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의 화원-15화 (15/62)

〈 15화 〉 리오나 (15)

* * *

대체 왜 리오나가 연회장에 있던 거지.

달린다. 리오나의 기척도, 냄새도 찾을 수가 없다. 왕의 기척도 사라졌다. 그가 마법으로 그 자신과 리오나의 기척을 지운 건 확실하다.

“하, 제기랄.”

성 전체를 발로 뛰어다닐 수밖에 없다. 메이드들을 섣불리 동원했다가는 일이 더 커진다. 가장 마법에 뛰어난 아일라도 왕과는 비교조차 안 된다.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무엇보다 이 소란에 왕이 관련되어 있다는 걸 연회장에 알려서는 안 되었다. 그때는 단순한 헤프닝으로 끝낼 수 없게 된다.

아주 희미하게나마 둘의 기척이 느껴진다. 왕이 벌써 리오나를 납치해 성에서 도망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 대체 뭘 하려고.

판단 미스였다. 마야만 조심하면 될 거라 생각했다. 내가 레온하르트를 주웠다는 걸 왕도 당연히 알았을 텐데.

마야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연회장을 빠져나간 것부터가 잘못이었나. 투정을 부리는 마야를 간신히 다시 재우고 연회장에 돌아오자마자 리오나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소리와 냄새를 쫓아 리오나를 찾았지만 리오나와 가까웠던 왕이 한 발 더 빨랐다.

애초에 리오나가 연회장에 있으면 안 되었다. 오늘 연회장에 들어갈 수 있는 건 그것을 스스로 원한 메이드 뿐이다. 리오나에게도 자세히 알려주라고 아일라에게 그렇게 일렀거늘.

리오나가 접대용 메이드 복을 입고 화장을 한 걸 봤을 때도 그저 도열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도열이 끝나면 다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잡무나 돕고 있겠거니 했는데.

후회를 해봐야 바뀌는 건 없다. 지금은 리오나를 찾아야 한다. 달리면서 몇 번이고 탐색 마법을 시도해보지만 리오나를 찾을 수 없다. 솜씨는 몰라도 출력은 확실히 왕이 우세했다.

“아아아아! 씨발!”

달리고 또 달렸다. 그저 리오나가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다.

찌걱찌걱. 천박한 물소리가 텅 빈 복도에 울려 퍼진다. 사과같이 싱그럽고 시큼한 여자의 냄새가 주위를 채운다.

“하아앙~. 크라우스 님~.”

크라우스가 누구지? 멍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지? 모르겠다.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여기는 어디고, 눈앞의 남자는 누굴까.

“햣! 아앙~.”

기분이 좋다. 달콤한 쾌락이 쏟아진다. 가슴이 콩닥거리고, 양 볼은 덴 것처럼 뜨겁다. 몸에 힘이 풀린다. 당장이라도 넘어질 것 같다. 그래도 괜찮다. 눈앞의 남자가 나를 다정하게 안아주고 있으니까.

머릿속에 꽃밭이 펼쳐진다.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채워지는 것 같은 만족감. 부모님께서 안아주셨을 때의 안정감. 무엇보다.

가장 사랑하는 이와 사랑을 나누는 행복.

아, 그래. 이 사람은.

“사랑해. 리오나.”

“히얏! 응. 응츗, 츄. 하아아아….”

내 사랑 크라우스 님.

그 푸르고 짧은 머리카락도, 세상 모든 것을 아래로 깔아보는 눈빛도, 허물없고 당당하신 그 태도도 전부 다 멋지고 사랑스러우신 나의 왕, 나의 구원자.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신 것만으로 조금 가버리고 말았다. 크라우스 님의 말씀만으로도 온몸에 찌릿찌릿 전기가 달리고, 가슴과 자궁에서 은은한 쾌락이 퍼진다. 첫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처럼 가슴이 콩닥콩닥 멈추지 않는다.

이미 너무 행복하고 기분 좋은데, 그 행복을 더 갈구하고 싶어서 더 몸을 기대고 입술을 맞댄다. 목소리로 교태를 부리고 사랑스럽게 허리를 흔든다. 아아. 이런 리오나라도 사랑해줘요, 크라우스 님….

