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리오나 (21)
* * *
머리가 멍하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하앗…. 하앙….”
따스한 손길과 부드러운 입술이 느껴진다. 끝없는 쾌락과 안도감이 가슴 가득 차오른다.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에 어렴풋이 가스파르가 비친다. 아, 그래. 가스파르.
익숙한 자극에 잊고 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준 그. 언제나 이렇게 나를 품에 안고 위로해준 그.
전부 다 내 착각이었다.
전부 다 그가 옳다. 그가 틀릴 리가 없다. 나는 그저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
괜한 의심이나 의문 따위 가질 필요 없다. 가스파르는 틀린 적이 없으니까.
가스파르가 관여한 인간들은 자신처럼 어느 정도 행복하고 구속 없는 삶을 보내고 있겠지. 그거면 된 거다.
성의 다른 메이드들만 봐도 당연히 알 수 있는 일을, 나는 괜히 가스파르를 귀찮게나 하고….
분명 다른 용에게 붙잡힌 이들 중에는 괴로워하며 구속받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부유하고 평화로운 통일왕국 기헨도 모든 신민을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가스파르에게 모두를 책임지라고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가스파르는 이미 그의 온당한 책임을 다한 거나 다름없다.
그에게 이보다 더한 행동이나 양심을 바라는 것도 못 할 일이다. 그는 다른 어떤 용보다도 인간과 다른 종족들을 생각해주고 있다.
다시 연회장에서 초점 없는 눈으로 쾌락을 갈구하던 여자들이 떠오른다. 새삼 조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녀들의 행복과 앞으로의 일생을 멋대로 재단하는 것도 주제넘은 일이지 않을까?
그녀들처럼 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녀들의 삶과 선택을 폄하할 이유도 없다. 그녀들은 이미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역시 그거면 된 거 아닐까?
무엇보다 패전국의 국민에게 그만한 대우면 꽤 온화한 편이다. 기헨도 그렇게 상냥하게 통일을 이룬 건 아니다.
죽임을 당한 것도 아니고, 착취와 기아에 시달리지도 않는다. 그저 쾌락을 누리며 하루하루를 즐기면 된다.
아무 문제 없다.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어 주는 가스파르의 손길이 느껴진다. 허리를 살포시 안아주는 따스한 손길도 느껴진다.
그의 손길이 닿은 곳에서 행복과 평안함이 퍼진다. 두근대는 가슴과 얼얼한 하복부에서 진한 쾌락과 만족감이 뭉근하게 피어오른다.
그래, 그는 이렇게 나만 바라보면 된다. 나는 이렇게 그만 바라보면 된다.
지금같이 가스파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사실 다 상관없는 일이다.
아까 그 고양이처럼 저절로 엉덩이가 뜬다. 가스파르의 손에 머리를 이리저리 비빈다. 나에게도 꼬리가 있다면 빳빳이 세워서 가스파르에게 마음을 더 잘 전할 수 있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가스파르를 더 끌어안고 그 넓고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허리를 밀착시키고 다리와 다리를 맞댄다. 그의 냄새와 체온이 나를 감싸 안는다. 아아…. 가스파르….
리오나는 모르지만, 그녀에게도 꼬리 비슷한 물건은 있다. 목에 걸린 보석이 밝고 맹렬한 분홍빛을 뽐낸다. 보석 안에 미리 짜여진 마법 술식이 그 시전자에게 그녀의 감정과 사고를 알린다.
한번 망가진 사고는 회복되지 않는다. 이미 뒤틀려버린 그녀의 머리는 얕은 논리와 서툰 억지으로 그녀 자신과 가스파르를 정당화한다.
레온하르트의 이타적인 마음도 썩고 문드러져, 편협하고 이기적인 리오나의 마음이 고개를 든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더욱더 가스파르에게만 몰두한다.
그녀 하복부의 용의 문장도 초커의 보석처럼 밝게 빛난다. 그녀를 탓할 수도 없다. 그녀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모두 가스파르가 원했던 대로다.
