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의 화원-12화 (12/62)

〈 12화 〉 리오나 (12)

* * *

“그렇죠~?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 흐흐~. 흐흐흥~?”

리오나는 그냥 홍당무가 됐다. 귓불까지 새빨갛다. 마야는 헤실헤실 웃으며 리오나를 내려다본다. 애써 마야의 눈을 피해 보지만 발랑 드러난 속마음까지 숨길 수는 없다.

“아,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우리도 접대용 메이드 복으로 갈아입어야겠네요~. 잠시 기다리세요~. 흐흐흐~.”

마야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남기며 휴게실을 떠난다. 혼자 남겨진 리오나는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른다. 의자에 앉은 채로 발을 파닥거리고 애꿎은 화장대를 쾅쾅 내리친다. 당장이라도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싶지만, 화장이 지워질까 두려워 그러지는 못했다.

완전 가스파르 취향 맞춤인 이 화장이.

아아아아.

왜 그 말에 그렇게 반응해 버린 걸까. ‘주인님께서 좋아하신다면 저도 좋아요….’ 라니. 가스파르가 이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가스파르가 좋아하든 말든 자신하고는 하등 관계없는 일이다. 어떻게든 머리의 잡념을 떨쳐 낸다.

맞아, 난 마야 선배한테 너무 미안해서 그런 거다. 주인님 운운한 건 그저 구실일 뿐, 실망한 마야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어쩔 수 없이 이 화장을 받아들인 거다.

그리고 애초에 지금의 나는 메이드다. 메이드가 주인의 취향을 신경 쓰고 의사에 따르는 건 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특별한 감정 따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가슴이 뛰고 얼굴이 뜨거워진다. 어떤 쪽으로 생각해도 혼란스러운 머리는 제멋대로 폭주하고 만다. 덥다. 그래, 물이라도 마시고 진정하자.

“푸핫, 하아… 하아….”

아직도 머리가 뜨겁지만, 조금 진정이 된다. 다시 거울을 본다. 조금 선정적이고 도발적인 모습의 리오나가 거기 그대로 있었다. 어차피 하기로 한 거, 이번에는 제대로 관찰해본다.

조금 치장을 했을 뿐인데 주는 인상이 크게 다르다. 강조된 눈썹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얕게 피어오른 붉은 빛이 볼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빨간 입술은 확실히 고혹적이다.

정체 모를 혐오감만 주던 모습이 가스파르의 취향이라고 하니까 왜인지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뭐가 어떻든 예쁜 건 예쁜 거다. 새로운 자기 자신의 모습에 점점 더 빠져든다. 섹시하고 도발적인 표정과 포즈를 취해본다.

육체적 욕망을 자극하는 퇴폐미가 거기에 있었다. 자기 자신이지만 확실히 끌린다. 만약 레온하르트였다면 틀림없이 지금의 리오나를 침실로 초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스파르도 지금의 나를….

“으읏…! 하앙….”

갑자기 시작된 망상은 멈추지 않는다. 배 아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쓰린 쾌감이 스며 나온다. 허벅지가 저절로 비비 꼬인다. 허리가 뜨고 가슴이 조여온다.

홍조를 띤 채 안달 난 표정으로 가쁜 숨을 내쉬는 리오나의 얼굴이 거울 너머에 있었다. 안 그래도 욕정을 자극하는 얼굴이다. 그 음탕한 모습에 리오나의 흥분이 가속된다.

가슴과 가랑이에 저절로 손이 간다. 요즘 들어 이렇게 충동에 휘둘린 적이 없었는데. 가스파르의 얼굴과 목소리가 혼란한 머릿속을 헤집는다. 그의 따스한 품, 나를 들고 껴안았던 힘센 팔, 무엇보다 내 팔뚝보다 컸던 그….

“리오나~. 기다렸어요~?”

마야의 목소리에 가까스로 손을 멈춘다. 가스파르 앞에서 저지른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깜짝 놀란 몸과 머리에서도 열이 빠져나간다.

