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리오나 (23)
* * *
리오나는 다시 가스파르의 등 위에 올라탔다. 가스파르가 이제는 익숙해진 하늘을 향해 날았다.
저 멀리 태양이 진다.
지금 하늘에는 리오나와 가스파르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날씨는 또 맑아서, 구름도 없고 그림자도 없다.
그저 유유히 하늘을 나는 한 마리의 용과 그 등에 올라탄 소녀 한 명이 있을 뿐이다.
리오나는 무심코 지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본 것 중 가장 고요하고 적막한 노을이 온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왜인지 홀로 지는 저 태양의 쓸쓸한 뒷모습이 뇌리에 박혀 떨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본 풍경 중 가장 길고 지겹게 가슴에 남아 나를 괴롭힐 것만 같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수많은 것을 보고 느꼈거늘. 이 텅 빈 하늘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저 태양처럼 리오나의 가슴속에서도 무언가가 지고 있다. 홀로, 천천히, 주위를 뜨겁게 태우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그녀도 알지 못한다.
리오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스파르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목적지를 향해 날아간다. 그의 등 위에 올라탄 리오나도 하릴없이 그를 따른다.
대체 왜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고, 그 어떤 그림자도 만들지 못하는 덧없고 허무한 노을이 이토록 아름다운 걸까. 도저히 그 지평선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태양은 그저 조용히 타오른다. 태양이 지기까지는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그래도 저 태양은 내일이면 다시 하늘에 뜨겠지. 하지만 이 가슴속 무언가는 오늘이 지나면 결코 다시 떠오르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의미 없는 확신이 들었다.
한 둥지가 눈에 들어온다.
꽤 크고 너른 둥지인데, 멀리서도 알 수 있을 만큼 기이하고 화려한 오색광채를 둥지 전체에서 내뿜는다.
둥지 자체가 마치 커다란 수정처럼 맑고 투명하게 빛난다. 노을이 그 수정에 황금빛을 덧칠한다.
가스파르가 여기가 목적지라는 듯이 서서히 속력을 줄였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 광채의 근원이 또렷하게 보인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광경이다. 어떻게 이런 곳이 있을 수가 있나. 리오나의 마음이 리오나가 본 것을 부정한다.
가스파르가 둥지 구석에 살며시 발을 디뎠다. 자갈들이 서로 부딪히는 바스락 소리가 났다. 언제나처럼 가스파르의 마력이 리오나를 감싸 안았다.
“이게, 이게 어떻게….”
발이 땅에 닿을 때까지도 리오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발을 땅에 딛는 것마저 두렵다.
가스파르를 바라봐도 가스파르는 묵묵부답. 그저 쓸쓸한 표정으로 리오나와 둥지를 바라보고 있다.
리오나가 어렵게 발을 땅에 디뎠다. 생경한 감각과 광경. 더 큰 충격과 놀라움이 리오나를 덮친다.
“말도 안 돼….”
눈 닿는 곳은 모두 보석. 가스파르의 둥지보다도 더 너른 둥지 전체를 온갖 종류의 보석과 금은보화가 뒤덮고 있다.
루비, 사파이어, 다이아몬드, 에메랄드와 진주, 오팔과 토파즈.
페리도트, 공작석, 산호와 비취, 수정과 백금, 호박과 오닉스.
금과 은은 물론이고 화려한 보검과 장신구, 왕관과 은잔까지. 그 광활한 둥지를 각양각색의 보석과 금은보화들이 가득 메웠다.
아니다. 이 둥지 자체가 커다란 보석이다. 이건 흙과 돌 대신 보석과 금을 띄워 만든 둥지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마치 깬자갈을 밟는 것처럼 보석이 밟힌다. 지금 발에 닿은 보석만 해도 한 농부가 평생을 일해도 벌지 못할 만큼의 가치가 있다.
그런 보석의 땅이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먼 거리까지 이어져 있다.
이건 꿈인가, 환상인가.
리오나가 쪼그려 앉아 땅을 더듬는다. 각양각색의 보석들이 리오나의 손을 따라 마치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모인다. 한 움큼 집어 들자 손 틈 사이로 빛의 알갱이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탁하고 흐린 원석 따위가 아니다. 어설프게 흉내 낸 모조품 따위도 아니다.
모두 정성스럽게 선광되고 세공된 진짜 보석이다. 그 하나하나의 보석에 담긴 수고와 정성만 생각해도 아득해질 정도의 양이다.