리오나가 그렇게 가스파르의 품속에서 행복에 겨워할 때.
“저, 저기!”
높고 청량한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가스파르와 리오나가 고개를 돌리자 작고 호리호리한 소녀 한 명이 거기 서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있던 거지.
“저, 그, 그러니까. 아까 창문 너머로 가스파르 님이 나는 모습이 보여서….”
리오나의 머리에서 안개가 걷힌다. 그 소녀를 찬찬히 바라본다.
그녀도 다른 학생들과 같은 옷을 입었지만, 분위기는 크게 달랐다. 단추가 풀려 깊게 파인 가슴골이 보이고, 일부러 줄인 듯한 치마 아래로 육감적인 허벅지가 드러났다.
몸매만큼이나 얼굴도 매력적이다. 크고 동그란 눈에 작고 오똑한 코. 육감적인 몸과는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얼굴이 묘한 배덕감을 준다. 붉은 립스틱이 내재한 성적매력을 더욱더 강조한다.
짙은 노란색 머리카락과 능숙한 화장. 누가 봐도 면학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아이다. 그런데 가스파르 앞에서는 마치 처음 사랑을 배운 소녀처럼 쭈뼛쭈뼛 어색한 태도로 말을 더듬는다.
“그, 그래서 가스파르 님을 보려고 몰래 수업에서 빠져나왔는데….”
“당장 자리로 돌아가게. 지금 당장.”
가스파르가 단호한 목소리로 그 소녀의 말을 잘랐다. 리오나는 영문도 모른 채 두 눈을 멀뚱거릴 뿐이다.
그 소녀는 가스파르의 일갈에 잠시 몸을 움츠러트렸지만, 그래도 용기를 짜내 목소리를 높였다.
“하, 하지만…! 거기 있으신 분은 레온하르트 님. 레온하르트 님 맞으시죠?”
“네가 어딜 감히….”
리오나를 알고 있다. 머리에서 높은 경고음이 울린다. 가슴이 조금씩 빠르게 뛴다.
그래도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앞섰다.
“괜찮아, 가스파르. 그래, 나 레온하르트 맞아.”
이번에는 리오나가 가스파르의 말을 잘랐다. 원래 수업 참관만 하려고 했는데, 직접 대화까지 나눌 수 있다면 바라던 바다. 가스파르도 마지 못해 한발 물러선다.
“레온하르트 님….”
“지금은 리오나야. 리오나라고 불러 줘.”
그 소녀는 리오나 앞에서도 쭈뼛거리며 얼굴도 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왜인지 소녀만큼이나 가스파르도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그 소녀에게 다가가 살며시 손을 잡아준다. 고개를 들이밀어 눈을 맞춘다.
“괜찮아.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지?”
“네…. 저 사실….”
조금은 진정이 되었는지 똑바로 눈을 맞추어 온다. 어떠한 결의와 다짐이 담긴 강인한 눈이다.
“저 사실 리오나 님을 따라 도망치던 병사 중 한 명이에요. 리오나 님은 기억도 못 하시겠지만….”
리오나의 손이 떨린다. 머릿속 경고음이 더욱더 크게 울린다. 좋지 않은 기억들이 마구잡이로 떠오른다.
이번에는 그 소녀가 리오나의 손을 꽉 잡아준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꽈악.
“여기 다른 아이들도 다 그래요. 모두 리오나 님을 따라 수도에서 도망쳤던 아이들이에요.”
“그, 그래서…?”
리오나의 목소리가 가늘다. 떠오르는 건 고함과 욕설. 네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모두 용의 밑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거라며 소리치던 이들의 얼굴.
모두 사실이었다. 헛된 저항으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 건 레온하르트 바로 자신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정말 미련하고 오만한 짓이었다.