깊게 심호흡을 한다. 후우. 호흡이 안정되니 흥분도 다소 가라앉는다. 내가 정말 왜 그런 생각을. 그래, 분명 오늘 피곤해서 그렇다. 원래라면 그런 망상을 할 리가 없지. 이상한 생각 말고 오늘 있을 파티 준비에나 집중하자.

마야는 메이드 복 두 벌을 들고 생글생글 웃고 있다. 오늘은 정말 평소와 분위기가 다르다.

“아, 아뇨. 선배님. 근데 갑자기 옷은 왜…?”

“오늘은 즐거운 파티~! 우리도 그에 맞는 옷을 입어야죠~. 그런 칙칙한 옷으로 손님맞이를 할 수는 없잖아요~?”

마야나 리오나나 지금은 품이 넓고 움직이기 편한 평범한 메이드 복을 입고 있다. 목적과 용도를 생각하면 당연하다.

“자자~. 일어나 봐요, 분명 어울릴 거예요~.”

하지만 마야가 들고 있는 메이드 복은 다르다. 누가 봐도 사용된 천의 양이 적어 보였다. 윗도리는 대담하게 파였다. 입으면 윗가슴은 물론이고 가슴골까지 대놓고 보일 거다.

아래는 더 하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던 드레스와 앞치마는 온데간데없고, 엉덩이를 간신히 가리는 검은 미니스커트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작고 흰 앞치마. 원래의 메이드 복과는 다른 의미로 목적이 명확한 옷이다.

리오나나 미나면 모를까, 마야가 입으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 같다. 저 가슴이 다 담기기나 할까? 엉덩이는 그냥 다 보여주는 거나 다름없다.

“이런 걸 어떻게 입어요! 안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잔뜩 오는데….”

“그러니까 입는 거죠~. 오신 분들의 몸과 마음을 만족시켜드리고,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저희가 있는 건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 착하고 편한 사람들이라 생각했지만, 아직도 리오나와 선배 메이드들 사이엔 엄청난 사고의 차이가 있다. 원래 종족도 다르고 이 성에서 겪어온 시간만 해도 수백에서 수천 년은 차이가 난다.

조건도 없고 보상도 없는 그 무한한 충성과 애정은 리오나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용들이 뭐가 좋다고 이런 창부 같은 옷을 입어야 하지?

게다가 시녀들에게 야시꾸리한 옷을 입히고 그걸 즐기는 파티 따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용들에게는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나 수치심이란 게 없는 건가? 인간이 이런 것까지 배우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나는 여기서….

“…주인님도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파티 준비가 끝나간다. 이제 한시간만 있으면 수많은 용들이 가스파르의 둥지를 찾아 이 성에 도달할 것이다.

그중에는 용왕도 있다. 가스파르에게도 오늘은 중요한 날이다. 메이드들 사이에도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 와중에 리오나는.

‘역시 궁둥이까지 다 보이잖아! 그 녀석이 뭐라고. 난 또 왜 이런 옷까지 입었을까. 으으….’

쭈뼛쭈뼛하며 성의 복도를 걷는다.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지 안절부절못하며 가슴과 엉덩이를 가리려 애쓴다.

다른 메이드들도 하나둘 몸단장을 끝마치고 손님맞이를 위한 마지막 준비에 한창이다. 마야 말대로 모두 똑같이 그 야한 메이드 복을 입었다. 눈 둘 곳을 모르겠다. 파티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어지럽다.

저 멀리 앞서 걸어가는 미나의 모습이 보인다. 궁둥이가 살짝 보인다. 무릎 위까지 올린 양말 위로 조금 튀어나온 허벅지살이 귀여우면서도 야하다. 오묘한 곡선과 짧은 치마의 조합이 절묘하다. 근데 이거 범죄 아니야?

남들도 자기를 뒤에서 보면 저런 모습일까. 부끄러워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겠다. 화장도 그렇고 이 옷도 그렇고 절대 입는 게 아니었는데. 가스파르 그 녀석은 이런 게 뭐가 좋다고.

“하아….”

그래, 다 그 녀석 때문이다. 그 녀석도 수컷이니까 이런 천박하고 야한 게 좋겠지. 저질, 쓰레기. 변태. 아무리 손님들 때문이라지만 자기 메이드들한테 이런 옷을 입히다니. 나잇값, 얼굴값 둘 다 못하는 호색한.

