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리오나 (16)
* * *
머리가 쪼개질 것 같다.
아프다. 몸은 물론이고 마음마저 아프다. 춥다. 추운데도 땀이 흐른다. 외롭다. 외로운데도 누군가와 만나는 것조차 두렵다. 검고 텅 빈 세상.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자기 자신조차 텅 비어버렸다. 나는 누구고 어떤 삶을 살아왔지? 나에게 물어도 나는 대답이 없다.
속은 텅 비었는데 곧 터져버릴 것 같은 풍선처럼 불안함과 초조함만이 가슴 안에 쌓인다.
고통 끝에 한 사람이 서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무섭고 겁이 나 다가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고통과 그 말고 아무것도 없다. 그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에게로 나아간다.
그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고통이 누그러지고,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추위가 멎었다. 외로움도 잊었다. 새로운 나이자 원래의 내가 나에게로 돌아온다.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
그의 등 뒤에서 빛이 쏟아져 내린다. 세상에 색이 돌아온다. 내가 선명해진다. 나, 리오나. 레온하르트였던 적도 있었지만, 누가 뭐래도 지금의 나는 리오나다.
한 명의 작고 여린 소녀. 누군가의 노예이자 소유물.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거짓말만 하는….
아직도 그가 보이지 않는다. 그가 발하는 빛이 오히려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하지만 리오나는 그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 팔을 뻗어 그의 몸에 두른다. 그도 그녀를 따스하게 안아준다.
그리고 그녀와 그는….
리오나의 초커가 밝게 빛난다. 용의 문장이 인두에 닿은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른다. 이것조차 결국 마법이 꾸며낸 환상이라고, 리오나는 결코 깨닫지 못한다.
그녀가 눈을 뜨면 이 환상도 사라져버리겠지. 그저 희미한 이미지만이 남아 리오나의 마음을 잠식해 갈 것이다.
환상은 꿈이라는 이름으로 매일 밤 그녀에게 나타나 그 하루 그녀가 가장 바라고 꿈꾸었던 풍경을 보여준다.
그 환상에서 언제나 리오나 옆에 서 있는 건 가스파르다. 그녀가 사라진 이들을 그리워할 때, 외로움에 고통받던 날에, 정체성에 혼란이 온 밤에, 발정 난 몸을 주체하지 못하던 새벽에,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 오늘까지.
리오나는 언제나 그녀를 위로해주고 다정하게 안아주는 가스파르의 환상을 본다.
아침이 찾아오면 이미 늦었다. 싱그러운 새소리와 따스한 햇살이 리오나를 깨우면, 리오나의 가스파르를 향한 애틋한 마음은 마치 구워지는 빵처럼 부풀어 오른다.
외롭고 슬플 때, 기쁘고 몸이 달아오를 때, 리오나는 저절로 가스파르의 얼굴을 떠올리고 만다. 그에게 의지하고 싶고, 그의 다정한 손길과 맞닿길 원한다.
리오나는 리오나인 채, 서서히 가스파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간다.
가스파르는 그저 기다릴 뿐이다. 리오나가 스스로 그녀의 모든 것을 그의 앞에 바칠 때까지.
눈을 떴다. 약간 위화감이 든다. 여긴 내 방도 아니고 메이드 휴게실도 아니다.
과할 정도로 부드럽고 포근한 이불이다. 침대도 얼마나 푹신한지 마치 구름 위에 누운 기분이다. 온통 캄캄해서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창문에 부서진 달빛에 의지해 주위를 둘러본다. 여기는 지상보다 달이 더 가깝다.
책이 빼곡히 꽂힌 책장, 벽에 걸린 기이한 모양의 칼과 갑옷, 호화스러운 책상. 여기저기 놓인 꽃과 화분.
무엇보다 베개와 이불에 깊게 스며든 가스파르의 냄새. 여기는 가스파르의 침실이다.
침대 바로 옆에 잠든 가스파르의 모습이 보인다. 다른 가구와 어울리지 않는 투박하고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잠들어 있다. 얘는 자기 침실에서 뭐 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나도 왜 여기에. 의문을 시작으로 기억이 점점 되살아난다.
어제는 끔찍한 하루였다. 용들의 파티가 이 성에서 열린다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성의 일원으로서 가스파르와 선배 메이드들과 함께 정말 열심히 준비했는데.
“하아….”
작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우리가 준비하던 게 그런 야만적인 파티였다니. 용에게 껴안겨 교성을 지르던 여자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리오나의 피부 위를 기어 다니던 음란한 시선도. 그리고 그….
“크읏….”
