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의 화원-20화 (20/62)

〈 20화 〉 리오나 (20)

* * *

가스파르는 그 학교 위를 크게 한번 돌더니, 둥지 구석에 마련된 착륙장에 천천히 발을 디뎠다.

마치 둘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뎅 하는 종소리가 둥지 전체에 울려 퍼진다. 그러자 산새소리 같던 여자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멎었다.

가구와 바닥이 부딪히고, 여럿이 복도를 달리는 우당탕 소리가 들려오다 금세 또 멎는다.

그리고 수백 명이 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정적이 둥지를 덮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리오나가 가스파르의 등 위에서 어리둥절하고 있자.

‘그럼 잠시 실례하겠네.’

가스파르의 마력이 리오나를 포근히 안았다. 리오나의 몸이 풍선처럼 허공에 두둥실 떠오른다.

가스파르가 그녀를 공주님처럼 안고 욕실까지 데려다주던 그 날의 감각이 떠오른다. 그 섬세하고 따스한 감각을 즐기다 보니, 어느샌가 발이 땅에 닿았다.

그녀가 뒤를 돌아봤을 때는 이미 아름다운 은빛 용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익숙한 가스파르의 얼굴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막 수업이 시작한 참이로군. 학생들의 수업을 방해할 수는 없으니 몰래 조용히 견학하기로 할까.”

리오나는 가스파르와 함께 학교 정문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뭐가 그렇게 신기한 건지 이곳저곳에 고개를 돌리며 학교 전경을 열심히 둘러본다.

크고 반들반들한 분홍색 구체가 마력을 내뿜으며 둥지를 공전한다. 표면에 새겨진 기묘한 모양의 마법진이 옅게 빛난다.

비슷한 걸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는다.

도시나 마을의 광장같이 큰 공터와 잘 정돈된 풀과 나무도 보인다. 사람들은 다 건물 안에 있는지,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계단 위에 대자로 누워 한가롭게 햇살을 즐기는 고양이 한 마리만이 둘을 반겨줄 뿐이었다.

리오나를 발견한 고양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그녀에게 다가온다. 흰색, 검은색, 노란색의 삼색 고양이다. 보통 삼색 고양이는 암컷이라던데.

리오나가 손을 내밀자 꼬리를 빳빳이 세우고 머리를 비벼온다. 사랑을 받고 자랐는지 야옹야옹하며 애교까지 부린다. 애초에 혼자서는 이런 곳에 올 수도 없었겠지.

그전까지 개나 고양이 같은 작은 동물들이 귀엽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레온하르트는 그런 것에 관심조차 없었다.

그런데 지금 리오나는 그 맑은 눈과 사랑스러운 애교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원래 목적도 잊은 채 쪼그려 앉아 고양이와 손장난을 친다.

작고 귀여운데 앙큼한 것이 어딘가 미나 같다. 미나는 갯과라고 생각했는데.

고양이가 그 큰 눈으로 리오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또 야옹하고 간드러진 목소리로 운다.

으으…. 어쩌지. 너무 귀엽다. 데려가서 키우자고 하면 가스파르가 싫어할까.

“리오나.”

앞서가던 가스파르가 리오나를 부른다. 그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 리오나는 아쉬운 마음에 고양이의 엉덩이를 몇 번 토닥이고서야 몸을 일으켰다.

리오나가 떠나자 고양이는 다시 발라당 누워 한가로이 앞발을 핥았다.

학교에 들어서자 쿰쿰한 나무와 종이 냄새가 났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아주 옅은 음식 냄새도 났다. 뭔가 달고 자극적인 냄새였다.

단단하고 검은 나무가 켜켜이 쌓여 기둥과 벽을 이룬다. 중앙에 크게 열린 공간이 있고 그 공간 좌우로 긴 복도가 났다.

긴 복도를 따라 네모난 창문과 문이 들어섰다. 기능과 효율을 중시한 설계다.

정문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나무계단을 오른다. 난간과 손잡이에 고급스러운 기름 마감이 되어있지만, 구석구석 홈이 파이고 손때가 탔다.

인간 이전에 엘프도, 드워프도 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던 걸까. 그렇다면 여긴 수천 년도 넘은 유적지나 다름없다. 새삼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2층에 오르자 어떤 남성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스파르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남성의 목소리는 점차 선명해졌다. 그 목소리는 복도 옆 한 방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쉿. 조용히 들여다보게.”

가스파르가 복도 벽에 손을 댄다. 그러자 갑자기 대포라도 맞은 것처럼 벽에 뻥 하고 구멍이 뚫린다. 아니, 무슨 미친 짓이야.

“어…?”

그 구멍 너머로 옹기종기 모여앉은 여자아이들과 그 앞에 선 흑발의 남성이 보인다. 다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다.

“일종의 투시 마법이네. 소리도 더 선명하게 들릴 거야. 저쪽에서는 이쪽이 안 보일 테니 안심하고.”

가스파르가 속삭인다. 진작 좀 말하지.