…정말 마야 말처럼 이렇게 꾸미면 가스파르가 기뻐해 줄까.

“하아…하아….”

가스파르가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칭찬해줄까? 아니면 바뀐 걸 알아차리지도 못할까? 저번처럼 나에게 욕정 하면 어쩌지. 그래도 갑자기 덮쳐오지는 않을 거다.

“하아…하아…하아….”

이렇게 많은 메이드들이 같은 옷을 입고 성을 돌아다니고 있다. 다들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사실 가스파르는 리오나 따위 어떻게 되도 상관없는 건 아닐까.

그저 하룻밤을 때울 상대일 뿐. 화장을 하고 머리를 바꿔도 모르고 지나치는 건 아닐까.

나도 참 별별 생각을 다 한다. 라며 무시하려 해도 그 망상은 끊임없이 부푼다. 몸매도 그렇다. 미나 만큼 부족하지는 않지만 아일라나 마야처럼 풍성하지도 않다. 그저 평범한 가슴에 평범한 허리를 가졌을 뿐이다.

분명한 통증이 가슴을 찌른다. 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딘가 애달프고 쓸쓸해서 가슴이 저려온다. 그래, 분명히 이런 천박한 걸 좋아하는 그 변태용이라면 나 같은 거보단 마야같이 쭉쭉빵빵한 게 좋겠지.

가스파르가 리오나에게 욕정한 그날도 그랬다. 정말 리오나를 원했다면 그 자리에서 덮치면 될 것을 입만 도구처럼 사용하고는 떠나버렸다. 그날 밤에도 평소처럼 다른 메이드를 불러 성처리를 시켰겠지.

그렇다면 리오나는 뭘까. 단지 장난이나 변덕으로 리오나를 이 성에 붙잡아 두고 있는 건 아닐까.

부정적인 생각만 떠오른다. 아니, 뭔가 이상하다. 가스파르의 마음 따위 어쨌다고. 가스파르가 누구를 더 좋아하든 상관없다. 오히려 싫어해 주면 다행이지. 자신은 남자다. 언젠가 원래 몸으로 돌아가 용들을 무찌르고 인간들을 해방해야….

‘가스파르가 날 싫어해…?’

가슴이 더욱더 아파져 온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흘러넘칠 것 같다. 정말 정신이 이상해져 버렸다. 혼자 하는 망상에 이렇게까지 휘둘리다니. 하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라도 진짜 가스파르가 날… 날 싫어한다면….

아무런 근거도 이유도 없는 가정이 리오나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다. 리오나 자신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른다. 통제를 벗어난 사고와 감정이 마음대로 폭주하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하복부가 욱신거린다. 뱃속 깊은 곳에서 공허감과 우울감이 퍼져나간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리오나의 자궁과 배 위로 드러난 문양까지 모두 용의 정액, 정확히는 가스파르의 정액을 받아들이기만을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다. 자궁뿐만이 아니다. 그건 리오나의 몸, 그 자체의 목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리오나의 몸은 벌써 몇 달째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가스파르의 변덕이나 선배 메이드들의 장난으로 몸이 달아오른 적은 있어도, 원래의 목적은달성하지 못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감정. 리오나의 정신은 몰라도 몸은 아주 강하게 가스파르 원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직접 가스파르를 봐도 마음속 깊숙이 잠들어 있는 레온하르트의 거부감이 폭주를 막았다.

그런데 오늘은 마야 때문에 가스파르를 강하게 의식하고 말았다. 가스파르의 마음에 들까, 아닐까 고민하며 화장 같은 여성스러운 행위를 하며 하루를 보냈다. 레온하르트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리오나가 오늘 거의 가스파르를 보지 못한 것도 컸다. 평소라면 항상 가스파르 옆을 따라다니며 좋든 싫든 그의 모습을 봐야 했다. 가스파르가 성을 비울 때라도 아침과 저녁에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잃었을 때 비로소 그 소중함을 안다고, 몸은 강렬히 가스파르를 원하는데 눈으로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자 감정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끝없는 우울감과 공허함이 리오나를 덮친다.