저절로 몸이 움츠러든다. 양팔로 양어깨를 부여잡는다. 속이 메스껍다. 폭력적인 쾌감과 불쾌한 감촉. 아직도 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역겹다.
아무것도 몰랐던 리오나를 힘으로 강간하려던 그 용. 그 녀석의 포악한 얼굴과 굵은 팔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린다.
그 강압적인 손아귀에서 벗어나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런데 도망친 그곳에는 더 악랄하고 역겨운 용이 있었다.
아무리 세뇌로 기억을 조작당하고 감정을 지배당해도 의식은 남아 있었다. 용왕, 크라우스가 저지른 그 모든 추악한 행위를 생생히 기억한다.
거짓된 기억을 심어놓고 마치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리오나의 몸과 마음을 유린했다. 제멋대로 입술을 훔치고 음부를 만져댔다.
크라우스가 속삭이던 사랑의 말이 떠올라 속이 메스껍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의 숨결이 닿은 귀를 뜯어버리고 싶을 정도다.
무엇보다 가장 리오나를 괴롭히는 건 감정이다. 당시의 감정이 아직도 또렷하게 느껴진다.
홀로 선명하게 남았던 의식이 그때 느꼈던 두근거림과 행복, 쾌감과 만족감을 강제로 떠올리게 한다.
구토감이 치민다. 또다시 머리가 아프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 느끼지 않았을 감정. 너무나 생경하고 불쾌한 경험이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리오나가 그렇게 거짓된 감정에 고통받고 농락당하고 있을 때 나타나 준 건 바로….
“가스파르….”
중간에 의식이 끊겨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와줬다는 사실만은 명확하게 떠올릴 수 있다.
리오나가 다시 가스파르 쪽을 바라본다. 가스파르는 아직도 그 투박한 의자에 앉아 곤히 잠들어있다.
여기는 가스파르의 성, 가스파르의 방. 종은 침대에 누워있고 주인은 의자에 기대어 선잠을 자고 있다.
이 녀석은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그 녀석들처럼 리오나를 강제로 범하려면 얼마든지 범할 수 있었을 텐데. 나한테 자기 침대도 내주고 자기는 바보같이 의자에 기대서는….
리오나는 사실 용들에게 증오만큼이나 어떠한 선망이나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보다 훨씬 강하고 뛰어난 존재. 칼도 창도 들지 않고, 마법의 소양은 비교조차 되지 않으며, 지능으로도 절대 따라갈 수 없는 괴물.
무리를 이뤄 하늘을 날며, 인간이 이루어왔던 모든 것들을 쓰레기처럼 부수어 버린 이들. 레온하르트가 그들을 죽이기 위한 연구를 하면 할수록 그의 절망만 더 깊어졌다.
이곳에 오고서 그 마음은 더 커졌다. 인간에게 마법과 문자를 알려 준 것도 그들이었고,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조국 통일왕국 기헨을 세운 것도 실은 그들이었다.
그녀가 만난 사실상 유일한 용인 가스파르도 그랬다. 그는 어딘가 짜증 나고 재수 없는 녀석이었지만, 마법과 예술에 관한 높은 조예, 자기 메이드들에 대한 깊은 사랑이 느껴지는 자애롭고 현명한 용이기도 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보이는 돌과 흙으로 이루어진 용들의 둥지와 그곳에 웅장하게 들어선 건물들은 한때 그들이 세웠다던 찬란한 문명의 단편을 엿보여주었다.
자연스럽게 리오나는 용이란 가스파르처럼 지적이고 신사적이며, 체통을 신경 쓰고 으레 점잔을 떠는 고등한 생명체라고 생각했다.
비록 그들이 무자비한 침략자이기는 하지만, 가스파르가 자신에게 그랬듯, 다른 용들도 인간에게 어느 정도 자유롭고 평안한 삶을 보장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본 용들은 달랐다. 그들은 가스파르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다른 종족의 의지나 자유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는 무뢰배, 욕망에 충실하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양아치, 자신의 힘과 능력만 믿고 그것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쓰레기일 뿐이었다.
적어도 리오나가 어제 파티에서 본 용들은 모두 그랬다. 그들이 자기 소유물을 어떻게 다룰지도 뻔했다.
어제 본 인간 중에 눈에 총기가 살아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들 초점 없는 눈으로 용에게 매달려 앙앙 교성을 내지를 뿐이었다.
크라우스처럼 강제로 세뇌했거나 고문이나 쾌락 조교로 자아를 붕괴시켰겠지. 용들은 그 일에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을 거다. 그게 편하고 빠르니까, 뒤탈 없고 안전하니까.
