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리오나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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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하루 종일 바빴다.
망나니들이 벌여놓은 개판을 정리하는 것만 해도 한참이 걸렸다. 테이블을 굴러다니는 빈 술병과 너절하게 널브러진 음식 찌꺼기와 그릇들.
야한 여성 속옷과 목걸이, 귀걸이 같은 액세서리까지 한 아름씩 나왔다. 정말 망나니들 그 자체다.
말이 어떻게 전해진 건지, 크라우스를 둘러싼 간신배들이 마법으로 헛소리를 해오기도 했다. 어차피 앞으로 몇백 년은 다시 볼 일 없는 녀석들이다. 깔끔하게 무시했다.
아일라와 마야에게도 주의를 주었다.
아일라는 일이 너무 바빠 리오나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 참에 마야가 리오나를 불러내자, 별생각 없이 마야에게 리오나를 떠넘겨 버렸다고한다.
마야도 경력이 쌓였고, 리오나에게 이것저것 가르치라 했던 내 말도 들었으니, 알아서 잘 돌봐줄 거라 생각했단다. 아일라도 위치와 체면이 있으니 크게 나무라지는 않았다.
마야는 리오나를 꾸미는 일에 열중하느라 그날 파티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지 못했다고 했다. 자신은 잘못이 없고, 리오나가 너무 귀여운 게 문제라며 전혀 딴소리를 했다.
뭐, 마야는 마야다. 덕분에 리오나의 새로운 모습도 봤으니 역시 크게 혼내지 않기로 했다.
마야는 그날 자기 방에서 뛰쳐나오지 않은 것만 해도 고맙다. 만약 크라우스와 마주쳤다면?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만 해도 두렵다.
이런저런 불행한 우연이 겹쳤다. 그렇다고 그저 운이 나빴다며 넘어갈 수도 없다. 바쁘다는 핑계로 리오나에게 가장 소홀했던 건 가스파르, 자기 자신이었다.
리오나가 위험한 일을 당한 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책임이다. 확실히 매듭을 지어야 한다.
바빴던 하루가 끝나간다. 둥지에 다시 어둠이 드리우고, 모두가 하루를 마무리 짓는다.
여기는 가스파르의 침실. 리오나가 가스파르의 겉옷을 벗겨준다. 그녀의 오늘 하루 마지막 일이다.
이미 몇십 번이고 반복한 일이다. 그녀는 짐짓 사무적이고 기계적인 태도로 가스파르의 옷을 벗긴다. 옷 정리가 끝나면 리오나도 돌아가 씻고서 자신의 방으로 향할 것이다.
그 전에 말을 해야 한다. 가스파르도 체면이 있다. 다른 메이드들 앞에서 리오나에게 사과를 할 수는 없었다. 지금 말고는 기회가 없다.
“리오나. 할 말이 있네.”
“……?”
리오나는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스파르를 올려다본다. 왜인지 얼굴을 붉힌다. 가스파르의 진지한 말투에 이상한 기대라도 한 걸까.
“뭔데…. 굳이 단둘이서 해야 할 중요한 얘기야?”
“미안하네. 괜히 나 때문에 싫은 경험만 하고.”
“……뭐?”
리오나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다. 가스파르는 자신의 겉옷을 벗기던 리오나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남은 한 손으로 리오나의 허리를 살짝 잡고 끌어안는다. 리오나는 거부하지 않는다.
“파티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거하고, 그 개…. 크라우스를 신경 못 쓴 것도 다 내 탓이야. 나 때문에 네가 그런….”
“아이고. 됐네요, 됐어.”
리오나가 가스파르의 볼을 살며시 꼬집는다. 능글능글한 표정을 지으며 볼을 집은 손을 살살 흔든다. 마치 손윗사람이 어린 동생을 어르거나 달래는 태도다. 하하, 이것 참.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놈의 버르장머리는 고쳐지지 않는다. 분명 순종심이나 봉사 정신도 점점 높아지고 있을 텐데. 얘는 자기애가 얼마나 강한 걸까?
“괜찮아. 어차피 다 알았어도 똑같이 연회장에 들어갔을 거야. 다들 고생하는데 나만 빠질 수는 없잖아?”
