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리오나 (22)
* * *
가스파르는 또 한참을 날았다. 남쪽으로 향하는 건지 뺨에 닿는 공기가 점차 따스해졌다.
“가스파르.”
조금 심심해진 리오나가 입을 열었다.
“어디 가는 정도는 알려주지?”
‘흥…….’
“뭐야~. 삐지기라도 한 거야?”
‘말했잖나. 꽃을 보러 가자고.’
“그러니까 무슨 꽃을 어디서.”
꽃구경이라고 해도 잘 감이 오지 않았다. 공주님에게 손을 잡혀 억지로 정원이나 근교에 끌려간 적이 있었지만, 전혀 즐거운 기억이 아니었다.
애초에 꽃을 보며 즐긴다는 개념 자체가 낯설었다. 리오나는 평생을 칼을 휘두르며 살았다. 뭐, 사람을 제대로 베어 본 적은 없지만.
그런 고상한 취미와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멋진 정원이나 화원을 봐도 그저 들인 수고가 놀라울 뿐, 한 송이의 꽃이 아름답다고 느낀 기억은 없다.
그런데 이제 와 꽃구경이라니. 가스파르는 처음 만난 날 한 말을 아직도 가슴에 담아두고 있는 걸까.
‘다 왔네, 다 왔어.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아가씨야.’
“그래서 더 좋아하는 거 아니야?”
리오나가 배시시 웃었다. 가스파르는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용의 둥지가 보인다. 저 작은 둥지 하나 때문에 그렇게 한참을 날아온 걸까.
“우와…! 우와아!”
내려서 본 그 둥지는 지금껏 보지 못한 별세계였다.
생전 처음 보는 가지각색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주위를 가득 채운 꽃향기에 어지러울 정도다.
꽃과 나무들 사이로 네모반듯한 돌들로 짜인 길이 났다. 그 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걷다 보면 색도 모양도 서로 다른 꽃들이 곱고 무구한 말을 건네 온다.
조금 추운 기후인 기헨에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꽃들을 볼 수 없었다. 이름 모를 꽃들이 서로 다투며 제 아름다움을 뽐낸다.
바다보다 더 짙은 파란색, 불꽃보다 더 정열적인 붉은색, 금보다 더 반짝거리는 노란색.
리오나는 가스파르도 뒤로하고 총총걸음으로 꽃들을 향해 달려가 그 풍부한 향기와 고운 자태를 즐겼다.
동글동글 귀엽고 앙증맞은 꽃들이 서로 모여 마치 꽃다발처럼 피어오른 꽃.
“그건 익소라네.”
황금처럼 빛나는 다섯 장의 꽃잎을 활짝 벌린 꽃.
“알라만다야. 꽃말은 희망이라고 했던가.”
커다랗고 싱그러운 분홍 꽃 안에 또 작고 하얀 꽃을 피운 꽃.
“그 분홍 꽃은 사실 잎이고, 안의 하얀 꽃이 진짜 꽃이라네.”
리오나가 꽃의 이름과 특징을 물을 때마다 가스파르는 한 치의 망설임이나 버벅거림도 없이 척척 대답해준다.
가스파르의 방에서 본 꽃과 화분이 떠올랐다. 가스파르는 원래 꽃을 좋아했던 걸까?
그가 좋아하는 걸 더 알고 싶었다. 그가 좋아하는 걸 같이 좋아하고 싶었다.
“가스파르! 가스파르는 그런 거 다 어떻게 아는 거야?”
“여긴 꽃을 유별나게 좋아했던 옛 친우의 별장이네. 그는 안타깝게도 내 곁을 떠났지만.”
“아.”
“괜찮아. 영겁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용이라도 생명인 이상 언젠가는 죽지. 만년도 더 넘은 일이니 너무 괘념치 말게.”
“으, 응….”
시간의 개념이 너무나도 다르다. 만 년 전 일을 마치 십 년 전 일처럼 말한다.
이대로 가스파르와 함께 한다면 리오나 자신도 그와 비슷한 영겁의 시간을 살게 되겠지. 아일라나 미나처럼 말이다.
자신은 그때까지 행복할 수 있을까? 가스파르도 그때까지 날 사랑해 줄 수 있을까?
