 처음 있는 일이다. 징벌실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왜인지 엉덩이가 욱신거린다. 그래도 마야는 미나처럼 우악스러운 짓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잠시 소란에서 벗어나는 것도 좋았다. 느긋한 성격의 마야 옆에서라면 잠시 생각을 정리 할 수 있겠지. 리오나는 종종걸음으로 마야의 뒤를 쫓았다.
“흐흥~? 리오나~? 왜 제가 리오나를 불러냈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리오나는 마야와 같이 메이드들의 휴게실로 들어간다. 마야는 딱히 쉬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
“네. 제가 선배님이랑은 대화를 많이 나누어 보질 못해서.”
마야가 리오나를 화장대 앞 의자에 앉힌다. 거울 속에는 약간 당황스러운 표정의 리오나가 있다. 약간 땀에 젖었다. 머리나 옷에는 먼지가 달라붙었다. 으으, 또 씻는 건 귀찮은데.
“딱히~? 말의 대화가 그렇게 많이 필요한가요~? 우린 이미 몸의 대화를 나눈 상대인데~?”
마야가 거울 옆에 놓인 주전자에서 그 내용물을 따라준다. 분홍색 액체가 잔에 담긴다. 탁한 단내와 진한 마력이 일렁인다. 누가 봐도 평범한 물은 아니다.
하지만 리오나에겐 매일같이 마셔온 평범한 물일 뿐이다. 안 그래도 목이 말랐는데. 리오나는 평소처럼 그 분홍색 액체를 단숨에 들이켠다.
진한 단맛이 입안에 감돈다. 차갑지도 않은 데다, 기름지고 달기까지 한 음료다. 그런데도 어째서일까, 목 끝부터 머리까지 맑고 시원한 느낌이 퍼진다. 깊은 청량감에 얕은 한숨까지 나온다.
뒤이어 분홍색 액체의 마력이 리오나의 몸 곳곳으로 스며든다. 기분이 고양되고 마음에 안정이 찾아온다. 아침부터 쌓여온 피로도 풀리고 정신이 맑아진다. 갈증이 해소되니 답답했던 가슴도 뻥 뚫리는 것 같다. 괜한 걱정이나 고민까지 함께 날아간다.
리오나의 눈에 다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 언제 이렇게 더러워졌지? 내가 이런 꼴로 성을 돌아다녔다니,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진다. 한시라도 빨리 씻고 싶다.
괜스레 어깨 위의 먼지를 털고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린다.
“정말 열심히 일하셨나 보네요~? 착하지, 착하지~. 그럼 제가 상으로~ 에잇!”
마야가 손가락을 튕긴다. 리오나의 피부와 옷에서 땀이 가시고 먼지가 사라진다. 놀란 리오나가 손끝으로 볼이나 머리를 만져보니 뽀송뽀송하고 보드라운 느낌이 든다. 청결 마법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일라가 자신과 가스파르에게 목욕은 그저 마음의 안정을 위한 유희일 뿐, 딱히 몸의 청결을 위한 행위는 아니라고 했었지. 마야에게도 그만한 마법의 소양이 있었구나.
이 성에서는 다들 웬만한 일은 다 마법으로 처리한다. 마법에 아무런 재능이 없는 리오나는 그저 부러울 뿐이다.
“그리고~.”
마야가 작고 예쁜 분홍색 파우치에서 여러 화장품과 화장도구를 조심성 없이 쏟아낸다. 화장품 특유의 코를 찌르는 듯한 향기에 리오나의 얼굴이 구겨진다.
“선배님 이건 대체…?”
“리오나~? 다 큰 숙녀가 화장 하나 하지 않고 사람들과 만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에요~. 물론 리오나는 화장 없이도 충분히 아름답긴 하지만~."
마야가 여러 화장도구를 두 손에 끼운 채 묘한 포즈를 잡는다. 어딘가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꾸미면 분명 더 빛날 거예요~! 지금은 제가 다 도와드리겠지만, 나중엔 혼자서도 척척 하실 수 있도록 하나하나 다 알려드릴게요~! 괜찮겠죠, 리오나~?"
마야가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 처음이다. 이런 면도 있었구나.
그러고 보니 귀족 여성들은 모두 다 얼굴에 분을 칠했었지. 여자라면 본디 해야 하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네, 선배님 하고 싶으신 대로 해주세요."