비틀비틀. 리오나의 걸음걸이가 위태롭다. 당장이라도 넘어질 것 같다. 이 빌어먹을 성 복도는 왜 이리 긴 거야. 다른 메이드들이 수없이 리오나 옆을 지나치지만 다들 자기 일에 바빠 리오나를 신경도 쓰지 않는다.

이렇게나 가슴이 아픈데 도저히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이렇게나 슬프고 힘든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래, 나 같은 건 원래 쓸모없는 놈이었지. 항상 사람들을 실망시켰어. 그래서 다들 떠나갔지. 마지막까지 남은 핀도 지키지 못했어.

부정적인 망상은 끝을 모르고 계속 나아간다. 그때였다.

털썩.

복도 모퉁이를 돌다 누군가와 부딪혔다. 워낙 느리고 힘없이 걷고 있었기에, 부딪히면서 그대로 그 몸에 기대는 꼴이 되었다.

“응? 리오나. 아무리 바빠도 앞은 보고 다녀야지.”

가스파르다.

지금 이런 모습을 가스파르한테 보이고 싶지 않은데. 도저히 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가스파르의 목소리, 가스파르의 냄새, 가스파르의 온기가 리오나에게 스며든다. 가스파르의 존재를 느끼면 느낄수록 마음이 진정되고 우울감이 사라진다.

천천히 고개를 든다. 약간 당황한 듯한 가스파르의 얼굴이 보인다. 정말 바빴던건지 아니면 긴장이라도 한 건지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있다.

가스파르도 리오나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렇게 서로 말도 없이 잠시 마주 본다.

못 알아차리면 어쩌지. 오히려 싫어하면 어쩌지. 왜 말이 없는 거야. 설마, 진짜로.

쪽.

“앗….”

리오나의 이마에 가스파르의 입술이 닿았다.

아아.

“리오나. 정말 예뻐. 그 머리도, 그 처음 한 화장도 너무 잘 어울려.”

머리에 가스파르의 손이 닿는다. 스르르. 리오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아아아아.

리오나의 머릿속에서 별이 튄다. 아랫배에서 그윽한 쾌감이 퍼지고, 가슴은 쉴 새 없이 뛴다. 우울감이나 초조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방금까지 자신이 왜 그렇게 불안해하고 슬퍼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두려워할 것도 서러워할 것도 없다. 가스파르가 바로 눈앞에 있다.

가스파르가 딱히 사랑 고백이나 온갖 미사여구를 붙인 감언을 한 것도 아니다. 단순한 소감을 말하고 습관대로 리오나의 머리를 쓰다듬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달콤하고 행복하다니.

리오나가 가스파르를 꼬옥 안는다. 가스파르는 영문도 모른 채 그저 멋쩍게 미소짓는다.

“싫어 할 줄 알았는데 옷까지 맞춰 입고, 생전 처음 화장까지 하고. 하하. 나 보여주려고 그랬나? 그렇다면 정말 고마운데.”

분위기 좋은데 또 그런다. 리오나는 가스파르를 밀쳐내고 품에서 벗어난다. 이만하면 됐다. 가스파르 앞에서 필요 이상으로 내색할 이유도 없다.

“흥! 아니거든요~. 파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거거든요~. 착각하지 마. 바보. 변태. 베에~.”

혀를 한 번 내밀어주고 몸을 돌린다. 어이없다는 가스파르의 표정이 웃기다. 후후. 갑자기 또 기분이 좋다. 오늘 파티도 무사히 끝날 것 같다. 쓸데없는 걱정은 필요 없겠지.

리오나는 하복부가 아직도 욱신거리는 것도 모른 채, 산뜻한 발걸음으로 성 복도를 거닌다.

눈치까지도 여자가 된 걸까, 가스파르는 확실히 자신에게 푹 빠져있다. 새삼 서로를 바라보며 느꼈다. 뭐, 가스파르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따위 진짜, 완전 상관없지만.

파티의 시작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리오나는 들뜬 마음을 추스르며 다른 메이드들을 따라 정문으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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