“그러면 다른 일이라도 얼마든지….”
“괜찮다니까. 그 용왕이라는 놈도 그래. 그 녀석이 개새끼인 거지 네가 사과할 거 하나 없어. 주인이라면 주인답게 굴어. 노예한테 사과나 하고말야.”
…뭔가 이상하다. 지금 리오나는 자신을 노예라고 칭하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어 보인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단둘이 되면 억지로 일한다는 티를 뿜뿜 냈는데.
“그리고…. 마지막에는 네가 와주었으니까…. 난 그거면 됐어.”
귀여운 말을 한다. 리오나가 다시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수줍은 표정을 짓는다. 한동안 가스파르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민망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린다.
일부러 이런 여우짓을 하는 걸까. 아니, 분명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다. 이미 리오나의 몸과 마음 모두 완성에 가깝다.
리오나의 목에서 초커의 보석이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 초커를 선물해준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리오나는 그 초커를 항상 차고 다녔다. 새겨놓은 마법의 효과는 확실하다.
용의 문장도 그렇고, 초커도 그렇고, 리오나의 감정과 사고는 이미 뒤틀려버린 지 오래다. 리오나는 이제 거의 가스파르의 것이나 다름없다.
본의 아니지만 다른 용과의 접촉도 리오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 묻힌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깨웠을 것이다. 오늘 리오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리오나….”
리오나의 허리에 두른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자연스럽게 얼굴을 들이댄다.
리오나도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 모습 또한 사랑스럽다. 입술과 입술이 서로 맞닿는다.
“으응…. 츗….”
리오나의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선을 쓰다듬는다. 그대로 리오나의 몸의 곡선에 맞추어 손을 내려간다.
혀와 혀가 섞인다. 서로가 서로를 갈구하는 키스. 가스파르는 어젯밤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더 격렬하게 리오나를 탐한다.
리오나도 키스가 익숙해진 건지 능숙하게 가스파르의 혀를 받아들인다. 타액과 타액이 끈적하게 섞인다. 가스파르의 손은 어느샌가 리오나의 엉덩이에 닿았다.
그대로 그 탄력을 즐긴다. 움켜쥐면 움켜쥔 대로 손가락이 파묻히다가 적절한 반발력에 다시 밀려난다. 메이드 치마 너머로도 그 즐거운 감촉이 충분히 느껴진다.
가스파르의 손놀림을 따라 리오나가 허리를 흔든다. 리오나는 팔을 가스파르의 등 뒤로 두른다. 서로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리오나의 다리가 가스파르의 다리 사이를 침범한다. 다리와 다리가 서로 얽힌다.
리오나의 몸도 달아올랐나 보다. 다리로 느껴지는 리오나의 움직임이 어딘가 야릇하고 의미심장하다.
“츄릅. 응…. 하아….”
뜨거운 한숨이 입술과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다. 이 온기가 가스파르의 것인지 리오나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키스일 뿐인데 이미 몸과 몸을 섞은 것처럼 열이 오른다.
입술이 떨어져도 타액의 브릿지가 둘의 입술을 잇는다. 찰나가 영겁 같다. 둘은 이 잠깐의 이별도 아쉽다. 서로를 다시 탐한다.
가스파르의 손이 리오나의 등 뒤, 메이드 복의 앞치마를 묶어주는 리본으로 향한다. 서서히 리본이 풀리고 순백의 앞치마가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진다.
오늘 이럴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이미 발동이 걸린 가스파르는 멈출 줄을 모른다. 그대로 남은 리오나의 옷도….
“…미안, 가스파르. 난 아직…. 아직 안 될 것 같아.”
리오나가 갑자기 가스파르의 품에서 벗어난다. 둘렀던 팔을 풀고 가스파르의 가슴을 밀쳐낸다. 달아올랐던 방의 공기가 순식간에 식었다.
리오나가 뒷걸음질 친다. 귀까지 빨갛게 물들이고는 고개를 푹 숙여버린다. 가스파르도 놀랐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진짜. 정말. 미안해. 내가…. 그냥….”
리오나가 횡설수설한다. 가스파르의 머리도 빠르게 식는다. 대체 무슨 일이지.
