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의 화원-19화 (19/62)

〈 19화 〉 리오나 (19)

* * *

“리오나, 정말 그 옷으로 밖에 나갈 생각인 건가?”

“왜? 어쩔 수가 없잖아.”

가스파르를 쏘아본다. 리오나는 어차피 노예일 뿐이다. 귀족 영애들이 입을 법한 아름다운 드레스 따위 없다.

오늘은 가스파르와 함께 외출하는 날. 리오나는 평소 입던 메이드 복을 입고 성을 나섰다. 가스파르는 둥지의 끝, 비행장에서 먼저 리오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오나도 항상 입던 칙칙한 메이드 복을 걸치고 나가기는 싫다. 성 밖으로 나가는 건 이곳에 오고 나서 오늘이 처음이다. 가스파르 앞에서는 아닌 척했지만 리오나도 내심 기대가 컸다.

하지만 어쩌나, 리오나가 입을 수 있는 옷이라고는 이 아무 특색 없는 메이드 복뿐이다.

‘접대용’ 메이드 복도 찾으면 나오겠지만 그건 절대로 다시 입고 싶지 않았다.

“내 옷이라고는 이런 것뿐인걸.”

“…내 생각이 짧았네. 잠깐 거기 가만히 있어 주겠나.”

“뭐? 그건 왜….”

가스파르의 손이 허공을 젓는다. 리오나가 빛으로 둘러싸인다.

부드럽고 매끈한 감촉이 리오나를 살포시 안는다.

가늘고 고운 양팔을 순백의 실크 장갑이 감싼다.

여자의 잘록한 허리와 아름다운 곡선을 강조하는 답답하고 팽팽한 속옷이 몸에 착 달라붙는 게 느껴진다. 가슴을 조이는 그 압박감이 낯설면서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크게 갑갑하지도 않고, 가스파르가 마법으로 끈을 잡아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묘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 위로 하늘하늘하고 가벼운 연분홍색 드레스가 덮인다. 그 밝은 톤이 주는 귀엽고 산뜻한 느낌이 좋았다.

끝 단마다 장식된 화려한 프릴이 한층 더 귀여운 느낌을 준다. 어린 귀족 아가씨가 정원 산책용으로 입을만한 깜찍한 드레스다.

반투명한 흰색 팬티스타킹이 발끝부터 허리까지 감싼다. 스타킹이야 메이드 복을 입을 때도 항상 신어왔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조이는 느낌이 더 강하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품위 있고 고급스러운 실크의 부드러움이 리오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리오나는 순식간에 평범한 하녀에서 아리따운 귀족 아가씨가 되었다. 온갖 여성스럽고 여린 감각이 리오나를 포근히 감싸 안는다.

“와아….”

가스파르의 옆에는 어느샌가 고풍스러운 전신 거울이 서 있다. 그가 리오나를 위해 준비한 또 하나의 선물이다.

리오나는 그 거울로 따스한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자신의 모습을 감상한다.

곱다. 자신의 모습이지만 어디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다. 팔을 벌리고 한 바퀴 크게 돌아본다.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아름다움이 거기 있었다.

리오나가 잠시 자신의 아름다움에 한눈팔려 있자.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아가씨.”

가스파르는 마치 집사라도 된 것처럼 한 손을 가슴에 공손히 얹고, 고개를 숙이며 남은 한 손을 내밀어온다.

리오나도 그 장단에 발맞춰주기로 한다. 최대한 고상하고 우아하게 그 손을 잡는다. 목소리도 최대한 신경 써서 양갓집 규수 흉내를 낸다.

“흥! 그야 당연하지. 그럼 갈까? 가스파르. 오늘은 내 발이 되어주어야겠어.”

“크흡…. 흠흠. 네, 아가씨.”

자기가 먼저 시작해 놓고 몰래 웃음을 참고 있다. 아니 이런 괘씸한 집사가 다 있나.

리오나가 그 손을 잡자 가스파르가 펑 소리를 내며 섬광을 내뿜는다.

그러자 가스파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고고하게 우뚝 선 은빛 용이 그 고귀한 모습을 드러낸다.

리오나가 가스파르의 본모습을 본 건 몇 번 되지 않는다. 볼 때마다 그 압도적인 풍채와 거룩한 분위기에 압도된다.

‘그럼, 우리 꼬마 아가씨.’

가스파르의 목소리가 리오나의 가슴속에서 울린다. 이것도 일종의 마법인가.

원리는 모르겠지만 용의 형상으로도 인간의 말을 했었던 거 같은데. 그저 방식의 차이일 뿐인가? 그리고 애초에 인간의 말이 아니라 용의 말이었지.

“어…? 어?”

갑자기 리오나가 하늘을 날았다. 아니, 하늘에 날려졌다. 두둥실 떠오른 리오나는 가스파르의 등 위로 천천히 내려 앉혀졌다.

거기에는 리오나의 몸에 딱 맞춘 아담하고 튼튼한 가죽 안장이 있었다. 편한 건 물론이고 가스파르의 뜨거운 체온이 전해져 따스했다.