인간의 몸으로는 상상도 가지 않는 아득한 시간이다. 그 장엄한 시간 앞에 가스파르를 향한 이 마음도 닳아 스러지지 않을까.
“그래서 내가 계속 이 정원을 돌보고 있네. 그 친우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생명이란 게 참 오묘하고 그윽해서, 아무리 마법을 써도 자주 봐주고 손을 대지 않으면 금세 시들고 말더군.”
“마, 만 년 동안이나?”
“여긴 내 별장이기도 해. 혼자가 되고 싶으면 자주 오고는 했지. 다른 용은 물론이고 메이드들조차 여기를 모르니까. 그 친우와 만나면 항상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지. 이 꽃들이 시들면 그를 정말 떠나보내는 것 같아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어.”
그런 곳에 나를. 리오나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정원 구석구석에 가스파르의 손길이 닿았다고 하니 흐드러진 꽃과 나무들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또 괜한 걱정을 했다. 이렇게 가슴 따뜻한 외골수와 함께라면 천년이고 만년이고 언제나 행복할 수 있겠지.
가스파르가 앞서 걷는다. 리오나는 종종걸음으로 그를 쫓아간다.
조금 걸었을 뿐인데 조금 전과는 꽃들의 분위기와 색이 크게 다르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축축한 흙과 나무의 냄새가 가라앉았다. 해가 혼자 먼저 기운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마치 꿈이나 환상 속 세계 같다.
이제는 희고 조용한 꽃들이 리오나와 가스파르를 둘러싼다. 은은하고 고상한 향기가 곳곳에서 피어오른다.
“여러 종류의 꽃을 항상 즐기기 위해 그 친우와 내가 고안한 마법이지.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어쩌면 난잡하고 이도 저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치밀하게 짜인 조형과 잘 정돈된 풀과 가지들 덕분에 그저 아름답고 신선하게 느껴졌다.
흰 꽃잎 사이에 숨은 자주색 암술이 매혹적이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하얀 꽃잎을 크게 늘어트리며 노랗고 붉은 속살을 드러내는 꽃들도 있다.
꽃과 풀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것인지 몰랐다. 비스듬한 햇볕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꽃들이 저마다의 청아함과 아련함을 뽐낸다.
티 없이 하얀 꽃들이 리오나의 마음마저 씻겨준다. 아득한 꽃향기에 가슴이 들뜨고 머리가 어지럽다.
리오나는 드레스를 나풀거리며 여러 꽃을 느끼고 즐기느라 여념이 없다. 마치 그 어린 공주님처럼….
“리오나, 여기 아주 신기한 꽃이 있다네.”
“뭔데? 뭔데?”
리오나가 눈을 반짝이며 가스파르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본다. 거기엔 아주 작고 귀여운 흰색 꽃이 있었다.
예쁜 꽃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신기할 것은 없어 보이는데.
“잠시 기다려 보게.”
가스파르의 손끝에 마나가 모이더니 한 줌의 물방울로 변한다. 그가 그 물방울을 꽃에 가져다 대자.
“와아!”
꽃은 물이 닿자마자 그 색을 잃고 투명하게 변했다. 꽃잎 뒤로 풀과 흙이 다 비쳐 보인다. 하얗고 가는 선 같은 꽃잎 속살까지 다 보였다.
물기와 만난 꽃잎이 투명한 수정이나 다이아몬드처럼 아름답게 빛난다.
“정말 예쁘다….”
그런데 어딘가 야하다. 꽃은 원래 식물의 성기라 했던가. 확실히 아름답기는 하지만, 마치 물에 젖은 여인의 하얀 옷가지처럼 뽀얀 속살을 다 드러내는 것 같아 어딘가 부끄럽고 망측했다.
“산하엽이야. 꽃잎이 아주 작고 여려서 물이 닿으면 투명해지지. 꽃말은 친애와 행복.”
이런 야한 꽃이 그런 꽃말을 가지고 있다니. 리오나의 볼이 조금 빨갛게 달아올랐다. 괜스레 엉큼한 상상이 떠오른다.
나도 이렇게 희고 투명한 옷을 입고 가스파르 앞에서 흠뻑….
“리오나, 덥나? 얼굴이 빨간데.”
“아, 아냐! 아무것도 아냐!”
가스파르가 고개를 기울인다. 으으…. 자신이 바보 같다. 그때 관계를 거절한 건 난데….