아무튼 리오나는 그 구멍으로 그녀들의 수업을 참관했다. 서로 같은 옷을 입은 여학생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교단에 선 남자의 말에 집중하고 있다. 모두 귀엽고 아름다운 소녀들이다.

언뜻 보이는 검은 뿔과 비늘이 그 남자가 가스파르와 같은 용이란 걸 알려준다.

그는 자신의 옆에 큰 글씨로 쓰인 양피지를 마법으로 띄워놓고 용의 역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저번 시간에 말했던 것처럼 우리 용은 마력만 뛰어났을 뿐 어떠한 문명도 세우지 못했어. 육체의 저주가 우리의 발목을 잡았지.”

그가 안경을 고쳐 쓴다. 가스파르만큼은 아니지만, 꽤 미남이다. 단정한 흑발이 차분하고 지적인 느낌을 준다.

왜인지 학생 사이에서 작은 한숨과 감탄이 터져 나온다. 교실의 분위기가 묘하다.

자세히 보니 학생들은 선생의 말보다는 그 시선과 몸짓 하나하나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이 강인한 몸은 칼과 불은 물론이고 시간과 병까지 막아줬지만, 한 가지 큰 단점이 있었지. 바로 그 크기야. 큰 몸은 사회를 이루고 문명을 이룩하기에는 너무나도 비효율적이었어.”

그렇다고 모든 학생이 잿밥에 정신 팔린 것도 아니다. 선생의 말과 앞에 걸린 양피지의 내용을 열심히 필기하는 학생도 많았다.

“당장 가게 하나 짓는다고 해도 집채만 한 문과 바위만 한 두께의 기둥이 필요했겠지. 광장에서 여럿이 모여 이야기를 하려면 인간의 도시 하나를 모두 써도 부족할 테고. 당시엔 마법도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거든.”

사실 다 선생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짓이겠지. 둔한 리오나에게도 그 의도가 빤히 보였다.

“하지만 절대적인 위치에 서지 못한 용들은 엘프의 군대나 초월적인 힘을 가진 모험가들에게 따로따로 토벌당하기 일쑤였어. 그래서 우리는 엘프의 은신, 변장 마법에 영감을 얻어 그들과 비슷한 외모와 크기를 가진 새로운 모습을….”

제법 흥미로운 주제의 수업이다. 폴리모프 마법의 발명과 용의 초기사회구성, 그리고 용과 대립한 엘프와 다른 종족들.

용이 쟁취해낸 절대적인 지위와 마법과 제도의 비약적인 발달, 오랜 시간이 지나 이에 염증을 느낀 이들이 하나둘 본래의 모습으로 무리를 이탈한 이야기까지.

용의 역사이면서도 인간의 역사와도 절대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사건들이 단 몇십 분만에 쏜살같이 지나간다.

이해도 쉽고 맥락의 핵심만을 짚는다. 양질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건 확실하다.

학생들도 연회장에 있던 이들과는 다른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각자의 일에 집중하고 있다. 펜과 양피지. 아니면 선생의 몸.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다들 자신의 의지와 의식을 가지고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해 보였다. 약간은 안심이 된다.

…그런데 이게 꼭 필요한 일이야?

리오나가 포르카의 수업에 집중하고 있다. 포르카가 괜한 소리를 해서 리오나의 환상을 깨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리오나는 한참 동안 그 지루한 수업을 듣더니.

“그, 그런데 이런 수업이 꼭 필요한 거야? 사실 너희한테 우린 그냥….”

번식을 위한 그릇일 뿐이지 않으냐? 가스파르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저 쓸데없는 시간 낭비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용들의 취향이나 사정은 참 다양해서, 노예 조교 자체를 귀찮아하거나 그럴 시간조차 없는 용도 많다.

노예 중에서 진정한 마음의 반려를 찾는 이도 있고, 쓸모를 위해 마법적 소양을 가진 노예를 찾는 이도 있다.

또, 용들만큼은 아니더라도 높은 기품과 고귀한 정신을 갖춘 노예만을 찾는 이도 있다.

자기가 가르치고 이루면 될 일을 굳이 찾아서 주문까지 한다. 뭐, 마법이나 조교 실력에도 각자의 차이가 있으니까.

그렇기에 학교가 필요한 것이다. 획일화된 품질과 가치. 그에 따른 높은 편의성과 신뢰도.

어차피 한번 그릇이 된 이들은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필요가 다해 폐기처분 될 때까지 영원을 산다. 별다른 손해도 없다.

그녀들은 여기서 수년 동안 먹을 것과 입을 것은 물론이고, 보는 것과 듣는 것, 나아가 사상과 사고까지 통제당한다. 그녀들은 알지도 못하는 새에 말이다.

학교를 떠난 이후에도 자유로운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하도록 웬만해선 용의 문장이나 세뇌 같은 극약처방은 하지 않는다. 결국 그녀들은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원하는 용에게 팔려나간다.

만약 최상의 품질을 요구하는 특별주문품이 있다면 외모부터 성격까지 까다로운 관리가 들어간다.