맹렬한 마나와 용솟음치는 활력이 전해져 온다. 그가 일반적인 생물의 영역을 훨씬 초월한 존재라는 게 여실히 느껴진다.

“너, 너. 사람을 띄우려면 말이라도 하고…. 꺄악!”

가스파르가 그 커다랗고 우아한 날개를 하늘을 향해 활짝 편다. 그 어마어마한 질량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든다. 은색 비늘이 태양 빛과 만나 아름답게 빛난다.

‘꽉 잡아. 오늘은 바쁠 테니까.’

가스파르가 기다란 목을 살짝 돌려 한쪽 눈으로 리오나를 바라본다. 리오나의 눈과 가스파르의 세로로 갈라진 쪽빛 눈이 맞는다.

본디 생리적 혐오감을 일으켰었던 그 무시무시한 눈이 이제는 두렵지 않다. 지금은 그 눈동자에 담긴 자애와 배려를 느낄 수 있으니까.

리오나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부끄럽다. 무엇보다 이 모습의 가스파르도 정말 멋지고 믿음직스럽다.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다.

“아, 알았어. 정말.”

가스파르의 손이나 팔을 잡듯 안장 앞에 달린 손잡이를 꼬옥 잡는다. 손끝에서 가스파르의 고동이 느껴진다. 그 고동에 맞추어 리오나의 가슴도 두근대기 시작한다.

가스파르는 두어 번 더 날개를 젓더니 둥지의 끝, 절벽에 몸을 던졌다. 세찬 바람이 리오나의 뺨을 스쳤다.

끝도 없이 추락하는 것 같더니 어느샌가 상승기류를 타고 부드럽게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우와….”

가스파르의 등 위에서 바라본 하늘은 절경이었다. 용들이 띄워놓은 흙과 돌, 구름과 무지개가 리오나와 나란히 선다.

원래 리오나가 발 디디고 살던 지상은 너무나도 멀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생전 처음 보는 양식의 성과 체스판처럼 쪼개진 농지만이 어렴풋이 보일 뿐이다.

레온하르트였다면 평생 하지 못했을 경험. 모든 것이 새롭고 신비하다.

가스파르가 아닌 다른 용들의 둥지를 제대로 본 것도 처음이었다.

형형색색의 꽃에 둘러싸인 둥지, 지상으로 쏟아지는 거대한 폭포와 무지개가 아름다운 둥지, 깎인 돌과 모래만으로 이루어진 신비로운 둥지, 싱그러운 과일 내음이 풍겨오고 어린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둥지까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덩그러니 작은 섬 하나가 떠 있는 것만으로 신비롭기 그지없는데, 모두 자신의 개성 있고 고상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어릴 적 읽던 동화 속에 빠진 것만 같았다. 잊었던 꿈과 환상, 모험심이 리오나의 가슴을 채운다.

저 멀리서 다른 용들이 한가롭게 하늘을 난다. 그 느린 날갯짓에서도 형언할 수 없는 강인함이 느껴진다.

가까운 둥지와 둥지를 연결하는 줄과 거기에 달린 도르래와 하얀 상자도 보인다. 그 상자에 올라타 아찔한 창공 위를 가로지르는 한 사용인의 모습이 놀랍다.

평생을 기헨의 수도 성에서 살았던 리오나에게는 강렬하고 짜릿한 경험이었다. 가스파르의 둥지에서 올려다본 하늘과도 크게 달랐다.

마치 처음 소풍을 나온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가슴이 뛰고 묘한 환희가 끓어오른다. 그저 놀라고 감탄할 뿐이다.

점차 비행에 익숙해질 무렵, 리오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이제는 용들의 둥지와도 멀어졌다. 평소 눈에 익은 가스파르의 둥지만이 작게나마 보인다.

그 주변에서 가장 크고 너른 둥지. 산과 같은 암석들이 수없이 뭉쳐 거대한 성과 푸른 정원을 떠받들고 있다.

흙과 돌은 물론이고 성과 나무, 메이드들과 가구까지 순전히 가스파르의 마력만으로 이 아득한 상공위에 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가스파르는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유유히 하늘을 유영한다.

정신을 집중해 사람만 한 돌 하나 들어도 뛰어난 마법사가 되는 인간과는 천지 차이다.

리오나는 새삼 가스파르와 자신과의 힘의 차이를 실감한다. 인간의 도리로는 측량할 수도 없이 강대하고 뛰어난 존재.

설령 한 국가가 온 힘을 모아 대적한다 해도 가스파르 혼자와도 제대로 맞서 싸우지 못할 것이다.

용에게 인간이란 그저 성가신 날벌레만도 못한 존재일 것이다. 힘의 차이가 이렇게 역력한데 감히 맞서 싸울 생각을 하던 자신이 바보 같다.

그녀 마음속에서 가스파르가 크고 위대한 존재가 되면 될수록 그녀는 작고 여린 존재가 된다.

그건 마치 누군가의 보호와 사랑이 없으면 결코 홀로 살아가지 못할 한 송이 꽃.

언제나 왕자님의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작고 어린 꽃.

