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의 화원-13화 (13/62)

〈 13화 〉 리오나 (13)

* * *

해가 저문다.

모든 색이 오렌지빛으로 물든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나른한 저녁의 냄새가 공기 중에 맴돈다. 성 외벽의 흰 대리석들은 노을을 비추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리오나와 메이드들은 정문 앞에서 주르륵 도열하며 손님을 맞고 있다. 서로 정확하게 거리를 두고, 고개를 숙이며 정자세로 말이다.

지금까지 도열을 받기만 해온 리오나로서는 속이 치민다. 이거 꽤 힘든 일이구나…. 다 가스파르를 위한 일이다. 애써 참아 본다.

이제 파티의 시작이다. 용들이 하나둘 자신의 수행원을 태우고 가스파르의 둥지에 착지한다. 분명 주인은 용일 텐데, 날 수 있는 게 용뿐이라 종을 태우고 내려주는 모습이 조금 우습다.

약간의 섬광이 주변에 뿌려진다. 용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거기에는 훤칠한 인간 남성이 모습만이 남는다.

용들의 변신 마법도 완벽한 게 아닌 건지, 비늘이나 긴 손발톱처럼 용의 특징이 조금 남아있는 형태로 변신한 이들도 있었다. 같은 용이라 해도 가스파르와는 인상이 크게 다르다.

다들 도열한 메이드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성안으로 향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역시 짜증이 난다. 도열만큼 무의미한 행동이 또 있을까?

성안에선 가스파르와 아일라가 그들을 연회장으로 안내할 것이다. 아직 주인공은 등장하지도 않았다.

하늘 저 멀리서 수많은 용의 무리가 날아온다.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그 모습에 리오나는 다시 고개를 숙인다. 기운 태양 때문에 길고 커다란 그림자가 성과 그 주변 곳곳에 드리운다.

가장 크고 강인한 용의 붉은 발이 땅에 닿는다. 뒤이어 엄청난 수의 수행원을 실은 기구와 비행선이 착륙한다. 새겨진 황금과 보석들이 노을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난다.

다른 용들은 그것보다도 더 뒤에서 조심스럽게 땅을 밟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 큰 붉은 용은 온데간데없고 푸른 머리의 청년이 가장 앞에 서 있다.

짧고 푸른 머리. 가스파르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인간 이십 대 초반 정도일까. 비늘이나 뒤틀린 손발톱은 보이지 않는다. 의외로 키는 크지 않았다.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평범한 키다.

장식이나 꾸밈이 없는 편한 단색 옷을 위아래로 입었다. 밤색 바지와 하늘색 셔츠, 아무 특징없는 옷이다. 그저 평범한 도시 청년 같다. 인상이나 몸짓도 가볍고 시원시원하다. 그가 가스파르의 성을 조용히 바라본다.

남들과 다른 것이라면 그래, 저 태도. 눈빛만 봐도 방자함과 교만이 흘러넘친다. 그 시원시원함과 가벼움은 다른 모든 것들이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하기에 부리는 여유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어느샌가 성에서 나온 가스파르가 그 옆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성 디자인을 좀 바꿨나? 가스파르. 메이드들도 좀 는 거 같고.”

“…저번에 오신게 이천 년 전이십니다.”

“그게 벌써 그렇게 되나. 그래, 그때면…. 마야였지? 오랜만에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걸.”

“…….”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왕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리오나와 둘의 거리는 멀지 않다. 목소리가 전부 또렷하게 들린다. 마야 선배가 대체 왜….

“하, 왜 그러나. 가스파르. 난 자네의 억지라면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다네.”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서 안으로.”

“알았네, 알았어…. 그거 아나, 가스파르? 나에게 그 정도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자네뿐이야.”

가스파르가 더 깊게 고개를 숙인다. 왕은 흥이 식었다는 듯 터덜터덜 성으로 걸어간다. 그 뒤로 용과 수행원들의 대행렬이 따른다. 행렬의 끝이 성안으로 들어서자 가스파르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리오나와 다른 메이드들도 고개를 든다.

“하…. 저 시발 놈….”

가스파르는 분명히 그렇게 중얼거렸다.

메이드따위가 파티의 시종일관을 모두 지켜볼 수는 없었다. 리오나는 쉴새 없이 연회장과 주방을 오갔다. 연단에 가스파르와 왕이 교대로 선 것까지는 봤다. 그 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이 파티가 정말 뭐를 위한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은쟁반에 술과 음식을 담아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를 이리저리 떠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건지, 용들은 데려온 여자 수행원을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테이블에 둘러앉아 왁자지껄 떠들고 있다.

들려오는 건 그저 천박한 농담과 웃음소리뿐. 하녀를 어떻게 자빠트렸다느니, 어떤 플레이나 조교로 여자로 만들어 줬다느니 하는 시답잖은 내용이다. 왕도 연회장 중앙에서 데려온 여자들에게 술이나 뿌리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

리오나가 알던 잔치와는 너무나 달랐다. 모두가 고상하게 차려입고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며 가끔 공연이나 묘기를 즐기던 왕궁 행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물론 인간들의 파티에서도 여러 가지 일이 성사되고는 한다. 하지만 그건 남성이 먼저 마음에 든 여성을 몰래 불러내 연회장 뒤편에서 이루던 일이지, 이런 가볍고 천박한 것이 아녔다.

용들은 끝도 없이 술을 들이켜고 음식을 집어 먹는다. 주방은 거의 전쟁터다. 미나나 아일라, 다른 메이드들까지 정말 한숨도 쉬지 않고 일에 열중하고 있다.