리오나는 자세를 고쳐잡고 거울을 마주 본다.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소녀의 얼굴이 보인다. 넉 달 전 레온하르트는 이런 삶을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
화장. 반평생을 군인으로 살아 온 레온하르트와는 지금껏 연이 없는 단어였다. 가슴이 뛴다. 그에게 그건 여자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여성스러운 행위였다.리오나가 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하거나 알아보려 한 적이 없었다.
배 아래 쪽에서 아릿한 자극이 퍼진다. 자신은 원래 남자인데. 싫어해야 하는데. 자꾸만 이상한 생각만 든다.
어차피 몸은 여자가 된 거 꾸미지 않으면 손해 아닌가? 더 예뻐지는 건 여자라면 누구나 바랄 멋진 일이다. 분명 귀족영애들도 서로의 외모를 칭송하거나 시기하고는 했다. 무엇보다.
'가스파르가 보면 좋아해 줄까…?'
리오나 자신도 모르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위험한 감정이 싹튼다. 얼굴이 뜨겁다. 목에 걸린 초커의 보석이 밝게 빛난다. 마야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느껴진다.
"흐흥~. 아항~."
마야가 콧노래를 부르며 리오나의 머리를 만진다. 그러고는 마법으로 아주 뜨겁게 달군 두 쇠막대를 서로 맞대 리오나의 머리카락을 지진다.
처음에는 도대체 뭘 하는 건가 싶었지만, 이내 이해가 된다. 머리카락에 자연스러운 곡선이 생긴다. 머리카락 끝이 살짝 말려 올려져 동글동글한 인상을 준다.
헤어 스타일이 살짝 바뀌었을 뿐인데 인상이 크게 바뀐다. 더 순종적이고 연약하게 보인다. 리오나는 신기해하며 머리를 만지작거린다.
"너무 만지지 마세요~. 자 이쪽 보고~."
본격적인 화장이 시작된다. 마야는 익숙한 듯 리오나의 얼굴에 분을 바르고 그림을 그린다. 정말 낯선 감각이다. 마치 다시 구워지기 직전의 도자기라도 된 기분이다. 그림이 그려지고, 유약이 발라진다.
마야는 정말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리오나의 얼굴을 다룬다. 리오나는 화장품과 화장도구의 이름도 모른다. 뭔가를 이것저것 리오나의 피부에 펴바르더니 그 위에 또 분을 덮는다.
연필로 눈썹을 슥슥 그리고, 끝이 무슨 송충이같이 생긴 도구로 속눈썹을 다듬는다.
그러고서는 한참 동안 리오나를 이리저리 바라만 본다. 고심 끝에 짙은 붉은 색의 분을 아주 조금만 찍어 볼을 살짝 건든다.
마지막으로 입술에 립스틱을 바른다. 이윽고 마야의 손이 멈춘다. 리오나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본다.
"와…."
"어때요~? 저 힘냈다구요~!"
거울 속의 리오나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짙은 눈썹과 깊은 눈이 신비롭다. 피부는 더 생기롭게 피어오르고, 옅은 홍조가 마음을 흔든다.
빨간 입술은 관능적이고 도발적이다. 귀여운 머리와의 부조화가 묘하게 요염하다.
분명히 전과 다른 분위기의 미인이 거기 있었다. 하지만.
"서, 선배님 이건 너무 야하지 않나요? 저한테는 조금…."
"에~? 완전 예쁜데~? 완전 사랑스러운데~? 맘에 안 들어요~?"
마야는 크게 실망한 듯 어깨를 축 늘어트린다. 언제나 느긋하던 목소리도 기어들어 간다. 으으, 이거 너무 죄송한데.
리오나는 다시 거울을 바라본다. 확실히 남자들의 이목을 끌만한 매혹적인 얼굴이다. 그래도 자신한테는 너무 이른 거 같다.
속이 쓰리다. 계속 바라보면 장이 꼬이는 기분이다. 분명 아름답고 매력적인데 자기 자신이 아닌 것 같다.
자신은 지금도 남자고, 여자의 얼굴은 원래부터 가면인데. 그 위에 가짜 그림까지 덧씌워져서 그런 걸까. 본능적인 거부감이 앞선다. 처음부터 화장 따위 하자고 하는 게 아녔다. 마야 선배한테는 미안하지만 역시 이건….
"힝~. 그거 완전 주인님 취향에 맞춘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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