…그런데 나는 왜 가스파르를 거부했던 거지. 이유가 기억나지 않는다. 만약 지금 당장 가스파르가 나를 원한다면 나는….
“리오나 당장 쉬게! 내가 지금 물을….”
“아냐! 진짜 괜찮아! 괜찮으니까! 괜찮다고오!”
그렇게 한참 동안 가스파르와 함께 꽃을 즐겼다.
꼬르륵.
“윽?!”
돌길을 걷다 갑자기 리오나의 배가 울었다. 가스파르도 분명 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고상한 곳에서, 분위기도 그렇게 좋았는데…. 나도 참….
그러고 보니 성을 떠나고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워낙 색다르고 의미 있는 경험만 하다 보니 배가 텅 빈 것도 몰랐다.
별안간 굉장한 공복감이 몰려온다. 때늦은 자각에 몸이 빠르게 반응한다.
“가, 가스파르~. 나 배고픈데~.”
배고픔을 참지 못한 리오나가 말을 걸자 가스파르가 미소를 지으며 돌아본다. 역시 다 들렸나.
“내가 준비한 차와 식사가 있네. 잠깐 같이 걸을까.”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리오나의 손을 잡는다. 어?
리오나의 얼굴이 화악 달아오른다. 아까는 팔을 붙잡혔다고 그렇게 당황하더니 이번엔 자기가 먼저 손을 잡는다.
리오나도 그렇다. 껴안고, 매달리고, 그, 그 소중한 부위까지 서로 만지작거렸던 사이인데 손을 맞잡고 걷는 건 또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가스파르와 손을 꼬옥 마주 잡고 아름다운 꽃길을 걷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고 섬세한 깃털이 리오나의 심장을 살살 간질인다.
언제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손. 가스파르의 방에서 잠들었을 때도 맞잡았던 손.
그 크고 거친 손에 이끌려 나아간다. 그 강인하고 단호한 감각이 리오나의 마음을 흔든다. 가슴이 또 콩닥콩닥 뛴다.
그렇게 다다른 곳에는 잔잔한 연못과 순백색의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연못에는 작은 물고기들이 뻐끔거리고, 분홍색 꽃을 활짝 피운 이름 모를 나무 하나가 그늘을 드리운다.
귀여운 프릴과 화려한 장식이 달린 테이블과 의자가 그 가운데에서 리오나와 가스파르를 기다린다.
테이블 위에는 싱싱한 과일과 아기자기한 디저트가 비눗방울 같은 동그란 막에 싸여있다. 연회장에서 본 보존 마법이다.
마치 동화 속 공주님의 티 타임을 위해 마련된 것만 같은 장소다.
가스파르의 에스코트에 따라 의자에 앉는다. 가스파르가 손으로 딱 소리를 내자 테이블 위의 비눗방울들이 펑펑 터져나간다.
디저트의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딸기가 올려진 생크림 케이크, 설탕이 잔뜩 덮인 빵과 쿠키, 검고 흰 초콜릿까지.
모두 리오나가 좋아하는 것뿐이다. 보기만 해도 그 달고 중독적인 맛이 떠오른다.
…어딘가 이상하다. 이런 양도 적고 그저 달기만 한 음식을 좋아했던 기억은 없는데. 예전의 나는 핀이랑 가던 술집에서 먹는 기름진 새끼 돼지 통구이와 떫은 술을 좋아했다.
다른 귀족들이 먹던 향신료 범벅 스테이크도 취향은 아니었다. 하물며 이런 여자아이들이나 먹는….
“자, 아앙~.”
“뭐, 뭐 하는 거야, 지그음!”
가스파르가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포크로 조금 잘라 리오나의 입 앞에 가져다 대며 아앙 소리를 낸다.
그 급작스럽고 어울리지도 않는 행동에 원래 하던 생각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얘, 얘는 진짜 뭐 하는 거람.
“왜 그러나? 내 친히 귀여운 리오나에게 케이크 한 입 주겠다는데.”
그러면서 생글생글 웃는다. 그의 가지런한 외모가 주위의 꽃을 만나 더 밝게 빛난다.
아마도 학교에서 있던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나 보다. 으으. 주도권을 빼앗기는 게 그렇게 싫나. 흥, 그렇다고 내가 뭐 못할 줄 알고.
“자, 아앙~.”