리오나가 쪼옥., 쪽. 뽀뽀를 조른다. 크라우스는 미소 지으며 그 아양을 받아준다. 찌걱찌걱. 한 손으로는 매달려오는 리오나의 몸을 지탱하고 남은 한 손으로는 리오나의 음부를 자극한다.

리오나에게 강력한 세뇌마법을 걸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한때 남자였다는 것도 잊고 새로운 기억과 조작된 감정에 사로잡혀있다.

참혹한 전쟁에 휘말려 부모를 여의고, 온갖 끔찍한 고문과 착취에 시달리던 시골 소녀 리오나는 용들의 왕이자 백마 탄 초인 크라우스 님을 만나 구원받았다.

는 설정이다.

세세한 설정 따위 정하지 않았다. 마법의 출력만 세면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신기해서, 사람을 맹목적으로 만들고 인지의 부조화를 일으킨다. 사소한 설정붕괴 따위는 그녀 마음속의 거대한 사랑이 저절로 메꿔줄 것이다.

노예에게 고등한 사고 따위 필요하지 않다. 주인을 사랑하고, 그 주인의 사랑을 받기만 하면 된다. 다른 잡다한 진실은 혼란만 줄 뿐이다.

그렇다면 가장 행복한 환상을 보여주는 게 도의적으로도 옳다. 그 어떤 취급을 받더라도, 그 어떤 치욕을 경험하더라도 그것마저 행복으로 느낄 수 있다면 주인과 종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닌가?

아직도 가스파르의 철학은 이해가 안 된다. 당장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리오나의 영혼은 방황하고 갈등하며 고통받고 있었다. 이 노예가 받는 고통은 모두 그 주인인 가스파르가 못난 탓이다.

지금의 리오나는 어떤가. 지고의 행복에 휩싸여 불안과 고통 따위는 모두 잊고 그저 나의 품에서 쾌락과 평안을 누리고 있다.

이게 옳다. 이게 옳게 된 용과 이종족 간의 관계다.

…그건 그렇고 정말 질이 좋은 년이다. 외형은 작고 사랑스럽고, 영혼은 순수하고 투명하다. 어울리지 않는 화장도 서툴게라도 애를 쓴 게 보여서 오히려 귀엽다.

아무리 나라도 단 한 번의 마법으로 한 인간을 완전히 세뇌하지는 못한다. 강제로 새겨넣은 기억과 암시는 곧 모래사장에 그린 그림처럼 시간이라는 바닷물에 쓸려나갈 것이다. 세뇌는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왜곡된 자아를 진짜 자신이라고 믿게 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도 이 세뇌가 풀리기 전에 좀 즐겨두는 게 좋겠지. 이걸 완전한 내 것으로 만드는 건 가스파르 몰래 왕궁으로 빼돌린 후에도 늦지 않다.

크라우스는 리오나의 입 깊숙이 혀를 집어넣었다.

크라우스의 혀가 리오나의 입안을 거칠게 유린한다. 혀가 서로 닿고 타액이 목 안으로 흘러들어 올 때마다 리오나의 뇌는 행복에 겨워 미친다. 리오나의 몸과 마음은 이미 크라우스의 지배하에 있다.

크라우스의 손길은 상냥하다. 결코 거칠게 리오나를 몰아세우지 않는다. 마치 가스파르가 그랬던 것처럼.

고장 난 리오나의 뇌는 크라우스를 조금 전까지 애타게 찾던 가스파르와 혼동하고 만다. 원래 자신이 찾던 대상이 누군지 정확히 떠올리지 못하고, 그 이미지만을 가져와 크라우스 위에 덧씌운다.

기억은 봉인 당했고, 감정은 지배당했다. 그 거칠고 폭력적인 용과 다른 신사적이고 부드러운 손길이라면 무엇이라도 좋았다. 뇌가 혼란에 빠지자 용의 문장도 시술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더 심각한 착각에 빠진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순간이 온 것처럼 기록된 모든 회로를 가동해 리오나를 행복의 절정에 이르게 한다. 크라우스의 세뇌 마법과 가스파르가 새긴 용의 문장이 공명하며 리오나를 천국으로 이끈다.

목에 걸린 초커는 분홍색을 넘어 붉은빛을 발한다. 그 보석은 지금도 순종적이고 여성스러운 사고와 감정으로 리오나를 묶고 있다.

