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리오나 (17)
* * *
가스파르의 얼굴이 가깝다.
가까운데, 점점 더 가까워지는데, 도저히 몸을 멈출 수가 없다. 마치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저절로 몸이 가스파르에게로 기운다.
눈과 입을 얌전히 다문 가스파르의 얼굴은 너무나 멋지고 사랑스럽다. 내가 이런 감정을 갖다니.
감긴 눈은 애처로운 우수에 잠겨있어 모성애를 자극한다. 각진 턱과 날카로운 인상은 무슨 일이 있어도 리오나를 보호해 줄 것처럼 미쁘다.
모순된 두 감각이 가스파르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구름이 달을 지나친 걸까, 처연한 달빛이 가스파르의 얼굴에 드리운다.
가지런한 이목구비가 달빛을 받아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녀석이 이렇게 잘생겼었나. 두근대는 가슴이 멈추지 않는다. 소리를 내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나아간다. 리오나의 얼굴이 가스파르의 얼굴과 겹쳐진다.
어쩌지? 이대로가스파르의 입을 훔쳐버릴 것 같다. 가스파르가 깨면 어쩌려고. 애초에 나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이 녀석한테 그런… 그런 마음 따위….
“아…!”
리오나의 입이 작게 벌어진다. 좋은 게 떠올랐다는 표정이다.
몇 주 전 리오나가 자신에게 회의감이 들어 울며 괴로워할 때, 그날도 가스파르는 리오나를 꼬옥 안아주며 위로해주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선물까지 주었다.
리오나는 그날 선물 받은 초커를 씻을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걸고 다녔다. 심지어 잘 때도 몸에서 떼지 않았다.
가스파르가 그렇게까지 해줬는데도, 리오나는 가스파르의 키스를 거절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과거의 자신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입술이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뭐, 아무튼.
이건 그때 못 해준 키스를 해주는 것뿐이다. 자신이 먼저 나서서 키스하는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키스를 조른 건 가스파르고 나는 별다른 감정 따위 없다. 그러니까 세이프. 아무 문제 없다.
리오나가 입술을 내민다. 그대로 가스파르의 입술로 일직선.
리오나는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그녀를 막을 건 이제 아무것도 없다. 리오나의 입술과 가스파르의 입술이 맞닿는다.
“츄, 츄릅….”
당연히 가스파르는 움직이지 않는다.
키스라기보다는 입맞춤. 입맞춤이라기보다는 뽀뽀.
리오나는 가만히 입술과 입술만을 맞댄다. 그러다 입술과 혀로 가스파르를 서툴게 애무한다.
그 달콤하고 부드러운 감촉을 즐긴다. 온몸에 화한 쾌감이 퍼진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리오나는 천천히 가스파르에게서 입술을 뗀다.
얼굴이 뜨겁다. 머리도, 아니 몸 전체가 뜨겁다. 무의식중에 열띤 한숨이 터져 나온다.
그런데도 가스파르는 무반응. 야심한 새벽에 혼자서 뭐 하는 건지.
“바보….”
리오나는 마치 그 감촉을 잃지 않겠다는 듯이 검지를 살며시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자신도, 이 현실도 다 바보 같다. 따지면 다 이 녀석 때문인데. 도저히 미워하거나 원망할 수 없다.
달도 보기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나. 달빛이 걷히고 어둠이 드리운다.
가스파르도 리오나가 만든 그림자 뒤로 숨어버렸다. 가스파르는 그저 자고 있을 뿐인데 리오나에게는 그가 비겁하게 도망치는 것처럼 보였다.
리오나는 다시 조용히 침대 위를 기어 반대편 창가로 향했다.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가스파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창문을 연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기분을 풀어준다.
낮게 우는 벌레 소리와 느린 바람에 흔들리는 잎과 풀의 소리가 들린다.
여기는 땅과는 멀고 하늘과는 가까운 곳. 구름 뒤로 숨은 달 대신 수 많은 별들이 찬연하게 빛난다.
달과 별은 다르다.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은 옅은 구름이 지나가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온하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마치 눈이 내리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시간이 멈춰도 밝게 빛나는 그 눈송이들은 순식간에 리오나의 세계를 둘러싼다. 리오나는 멍한 표정으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별에 손을 뻗는다.
지금까지 이렇게나 아름다운 밤하늘은 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 어머님께서 알려주셨던 별자리를 찾아본다.
여긴 기헨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진 곳일까. 다른 이들은 어디서 이 밤하늘을 같이 올려다보고 있을까.
내가 언제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있었나. 지금껏 이런 감상에 빠졌던 적이 없는데.
정말 마음마저 소녀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그리 나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머리가 식고 가슴이 맑아진다.
열 때와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창문을 닫았다. 내일도 바쁠 것이다. 메이드의 하루는 녹록지 않다. 이제는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리오나를 괴롭히던 고통과 불안은 이제 없다. 가스파르와 아름다운 별빛만이 그녀 곁에 있을 뿐이다.
리오나는 다시 침대 위를 긴다. 굳이 커다란 침대의 끝, 가스파르 바로 옆에 눕는다.
의자 아래로 축 늘어진 가스파르의 손을 살며시 붙잡는다. 천천히 들어 올려 침대 구석에 올려놓았다.