이런 놈들을 위해 쓰이는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 가스파르가 얼마나 신사적이었는지 새삼 깨달을 뿐이다. 너무 시끄럽고 혼잡해 가스파르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어차피 하루는 끝난다. 눈 딱 감고 일에나 집중하자. 리오나는 미니스커트와 앞치마의 프릴을 화려하게 휘날리며 잽싸게 몸을 움직였다. 쓰러진 술잔을 치우고 바닥을 닦았다. 새로운 요리와 술을 부지런히 나른다.

작고 가냘픈 리오나의 몸이 크고 건장한 용들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나간다. 굳은 표정과 빠른 몸놀림이 오히려 건강하고 사랑스럽다.

리오나가 몸을 기울여 테이블 중앙에 묻은 얼룩을 지우고 있을 때였다.

만지작만지작.

거칠고 큰 손이 리오나의 엉덩이를 더듬었다. 깜짝 놀란 리오나는 고양이처럼 온몸의 털을 바짝 세우고 몸을 일으킨다. 뒤돌아서서 도대체 무슨 짓거리냐며 따져 물으려는 순간.

“으읍, 읍!”

나머지 한 손이 리오나의 입을 틀어막는다. 단단하고 다부진 몸이 리오나의 등과 밀착한다. 그대로 몸이 테이블로 밀려난다. 엉덩이를 만지던 손은 멈추지 않는다.

둔부의 매끄러운 곡선을 따라 손가락을 천천히 기더니, 그 모양좋고 민감한 엉덩이에 손바닥을 착 밀착시키고 쓰다듬어 댄다. 그렇게 잠시 그 탄력을 즐기고는 세게 움켜쥐고 비틀어댄다.

“으응! 읍! 으으응!”

위험하다. 이 녀석은 주위의 눈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한창인 파티의 한 복판에서 리오나를 겁탈하고 있다. 얼큰한 술 냄새가 풍겨 온다. 명백히 정상이 아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쳐야 한다.

그런데 정상이 아닌 건 그것뿐만이 아녔다.

리오나의 몸이 점점 예민해진다. 몸 곳곳에 열이 맺힌다. 팬티 가운데가 조금씩 젖어 든다.

마음이 아무리 진정됐어도 몸의 갈증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리오나의 몸은 아직도 절절히 용의 마음과 육체를 원하고 있다. 그건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이 쓰레기 용은 능숙하게 미니스커트를 들어 올리고는 마음껏 엉덩이를 주물러댄다. 팬티 속에도 손이 들락거린다. 리오나가 젖었다는 건 이미 들킨 거나 마찬가지다.

엄청난 수치와 흥분이 리오나의 더욱더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선배 메이드들에게 당했던 수치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용의 냄새, 용의 힘센 팔과 아무 거리낌 없는 태도. 그 모든 것들이 리오나의 뇌와 자궁을 자극하고 갈증을 풀어준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이런 쓰레기에게 치욕을 받으며 성적 쾌락을 느낀다는 사실이 리오나를 더 몰아세운다. 단지 엉덩이를 주물러지고 있을 뿐인데 피학적인 망상과 온갖 더럽고 추잡스러운 단어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읍, 으? 으읍?! 츗. 츄릅. 하앗, 으읍.”

용이 뒤에서 리오나를 거칠게 끌어안는다. 리오나에 턱을 붙잡고 돌려 강제로 등 뒤에서 키스를 갈긴다. 압도적인 힘과 체격의 차이에 아무런 저항도 할 수가 없다.

그 차이를 느끼면 느낄수록 가슴은 더 세차게 뛰고, 배 아래 자궁에서부터 달콤한 쾌락이 퍼진다. 이름도 모르는 용의 혀가 리오나의 입안을 헤집는다. 그저 한쪽이 다른 한쪽을 게걸스럽게 탐닉하는 키스다.

용의 체액이 리오나의 몸에 스며든다. 용의 문장과 자궁이 바라던 용의 정액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미친다. 쾌감 신호를 찍어내고 용이 기뻐할 만한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사고를 뇌에 쑤셔 넣는다.

분명 두 눈을 질끈 감았는데 눈앞에서 흰색 빛이 점멸한다. 뇌가 제대로 된 사고와 처리를 하지 못한다.

“푸핫. 하아… 하아….”

한참이 지나서야 입과 입이 떨어진다. 그 용은 이젠 리오나의 머리에 코를 박고 그 향기를 즐긴다. 천박하고 변태적인 행동에 리오나까지 이상해져 버릴 것 같다.

그래도 리오나가 잠시 해방된 입으로 도움을 구하려 하자.

“이런 파티는 처음인가, 아가씨? 봐 봐. 다들 뭘 하고 있는지.”

리오나가 주위를 둘러본다. 절망적인 광경이 펼쳐진다.

용들은 야한 농담만 하는 것에 질렸는지 이제 옆에 낀 수행원이나 메이드들의 가슴이나 엉덩이를 주무르고 있었다. 리오나를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용도 한둘이 아니었다. 시종일관을 다 보고 있었으면서 헤실헤실 웃기만 할 뿐 리오나를 도울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도망칠 방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리오나는 그제야 이 파티의 목적을 알았다. 용들은 겨우 술이나 음식을 먹으려고 모인 게 아녔다. 다른 종족이 그들에게 바쳐야 하는 건 시간이나 노력만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이 세계의 포식자이고 나머지는 그저 그 먹이일 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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