어쩌면 그러는 편이 서로가 가장 행복할 거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전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역겨운 이유다.
가스파르에게 따져 물어야 했다.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다른 이들도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는 게 그런 의미였냐고, 정말로 핀이 잘 지내고 있는 게 맞냐고. 내 부모님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고.
애초에 리오나가 연회장에서 위험한 일을 당한 건 가스파르의 책임이 컸다. 어제 가스파르는 마야와 크라우스에게 정신이 팔려 리오나를 신경 쓰지 못했다.
하지만 리오나의 머리는 결코 가스파르를 의심할 수 없다. 가스파르가 말을 꾸며 그녀를 속였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한다. 하물며 가스파르가 그녀를 소홀히 대했다고는 꿈에도 떠올리지 못한다.
사고의 회로가 그쪽으로는 전혀 뻗어 나가지 않는다. 리오나의 마음은 이미 대부분 가스파르에게 잠식당했다. 그녀는 오히려 전혀 엉뚱한 의문을 떠올린다.
‘가스파르는 얼마나 날 사랑하면….”
그것도 그랬다. 가스파르도 마음만 먹으면 리오나를 원하는 대로 구워삶을 수 있었다. 그 용처럼 힘으로 리오나를 강간할 수도 있었고, 크라우스처럼 세뇌로 기억과 감정을 지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스파르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메이드라는 이름의 새 보금자리를 주었다. 새로운 인간관계도 주었다. 일 년 동안 무너지고 피폐해진 리오나의 마음에 평안을 주었다.
편안한 잠자리와 부족하지 않은 먹거리. 달콤한 쾌락과 따스한 품. 리오나가 다른 어떤 인간보다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가스파르라는 주인은 다른 주인과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녀가 본 어떤 용보다도 신사적이고 배려심이 넘친다.
오늘만 봐도 그렇다. 가스파르는 쓰러진 리오나를 걱정해 자신의 침대를 리오나에게 내주었다. 그러고는 자신은 의자에 앉아 리오나를 돌보다 지쳐 잠이 들었다.
리오나가 거부하면 키스조차 함부로 하지 않는다. 일을 잘 해내면 언제나 칭찬해주고 머리까지 쓰다듬어 준다. 이렇게 상냥하고 다정하신 주인님이 또 있을까.
리오나의 감정이 난폭하게 날뛴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다. 망상은 위험한 영역까지 가지를 뻗는다.
그녀가 받은 모든 혜택이 그전에 다른 메이드들도 받았던 것이란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가스파르를 바라보는 리오나의 눈이 점점 뜨거워진다.
가스파르에게 인간 따위 땅을 기는 개미보다도 못한 존재일 텐데. 그저 알을 낳기 위한 그릇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을 텐데. 가스파르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리오나는 돌고 돌아 한 가지 확실한 해답에 도달한다.
‘가스파르에게 나는 특별한 존재구나….”
얼굴이 뜨겁다. 가슴이 너무 콩닥거려 가스파르가 깰까 두려울 정도다. 어렴풋이 느끼던 감정이 확실해지자 형언할 수 없는 충족감과 행복이 리오나를 가득 채운다.
그리고 가슴 한편에서 검고 어두운 감정이 끓어오른다. 그것은 우월감. 평범한 인간들과 자신은 다르다는 추악한 감정.
자신은 잘나고 예뻐서 가스파르처럼 뛰어나고 자애로운 주인에게 선택받은 거다. 다른 이들은 평범하고 충분히 아름답지 못해서 그러지 못한 거고.
가스파르와 자신의 관계는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정신적이고 고등한 관계, 다른 용과 인간들의 관계는 서로를 육체적으로만 탐닉하는 천한 관계처럼 느껴진다.
아무 근거도 없는 오만과 우월감이 리오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린다.
리오나는 확실히 뒤틀려있었다. 가장 위험한 후열에서 기헨의 백성들을 보호했던 장군 레온하르트는 이젠 없다.
얕은 선민사상에 빠져 가스파르와 자신을 더 특별하고 완벽한 존재로 생각하는 노예 리오나만이 남았다.
다른 인간들의 고통이나 불행 따위 지금의 리오나의 눈에는 비치지 않는다.
모두 아주 깊은 잠재의식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리오나는 아직도 자신이 모든 인간의 행복과 해방을 바라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순수했던 영혼이 점차 더럽혀진다. 여자의 몸과 마음이 리오나를 좀먹는다.
“하아….”
리오나는 잠든 가스파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리오나에게 가스파르가 특별한 존재가 된 건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리오나의 몸이 점차 가스파르에게 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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