자신은 군인으로서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 귀족으로서 그들을 이끌지도 못했다.번듯한 식사나 편안한 잠자리 하나 마련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날 도망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모두가 날 원망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도 나만 가스파르 옆에서 하루하루 행복하게….
이 아이도 날 원망하고 있을까. 여기 있는 모든 아이가 나를 탓하고 미워하고 있으면 어쩌지.
리오나의 마음이 흔들린다. 그녀를 둘러싼 모순과 불합리가 드러난다.
가슴이 쿵쾅거린다. 손끝에 땀이 맺힌다. 내, 내가 먼저 사과해야….
“미, 미안 난…!”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어서!”
“……어?”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놀란 리오나가 소녀와 가스파르를 번갈아 바라본다.
가스파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 소녀는 벅차오르는 감정 속에서 단어를 고르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저희가 그때 수도에서 도망쳤기 때문에 가스파르 님의 관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들었어요!”
“어, 어? 뭐, 뭐라고?”
얘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때 숲으로 도망치면서 가스파르 님이 관할하시는 구역으로 가게 되었고, 그래서 가스파르 님의 부대가 계속 저희를 쫓아온 거라고 들었어요. 그날 레온하르트 님이랑 같이 도망치지 않았다면 저희는….”
리오나가 가스파르를 다시 바라본다. 가스파르는 태연한 표정으로 시치미를 뗀다.
“가스파르 님은 물론이고 여기 선생님들도 다 너무 상냥하시고 저희 한명 한명을 모두 아껴주셔요. 다들 다른 용한테 잡혔으면 훨씬 힘들었을 거라고 했어요. 그래서 모두들 리오나 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소녀의 말은 두서도 없고 엉망진창이다. 그래도 거기에 담긴 감정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소녀가 맞잡은 두 손에 더욱더 힘을 싣는다. 리오나의 손이 다 아플 정도다.
그 손에 실린 힘에서 다 느낄 수 있었다. 이 아이가 얼마나 진심이고, 가스파르가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사실 저희가 그때 레온하르트 님한테 너무 했죠. 그때는 용들이 어떤 분들인지 알지도 못했는데…. 전부 미안하고 고마워서…. 그래서 그래서…. 꺄악?!”
리오나가 두 손을 풀고 그 소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레….리오나 님?”
“고마워. 정말 고마워….”
가슴에 남아있던 마지막 응어리가 눈처럼 사르르 녹아 사라진다. 괴롭고 슬펐던 지난 일 년간의 기억에 새로운 감정이 덧그려진다.
“나는, 나는 내가 잘못한 줄 알고 매일… 그렇게 매일…. 고맙다고 해줘서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난 평생 후회하면서 살았을 거야.”
얼마나 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었던가.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마다 가슴 한편이 불편하고 아렸었다.
다들 나를 원망하는 줄로만 알았다. 나 혼자 분에 맞지 않는 행복을 누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괜찮다고, 고맙다고 해주었다.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행복한 채로 있어도 된다고.
리오나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하지만 이제 다시는 슬퍼할 필요 따위 없다.
“리오나 님….”
소녀도 리오나를 꼭 안아준다. 둘은 그렇게 한동안 서로의 마음을 느꼈다.
“그런데 정말 저 못 알아보시겠어요?”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소녀도 숫기가 빠졌는지 생글생글 웃으며 리오나에게 말을 건네 온다.
그런데 정말 누구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 있잖아요. 용들이 내려온 날 검술 교육을 받던 신참.”
“설마 로렌츠?”
“흐흥~! 맞아요. 지금은 로라랍니다!”
그 전의 검은 머리와 얌전한 얼굴은 흔적도 없다. 소심하고 수줍음도 많이 타서 전입 첫날부터 걱정했던 녀석인데….
노랗게 물들인 머리색과 화려한 화장. 환한 미소와 통통 튀는 몸짓까지 전혀 딴판이다. 그전보다 훨씬 활기차고 매력적으로 보인다. 풀어 헤쳐진 옷 사이사이로 육감적인 몸매가 드러난다.