그저 입만 맞추었을 뿐인데 리오나는 몇 번이고 절정에 달한다. 리오나의 성기를 괴롭히던 크라우스의 손이 흥건히 젖었다.

크라우스가 천천히 입을 뗀다. 입과 입 사이에 타액의 브릿지가 생긴다. 키스가 끝나도 리오나는 여전히 뜨거운 눈빛을 크라우스에게 보낸다. 크라우스는 한 가지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크라우스는 리오나의 목 뒤에 코를 박고서 사랑을 속삭였다. 리오나의 몸 어디에서나 좋은 냄새가 났다.

“사랑해. 리오나.”

“흐잇!”

단지 사랑한다고 말했을 뿐인데 달아오른 리오나의 몸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몸을 움츠러트리며 이상한 괴성을 지른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으익! 익! 끼얏! 호엑! 히익! 꺅!”

크라우스가 사랑을 말할 때마다 리오나의 몸이 튄다. 망가진 축음기처럼 몸을 들썩거리며 기이한 신음을 내뱉는다.

사랑하는 이에게서 사랑을 확인받는 것만으로도 세뇌당한 뇌는 마약을 뿜는다. 다른 아무런 자극이 없어도 작게 절정하며 몸을 떤다. 지금의 리오나는 그저 크라우스의 장난감일 뿐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런 최상품을 그냥 따먹는 것도 아까운 일이다. 최대한 써먹고 즐기고 놀아야지. 여기서 세뇌가 풀린다 해도 그냥 한 번 더 걸면 된다.

그럼 이번엔 가슴이라도….

“아앙~. 크라우스니임….아.”

갑자기 리오나의 몸이 멈춘다. 실이 끊어진 것처럼 축 늘어진다. 크라우스가 넘어지려는 리오나를 가까스로 붙잡는다. 뭐지? 너무 큰 쾌락에 뇌가 버티지 못하고 기절했나? 아니, 이건….

가스파르다. 가스파르가 강제로 세뇌 마법을 해제한 것이다. 이 성에서 그런 짓이 가능한 건 그 녀석 말곤 없다. 리오나는 그 반동으로 정신을 잃은 거고.

크라우스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짜증 나고 재수 없는 얼굴이 그를 노려보고 있다.

“그쯤 하시죠. 크라우스 님.”

왕이 얼굴을 찌푸린다. 이 상황이 더 엿 같은 건 가스파르인데도 말이다.

“뭐 하는 짓이지, 가스파르. 왕의 유희를 방해하다니.”

한 마디 한 마디가 속을 긁는다.

“그건 제껍니다. 폐하 것이 아니죠. 그 정도 분별은 있으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리오나가 크라우스의 품을 빠져나간다. 가스파르가 마법으로 리오나를 끌어들였다. 허공에 떠오른 리오나를 가스파르가 품에 안는다.

분명 정신을 잃었을 텐데도 리오나가 가스파르의 몸에 팔을 두른다. 굳었던 표정이 풀리고 희미하게 미소까지 짓는다.

“…아직도 마야를 빼앗기신 걸 마음에 두고 계신 겁니까. 아무리 폐하라시지만 남의 종을 세뇌하시다뇨.”

“지랄, 난 네 그 더러운 위선이 역겨울 뿐이야. 대체 뭘하고 싶은 거지? 소꿉놀이? 가족 놀이? 다른 종족들이 하는 연애란 걸 따라 하고 싶었나?”

이 애송이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건 크라우스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시작된 일이다. 진짜 유희가 뭔지도 모르는 놈의 헛소리는 듣고 싶지도 않다.

“그년들에게 의지 따윈 필요하지 않아! 네 노예들은 물론, 너도! 불행해질 뿐이지. 내가 언제까지 네 일탈 행위를 두고 봐야 하지? 그년들이 나중에 우리 용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거란 걸 누가 보증하나?”

“그래서 마야를 그렇게 버리셨습니까?”

마야. 그녀도 아일라와 같은 엘프다. 무려 팔천 년간을 숨어 살며 용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던 암살자이기도 하다.

선대 용왕이 죽고 아직 어린 크라우스가 왕위에 오르자 사회가 문란해지고 군의 기강도 해이해졌다. 마야는 그 시기를 틈타 거사를 일으킨 것이다.