리오나의 갈증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굶주린 용의 문장은 아주 사소한 계기로도 리오나의 사고를 폭발시키고 몸을 흥분의 도가니로 이끈다. 올곧은 이성을 무너뜨리고 천박한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바로 가까이 가스파르가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헛된 상념 따위, 한때 가스파르와 싸웠던 장군으로서 부끄럽고 치욕스럽게 생각해야 하는데, 하는데….

하복부가 뜨겁다. 리오나 양 볼은 물론이고 귀까지 빨개진다.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몸과 얼굴을 가스파르에게 더 밀착한다.

어째서일까. 그런 비참하고 안타까운 생각을 하면 할수록 리오나의 마음은 기쁨과 흥분으로 미쳐버린다.

무르고 약한 것은 아무것도 짊어질 수 없다. 아무것도 지탱할 수 없다. 아무도 믿고 의지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아도 되고, 아무것도 견딜 필요가 없으며, 아무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과도 같다.

거칠고 뜨거운 한숨이 터져 나온다. 음부는 이미 흥건하게 젖었다.

다른 이들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괜한 책임감에 홀로 눈물지을 필요도 없다.

그저 자신보다 훨씬 강하고 위대한 존재, 가스파르를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된다. 아무것도 책임질 필요가 없다.

가스파르는 그녀에게 의식주는 물론이고, 새로운 관계와 행복도 주었다. 따스한 손길과 달콤한 쾌락도 빼놓을 수 없다.

쓸데없는 책임이나 떠넘기고, 일이 풀리지 않자 온갖 이유를 대며 욕지거리를 쏟아내던 인간들과는 전혀 다르다.

자세를 낮추자 가스파르의 온기와 냄새가 확 풍겨온다. 마치 가스파르의 품속 같다. 아아, 가스파르…. 가스파르….

이렇게 자애롭고 완벽한 남자가 나를 사랑하고 아껴준다니. 여자로서 이렇게 큰 행복이 또 있을까?

“하아…. 하아…. 흐읏!”

그녀는 그녀가 한때 남자였다는 것도 잊고, 욕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울퉁불퉁한 안장에 음부를 비벼대기 시작했다.

발달한 용의 감각을 생각하면 가스파르에게 안 들키려야 안 들킬 수 없는 행위였다. 하지만 리오나의 몸과 정신은 이미 타락의 끝자락에 서 있다. 망상은 멈추지 않는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가스파르는 순전히 리오나의 어리광 때문에 외출을 결심한 것이다.

핀과의 만남은 거절당했지만, 분명 리오나가 젖은 눈으로 올려다보며 애교를 부리면 가스파르는 못 이기는 척하면서 그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줄 것이다.

지금 그에게 가장 소중한 건 그녀 하나뿐이니까.

헛된 우월감과 기이한 안도감이 리오나의 가슴을 채운다.

내가 그 가스파르를…. 그 가스파르가 나를….

“흐윽…. 읏….”

추잡하고 천박한 행위는 끝나지 않는다. 가죽 안장이 벌써 푹 젖었다.

리오나는 지금 가스파르의 비늘 틈에 코를 처박고 있다. 가스파르가 날개를 저을 때마다 그 틈새로 그의 짙은 체취와 마나가 스며 나온다. 그 달콤하고도 그윽한 향내에 리오나는 더 깊이 도취한다.

리오나의 허리 놀림이 빨라진다. 작게 신음을 흘리며 헐떡인다. 입을 벌리고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하늘을 응시한다.

"흐읏! 으윽…! 흐으응…."

리오나가 빠른 절정에 달한다.얼마나 몸이 달아올라 있었는지,스스로 안장에 보지를 비비는 서툰 자극만으로 가버렸다.

하복부가 또 욱신거린다. 온몸에 힘이 풀려 그대로 가스파르의 등에 누워버린다. 가스파르의 체온, 향기, 딱딱하면서도 윤기 있는 비늘….

그의 품에 안기는 행복한 상상을 하며 리오나가 절정의 여운을 만끽하고 있을 때.

‘리오나.’

“호엑?!”

‘크흠, 흠. 거의 다 도착했네. 착지할 때가 가장 위험하니 조심하게나.’

가스파르의 낮은 목소리가 리오나를 깨운다. 놓았던 이성의 끈과 다시 이어진다.

“아, 알았어….”

리오나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손잡이를 꽉 잡는다. 이미 그 천박한 행위를 들킨 것이 확실한데도 겉으로는 시치미를 뗀다.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갈증과 욕망이 또 리오나의 몸속에 쌓여만 간다.

구름 너머로 서서히 그 ‘학교’라는 것의 형상이 드러난다. 가스파르의 둥지 못지않게 커다란 땅에 반듯하고 각진 건물이 들어 서 있다.

얌전하게 정돈된 정원과 연못, 몸을 단련하는 시설과 건물들 주위를 떠다니는 커다란 마력 구체도 보인다.

바람을 타고 여자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높고 떠들썩한, 청춘의 기쁨이 담긴 정겨운 소리.

가스파르의 말대로 여기 있는 인간들은 연회장에서 본 그 혼이 빠진 이들과는 다른 걸까.

리오나는 가슴에 작은 기대를 품고 점점 가까워지는 학교를 바라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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