먹는 음식과 분홍 액체에 더 진한 마력을 담고, 여러 선생과 일대일 과외를 가진다. 대부분 그 아이도 기뻐하며 얕은 우월감에 빠진다. 보통 그런 아이가 반장이나 학생회장이 된다.

낙원이자 우리. 천국 같은 축사. 여기는 교육 시설을 빙자한 소녀공장일뿐이다.

이것도 가스파르가 하는 여러 사업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뭐가 용군단장이냐. 봉급이 높은 것도 아니고, 제대로 된 전쟁을 치른 건 벌써 수천 년 전이다.

지금 눈앞에서 멍청한 수업이나 하고 있는 포르카도 원래는 가스파르 휘하의 장군이다. 멋들어진 이름의 직책까지 있었던 거 같은데…. 뭐, 아무래도 좋다.

저 학생들이 보기에는 멀쩡한 수업을 받고 있는 것도 그녀들이 새끼 용의 기초적인 교육을 담당하는 보모로서 주문된 상품이기 때문이지, 그녀들의 미래나 의식을 위한 것이 아니다.

가스파르가 아끼는 건 그가 아름답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꽃뿐이다. 리오나와 저들이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생명 모두에게 이미 정해진 운명이 있다고 믿는다.

용의 가치관과 습성은 인간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용에게 소중한 건 자신의 둥지 안에 있는 금은보화 말고는 없다.

리오나에게 사실을 말할 수는 없다. 그녀에게 그나마 멀쩡한 수업을 보여준 것도 다 계산된 일이다.

그녀도 다른 메이드들처럼 이런 지저분한 일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생을 보내야만 한다.

그저 곱고 예쁜 것만을 보며 나와 함께 행복한 여생을 보내면 된다.

그녀는 그럴 자격이 있을 만큼 아름답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다른 이유는 필요 없다.

“리오나. 크라우스 같은 자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자네들을 엄연한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소중히 생각하는 용도 많다네. 다들 그런 망나니만 있는 게 아니야.”

리오나가 고개를 기울인다. 그런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가 사랑스럽다.

“자네들이 지금껏 살아오며 배웠던 것들은 앞으로의 삶에 그리 유용하지 않겠지. 그뿐만이 아니야. 일정한 교양과 지식을 갖추어야 사회와 가정에서 역할을 다 할 수 있지 않겠나. 전부 자네들의 미래와 필요를 생각해서 하는 일이네.”

“그래….”

리오나가 조금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정신력은 확실히 칭찬할만하다. 아직도 나를 의심할 수 있다니.

창문 틈으로 새어 나온 빛에 그녀 목에 걸린 보석이 반짝 빛났다.

다 방법이야 있다.

그런 그녀를 뒤에서 포근히 안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부드러운 촉감, 코끝을 간질이는 달콤한 냄새.

나머지 한 손은 리오나의 하복부에 슬며시 가져다 댄다.

"가, 갑자기 왜…. 으읍?!"

그대로 뒤에서 리오나의 입술을 훔쳤다. 그러면서 용의 문장에 마력을 흘려 넣는다.

"으읍, 응…."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가 잊은 기억을 일시적으로 되살려준다. 밤마다 나타나 그녀를 위로해 주던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하앗…. 하앙…."

리오나의 눈이 풀린다. 사고가 멈추고 그저 멍한 채로 허공을 바라본다. 천천히 입술을 뗀다.

그리고 그 귓가에 달콤한 거짓말을 속삭여준다.

“리오나. 사실 너도 학교에 보냈어야 했는데. 내가 널 조금이라도 일찍 보고 싶어서….”

마음에 조금 장난을 친 것뿐이다. 그녀는 지금 당한 일을 기억도 못 하겠지.

하지만 그녀가 지금 의심을 잊고 가스파르를 믿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은 채 그녀의 마음에 남을 것이다.

“후에? 으으응. 괜찮아 가스파르. 나는 지금 행복해. 하루라도 널 빨리 볼 수 있었으니까….”

마음에도 없던 소리를 해주니 귀여운 소리로 화답해 온다. 계속 머리와 하복부를 쓰다듬어 준다.

나를 믿고 따르면 얻을 수 있는 쾌락과 안도감을 충분히 학습시킨다.

리오나는 아직도 가스파르에 매달려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겠지. 그래도 일이 분만 있으면 정신을 차릴 것이다.

참 미묘하고 아슬아슬한 일이다. 굳이 이런 방법을 쓰고 싶지는 않았는데.

괜찮다. 이건 일시적인 최면에 지나지 않는다. 리오나의 정신 그 자체가 변하거나 더럽혀진 것이 아니다.

“하아….”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래도 마음 떳떳한 일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없었다.

오늘 안에 끝을 내야 한다.

곧 있으면 수업 시간이 끝난다. 이미 이곳에서의 목적은 이뤘다.

남은 용건도 없다. 리오나를 데리고 빨리 여기를 빠져나가자.

"저, 저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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