새로운 용왕을 그가 후세도 남기기 전에 죽이면 사회에 큰 혼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안타깝게도 그 계획은 실패했다. 그의 칼날은 크라우스의 목에 닿지 못했고, 그는 그대로 붙잡히고 말았다.

마야에 흥미를 느낀 크라우스는 그를 용의 그릇으로 만들고 조교 하기 시작했다.

그의 조교 실력은 형편없었다. 그 당시 크라우스의 마력은 강했지만, 마법을 다루는 기술은 영 좋지 못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세뇌 마법과 배려심 없는 쾌락이 마야를 망가트렸다. 점점 반응이 옅어지는 장난감에 흥미를 잃은 크라우스는 마야를 버렸다.

그 마야를 주워 치료하고 돌봐준 게 바로 가스파르다. 아직도 마야는 가스파르의 메이드 중에서 가장 불안정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

“내가 버린 년 주워 먹은 게 그렇게도 자랑스럽나?”

“네. 폐하께서는 보지 못한 아름다움과 고결함이 그녀에게는 있으니까요. 세뇌를 하면 뭐가 남죠? 다 똑같은 기억, 똑같은 반응. 그게 싫어서 더 장난을 치면 칠수록 원래 그녀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남지 않죠.”

“하, 그러니까 그게 역겹다고. 너도 그년한테 별짓 다 해놨잖아.”

“폐하께서는 자기가 누구였는지도 모르는 년을 따먹는 게 즐거우십니까? 제 메이드들은 자기 누구였고 얼마나 용을 증오해왔는지 지금도 웃으며 말할 수 있죠. 기억과 자아는 흔들지 않은 채 서서히, 천천히 여자의 몸과 마음에 빠진 겁니다. 그 마법들은 그걸 도와주는 것뿐이죠.”

“그래서?”

“그녀들은 자신의 의지로 저에게 봉사하고 복종합니다. 그저 잘 만들어진 인형 같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죠. 제가 없을 때도 그녀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폐하, 행복은 그렇게 단순히 수량화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

“우리는 이 끔찍한 일을 처음 시작하면서 다른 종족들에게 최소한 행복하고 여유로운 삶을 보장하기로 했었죠. 폐하가 태어나시기도 전의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죠? 기억과 감정을 조작하고 미치게 만드는 게 행복과 여유입니까? 지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까지 말할 필요도 없겠죠.”

“…닥쳐.”

그러고는 자기도 입을 닥쳐버린다. 정말 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이다. 어차피 가스파르도 화가 나서 아무렇게나 지껄인 것뿐이다. 이해 따위 바라지도 않는다. 크라우스도 이제는 머리가 굳었을 테니 이런 일로 발톱을 들지는 않겠지.

“흥도 다 식으신 것 같은데 이제 저 망나니들을 데리고 물러나 주시죠. 아무리 기다리셔도 어차피 마야는 안 나올 겁니다.”

육 차를 뜬금없이 가스파르의 성으로 정할 때부터 알았다. 마야는 아직도 잠이나 자고 있겠지. 탐지가 되지 않도록 온갖 방해 마법을 펼쳐두고 왔다. 솜씨는 이쪽이 낫다. 시간을 들인 만큼 크라우스도 찾을 수 없을 거다.

“허, 변태 또라이 새끼.”

크라우스가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등을 보인다. 질렸다는 태도다. 그래, 나도 어차피 내 욕망 때문에 이러는 거다. 변태 또라이 새끼가 맞겠지. 왕한테 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 한번 해보면 재밌긴 하겠네.”

그런 소리를 남기고는 눈 깜짝할 새에 사라져버린다. 연회장으로 돌아간 게 아니다. 가스파르의 둥지에서 완전히 떠난 것이다.그의 마나가 사라진 걸 알면 연회장의 망나니들도 조금은 정신을 차리고 돌아갈 채비를 하겠지.

어울리지 않는 얌전한 퇴장이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정말 마야 말고는 목적이 없었나? 리오나에게 손을 댄 건

단순한 화풀이였나? 왕은 언제나 종잡을 수가 없다. 아무튼, 지금은 리오나다.

품에 안긴 리오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른다. 강력한 정신개입을 당한 직후다. 안정을 취해야 한다. 가스파르는 잠시 고민하다 자신의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