크고 다부진 가스파르의 손을 작고 여린 두 손으로 꼬옥 붙잡는다. 그 어떤 것보다 믿음직스럽고 안심이 된다.
이제 악몽이 리오나를 괴롭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리오나는 가스파르가 베던 베개를 베고, 가스파르가 덮었던 이불을 덮고, 가스파르의 손을 붙잡은 채로 잠에 빠져든다.
잠든 리오나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깜짝 놀랐다. 가스파르의 가슴이 세차게 뛴다. 머리가 뜨겁다. 메이드를 상대로 이런 기분이 든 건 처음이다.
사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을 때부터 가스파르의 의식은 어렴풋이 돌아와 있었다.
입술을 간질이는 부드럽고 촉촉한 감촉에 가스파르가 비몽사몽하며 눈을 뜨자, 바로 앞에 두 눈을 꼭 감고 부들부들 떠는 리오나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용이라 해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리오나의 작고 보드라운 입술이 가스파르의 입술을 애타게 애무한다. 가스파르도 가만히 눈을 감고 리오나의 입술의 감촉을 즐긴다.
분명 리오나가 잠드는 걸 확인하고 서재 소파에나 누워 잠들 생각이었다. 리오나의 아름다운 얼굴에 정신이 팔려 그대로 잠이 들었나 보다.
리오나는 지금 대체 뭘 하는 거지. 세뇌 마법이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정신적 고통과 쓰라림에 잠에서 깬 걸까.
그렇다면 지금 자신에게 키스를 하는 건 그저 슬프고 외로워서인가.
“츄, 츄릅….”
리오나를 껴안고 싶은 충동이 샘솟는다. 리오나가 먼저 가스파르를 원한 거다.이대로 덮쳐서 침대에 자빠트려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몸에 열이 오른다. 수컷의 욕망이 끓는다. 이대로….
리오나가 입술을 뗀다. 가스파르의 입술 끝에 아쉬움만이 남는다.
이제는 뭔가 타이밍이 애매하다. 이대로 일어나버리면 서로 불편하기만 할 것 같다.
“바보….”
자고 있는데 제멋대로 키스해 오더니 갑자기 또 바보란다. 가스파르는 두 눈을 감은 채 마법으로 리오나의 얼굴을 본다.
달빛을 등진 리오나의 모습은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고귀하고 청아하면서도 어딘가 덧없는….
이대로 가스파르가 일어서면 마치 연기처럼 사라질 것만 같다.
리오나가 검지를 살며시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댄다. 입술에 남은 가스파르의 감촉을 확인하는 듯한 그 자세는 요염하고 매혹적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꽃은 보지 못했다. 다른 꽃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리오나는 이미 가스파르에게 가장 특별한 존재다.
리오나가 등을 돌려 창문을 연다. 가스파르도 눈을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본다.
창을 열자 하늘을 가득 메운 별빛이 쏟아진다. 이제는 은은한 달빛 대신 맑은 별빛이 리오나를 감싼다. 리오나의 몸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매끈한 목선과 나긋나긋한 어깨, 잘록한 허리와 탐스러운 엉덩이. 리오나의 뒤태는 그저 예술품같이 아름다워 가스파르는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다.
리오나도 별빛에 취해 한참동안 밤하늘을 바라본다. 용의 둥지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지상과는 다른 각별한 운치가 있다.
쌀쌀한 새벽바람이 달아오른 가스파르의 머리를 식힌다. 당장이라도 저 작고 여린 어깨를 붙잡고 쓰러트리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리오나는 지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들고 괴로울 것이다. 세뇌 마법의 후유증은 결코 가볍게 볼 것이 아니다.
기다림이 필요하다. 서두른다고 일을 그르치진 않겠지만, 기다린다고 손해 볼 것도 없다.
용은 거의 영겁의 세월을 산다. 그들에게 시간은 가장 가치 없는 자원일지도 모른다. 가스파르도 리오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준비가 되어있다.
한껏 밤하늘을 만끽한 리오나는 조용히 창문을 닫고 잠자리에 들 채비를 한다. 가스파르도 다시 두 눈을 감고 잠든 척한다.
리오나가 가스파르의 이불을 한껏 끌어안고 침대 구석 가스파르 바로 옆에 눕는다.
그래, 오늘은 이대로 리오나의 옆을 지켜주자. 날이 밝으면 해줄 말이 많다.
리오나가 이불에서 두 손을 빼꼼 내민다. 의자 아래로 힘없이 늘어진 가스파르의 왼손을 잡더니 자신의 품으로 집어넣는다. 리오나의 고운 손과 포근한 체온이 느껴진다.
가스파르는 그대로 오른손을 뻗어 리오나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가만히 있자, 가만히 있어….
리오나는 이미 완성된 거나 다름없다. 어차피 이제는 포크와 나이프만 들면 된다.
그렇다면 내 침실 말고 더 완벽하고 근사한 무대가 있을 것이다.
살짝 눈을 떠보니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곤히 잠든 리오나의 얼굴이 보였다. 가스파르의 손을 잡은 리오나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그녀는 확실히 그를 끌어당기고 있다.
아니야. 손만 잡고 자자, 손만 잡고 자.
결국, 가스파르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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