“깜짝 놀랐어. 이렇게 달라지다니.”
“에엥~? 설마~? 리오나 님만 할까요. 정말이지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럽게 변하셔서는….”
로라가 다가온다. 얼굴에 옅게 홍조를 띤 채.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 로라의 손이 리오나의 허리와 머리를 향한다. 어? 어?
“그만.”
어린 두 소녀 사이를 가스파르의 목소리가 가른다.
“이제 정말 수업 시간이 끝나겠어. 자네도 교실로 돌아가게, 로라. 다시는 오늘 같은 일이 없도록.”
“네, 네엣! 가스파르 님!”
로라가 몸을 크게 움츠려 트리고 긴장에 목소리를 떤다. 가스파르 앞에서는 다시 사랑에 빠진 소녀가 된다.
역시 가스파르는 이 아이들에게도 특별한 존재인 걸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갈까, 리오나. 다음은 내가 아는 좋은…. 뭐, 뭐.”
“왜~?”
리오나가 갑자기 가스파르의 왼팔을 끌어안았다. 그 크고 두꺼운 팔에 한껏 매달려 가슴을 꾸욱꾸욱 누른다.
어린아이가 제 엄마한테 그러듯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어리광까지 부린다.
“리오나, 갑자기 무슨….”
“그러니까 왜~? 내가 부끄러워~?”
“어머. 어머 어머!”
로라는 입에 손을 대며 놀라고 있다. 리오나의 가슴에 깊은 충족감과 우월감이 차오른다. 이건 내 꺼라고.
“조금 전에도 그렇고. 역시 둘은 그렇고 그런!”
“로라! 다른 학생들에게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도록! 리오나! 자네도 적당히….”
“츗.”
가스파르의 그 시끄러운 입을 입술로 막았다. 아까부터 의기양양한 그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
“어머! 어머 어머 어머!”
“읍, 으읍!”
아까까지 서로 껴안고 있었는데 남 앞이라고 당황하는 모습이 귀엽다.
가스파르는 자기가 주도권을 잡고 있다고 생각되면 한없이 여유롭게 굴지만, 조금이라도 상황이 틀어지면 이렇게 바로 귀여운 구석을 보인다.
그런 점 하나하나까지 다 사랑스럽다.
뎅~. 뎅~.
또다시 종소리가 울린다. 시끄러운 의자 소리가 들린다. 곧 복도로 학생들이 쏟아질 거다.
천천히 입술을 뗀다. 혀끝에 달콤쌉싸름한 감각이 남았다.
“하, 정말이지.”
“헤헤헤….”
흐흐흐…. 이대로 전교생 앞에서 존경받는 이사장님의 입술을 계속 훔쳐볼까.
“리오나. 꽉 잡게.”
“응?”
가스파르가 남은 한쪽 팔로 거칠게 창문을 열었다. 그대로 팔에 매달린 리오나를 둘러업고 건물 밖으로 뛰어내린다.
리오나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용의 모습을 한 가스파르가 그녀를 등에 앉히고 하늘을 날고 있었다.
"하와와~. 리오나 님, 가스파르 님. 살펴 가세요오~!"
로라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리오나도 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덕분에 다음 이사장 방문이 좀 시끄러워지겠군.’
“뭐? 그래서 내가 싫어?”
‘참나, 나도 어쩌다 이런 걸 주웠는지.’
“헤헿.”
가스파르가 크게 날개를 젓자 순식간에 학교와 멀어졌다. 로라의 체온이 아직도 남아 리오나의 가슴을 따뜻하게 데운다.
앞으로도 로라는 저렇게 활기차고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겠지. 그 전의 그녀를 생각하면 오히려 더 잘된 일처럼 느껴졌다.
가스파르가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그래, 정말 다 가스파르 덕분이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가스파르….’
리오나는 가스파르의 등 비늘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진짜 부끄럼쟁이인 건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