가스파르는 계속 포크를 까닥거리며 리오나를 도발한다.
“아앙~. 앙.”
될 대로 되라지. 이왕 이렇게 된 거 한껏 어리광부려주기로 한다.
맛있다. 달고 촉촉한 딸기 케이크의 풍미가 입안에 퍼진다. 부드러운 생크림과 촉촉한 빵이 리오나의 혀 위에서 사르르 녹는다. 상큼한 딸기는 덤이다.
리오나도 그 나이대의 소녀들처럼 달콤한 디저트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자, 또 아앙~.”
“아, 아앙~.”
마치 새가 모이를 받아먹듯이, 리오나는 가스파르가 주는 디저트를 넙죽넙죽 받아먹는다. 어느 디저트든 달고 맛있다. 이제는 별로 부끄럽지도 않다.
단것만 먹으면 질릴 법도 한데 물리지도 않고 계속 들어간다. 먹으면 먹을수록 맛있다. 예전에 먹었던 디저트와는 전혀 다른 단맛이 난다.
쿠키도, 초콜릿도 그랬다. 과일조차 입안에서 터져 나오는 과즙에서 비슷한 단맛이 났다.
좀 더 고급지고 응축된 단맛. 몸을 가득채우고 나를 기분 좋게 해주는 그 단맛. 그래, 내가 항상 마시던….
쪼르륵. 가스파르가 찻잔에 분홍 액체를 따른다. 그 짙고 선명한 단내에 리오나의 몸이 저절로 반응한다.
“하앙….”
가스파르가 싱긋 웃으며 그 찻잔을 리오나의 앞에 대령한다. 리오나도 주저하지 않고 그 액체를 들이켰다.
달콤쌉싸름한 마나가 입술에 닿았다. 닿는 곳부터 몸 구석구석을 기쁨과 쾌락으로 채운다.
갈증이 해소된다. 형언할 수 없는 만족감과 청량감에 가슴이 후련하다.
“후아~.”
“배는 이제 다 찼나?”
"덕분에."
덕분에 배야 찼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흐흐흐. 리오나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하하, 바보 같은 가스파르. 제 약점을 스스로 밝히다니.
분명 여기는 자기밖에 모른다고 했지.
“그런데 뭐야, 뭐야. 나중에 나랑 오려고 혼자 이렇게 다 준비해 놓은 거야? 나랑 다른 메이드들도 모르게?”
“그, 그야, 뭐…. 그러니까….”
가스파르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다. 의기양양하던 표정이 또 일그러진다.
아일라도 가스파르의 이런 표정은 모르지 않을까. 그림으로 그려 매일 아침보고 싶은 얼굴이다.
“흐응~? 그 가스파르가~? 오직 나만을 위해서~? 에헤헤~.”
혼자 주섬주섬 디저트와 테이블을 준비하는 가스파르의 모습을 상상하자 어딘가 웃기고 생소했다. 그 가스파르가 정말로 나만을 위해서….
“에헤헤헤~. 주인님~. 리오나는 정말 행복한 메이드에요~.”
“거! 좀! 그냥 넘어가 주면 덧나나? 자네도 레이디로서의 매너란 걸….”
쪽.
"고마워. 가스파르."
또 시끄러운 가스파르의 볼에 뽀뽀를 해줬다. 벌써 두 번째 기습공격인데 아무 저항을 못 한다. 얼빠진 표정으로 리오나를 바라볼 뿐이다. 헤헤, 가스파르 바보.
“자넨 정말….”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오늘 참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 가스파르의 진심도 알았고,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같이 데이트도 했다.
해가 기운다. 이렇게 즐거운 시간도 결국 끝이 있구나.
리오나가 어딘가 쓸쓸한 마음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을 때.
“리오나.”
가스파르가 진지한 말투로 말을 걸어왔다.
“이곳 말고도 보여주고 싶은 곳이 한 곳 더 있네. 같이 가 주겠나?”
“나는 가스파르가 좋다면 어디든지 좋아. 애초에 난 노예잖아? 좀 더 맘대로 해도 되는걸.”
리오나는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가스파르와 함께라면 어디라도 좋았다.
가스파르와 함께 일어섰다. 왔던 길을 같이 천천히 걸으며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로 향했다. 맞잡은 손의 감각이 이제는 낯설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