“진정해, 리오나.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나는 그냥. 정말…. 정말 행복한데. 이대로 너와 함께이고 싶은데. 왜인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래. 그럴 수 있어. 내가 너무 성급했어. 내가 더 미안해 리오나.”
리오나가 세차게 고개를 젓는다. 그 모습은 어딘가 확실히 불안해 보였다.
“아냐, 그게 아냐. 그냥 지금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아서. 현실이 너무 이상하고 꿈만 같아서…. 내가 이래도 될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걸까. 갑자기 생각이 나서….”
리오나의 말은 지리멸렬하고 종잡을 데가 없었다. 하지만 가스파르도 한두 번 이런짓을 한게 아니다. 조금은 리오나의 상태가 이해가 갔다.
리오나는 지금 정말 마지막 선, 인간이자 남자로서의 마지막 선에 닿은 것이다. 그 선만 넘으면 리오나는 완전히 가스파르의 것이 될 터였다.
그만큼 조심히, 또 완벽하고 우아하게 그 선을 넘어야 한다. 역시 이 칙칙한 침실은 무대로서 맞지 않는다.
아름다운 꽃에는 그에 걸맞은 아름다운 화분이 필요하다.
그래도 그녀에게 지금 당장 위로와 체온이 필요한 건 확실해 보였다.
가스파르는 다시 리오나를 끌어안았다. 리오나는 딱히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가스파르의 품에 안겼다.
“가스파르, 미안. 난 정말 제멋대로에 바보 같은….”
“그런말 하지 않아도 돼.”
“응….”
리오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그녀의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준다.
얼마나 지났을까.
“…가스파르.”
리오나가 나지막하게 말을 걸어온다.
“응.”
“핀이 보고 싶어. 만나게 해줘.”
“그건….”
그건 곤란하다.
핀은 지금 가스파르의 손을 떠났다. 그녀는 원래 내년 학기 신입생으로 가스파르가 이사장으로 있는 ‘학교’ 에 입학할 할 예정이었다.
정원 등의 문제로 입학 시기가 꼬여버린 그녀는 약간 처치 곤란 상태에 놓여있었다.
가스파르는 리오나의 조교에 집중하기 위해 핀을 메이드로 들이는 선택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를 이미 여러 ‘교육과정’을 밟은 재학생들 사이에 끼워 넣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를 부대 내 실험실에 잠시 냉동 보관하기로 했다. 리오나의 조교가 끝나면 새 메이드로 들일까 생각하던 참인데.
오늘 들어온 보고 중에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보고도 있었다. 부대의 실험실이 공격당해 보관 중이던 실험체를 여럿 도난당했다는 보고였다.
그중에는 핀은 물론이고 오랫동안 보관해둔 엘프의 시체나 옛 마력 실험의 부산물도 있다. 모두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물건이다.
크라우스다. 뒷일 생각 없이 그런 짓을 벌일만한 건 그 녀석 말고는 없다.
의외로 순순히 물러간다 생각했는데, 역시 거한 깽판을 치고 갔다. 핀은 몰라도 다른 실험체들은 대체 왜? 그 녀석 정말 무슨 생각인 걸까.
가스파르는 핀을 도둑맞았다. 리오나와 그녀를 만나게 해 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절대 사실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 핀을 그 개새끼한테 도둑맞았다고 하면 리오나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뻔하다. 그런 표정은 보고 싶지 않다.
“…정말 미안해, 리오나. 지금은 그녀에게도 정말 중요한 시기야. 그건 그녀를 위해서라도 들어줄 수 없어. 대신….”
“대신…?”
리오나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감돈다. 가스파르의 가슴이 조여온다. 그래도 다행히 던진 미끼를 물었다.
“대신 다른 인간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면 너도 조금은 안심할 수 있겠지. 그리고 이왕 외출하는 거 같이 꽃구경에 가자. 리오나,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아.”
“그래…. 알았어….”
리오나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핀을 못 봐서 꽤 실망한 눈치다. 계속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괜찮다. 리오나에게 보여줄 아름다운 꽃과 풍경이 많다.
오늘만 날이 아니다. 그래, 이제는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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