갑자기 돌풍이 불었다. 리오나의 치맛자락이 바람에 휘날린다. 지표면의 보석들이 땅을 굴렀다. 보석의 호수가 찰랑거린다.
저 멀리서 황금처럼 타오르는 태양이 땅과 닿았다. 한층 더 노랗고 발간빛이 둥지를 덮었다.
가지각색의 투명한 보석들이 그 노을빛을 쪼개고 또 쪼갰다. 빛과 색이 뒤섞인다. 잘게 부서진 빛이 다시 하늘로 퍼지며 오색의 무지개를 사방에 흩뿌렸다.
부서진 노을빛이 잠든 호수 위에서 넘실거린다. 작은 빛방울들이 그 파도를 타고 하늘에 흩뿌려진다.
“아아….”
그 황홀한 광경에 그저 압도된다. 리오나는 마치 선 자리에 그대로 박혀버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그 광경을 바라볼 뿐이다. 이런 정경을 볼 수 있는 곳이 또 어디 있을까.
“가스파르. 여기는 대체….”
여기는 대체 어디고, 가스파르는 왜 나를 여기로 데리고 온 걸까.
“사랑하네, 리오나.”
“뭐, 뭐?”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에 말문이 막혔다. 벅차오른 가슴이 더 세차게 뛴다.
가스파르를 뒤돌아봐도, 그는 그저 적막한 표정으로 리오나를 바라볼 뿐이다.
“기억나나, 리오나? 우리 용이 어떻게 쇠퇴하고, 다시 부흥했는지. 오랜 공동체 생활에 염증을 느낀 용들은 무리를 떠나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했지.”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이야기와 무슨 연관이 있다고.
“그때 용들은 자기 둥지에서 별의별 짓을 다 했지만, 대부분은 작고 반짝이는 것에 흥미를 느꼈지. 우리는 서로 경쟁하듯 보석과 황금을 모았어. 보석을 찾기 위해 땅과 바다를 헤집고, 절벽 틈과 동굴에 머리를 들이밀었지. 그것도 수천, 수만 년 동안이나.”
가스파르의 목소리가 무겁다. 마치 자신의 오랜 과오를 밝히는 것처럼 낮고 고독하다.
“우리는 끌어모은 보석과 황금의 양으로 서로를 비교하고 시기했지. 그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고. 모두 허영심에 빠져 소중한 시간과 노력을 낭비했어. 어떤 일이 닥쳐오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야.”
가스파르가 허공에 손을 젓는다. 그 손짓을 따라 가장 투명하고 아름다운 보석들이 땅에서 끌어 올려 진다.
“대가는 참혹했지. 가장 번영하던 종족이었던 용은 순식간에 그 생존을 위협받게 됐어.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우리들은 종의 보전을 위해 이기심을 거두고 한자리에 모여 타개책을 궁리했지.”
수많은 별 무리가 하늘을 난다. 리오나의 눈앞에서 거대한 은하수가 흐른다. 희고 고운 다이아몬드들이 가장 앞에 섰다.
“우여곡절도 많았어. 용이란 건 대게 대가리가 딱딱한 녀석들이거든. 한시가 급한 데 의견을 모아 방향도 잡지 못했지. 묵은 감정에 사로잡혀 서로가 서로를 헐뜯고 시기하던 그때, 선대 용왕 크라우스가 모두를 제압하고 그들이 두른 보석과 금 장신구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지. 이런 허영에 사로잡혀 무엇을 이룰 수 있겠냐며.”
잠든 호수 위로 별들이 총총히 빛난다. 그저 흐르던 보석들이 조금씩 오와 열을 맞추어 나란히 선다. 보석과 보석 사이를 은과 백금에서 뽑아낸 실이 지난다. 마치 보석으로 짜낸 비단 같다.
“부끄러움을 느낀 용들이 하나둘씩 보석과 금을 그 품에서 내려놓았지. 그 빛나는 것들의 무가치함을 깨달은 거야. 그렇게 버려진 것들이 모두 여기에 모였어. 영원한 보존 마법 속에 갇혀 용의 부끄러운 과거와 새로운 시작의 상징으로 남았지.”
가스파르의 표정이 아직도 어둡다. 지금도 그 과거가 부끄러운 것일까?
“그렇게 용의 사회는 힘과 마력으로 재편성되고, 선왕의 지도로 종의 위기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지. 아직 어린 용 중에는 이곳의 존재를 알면서도 헛된 사치를 부리는 자들도 있지만…. 그들도 곧 깨달을 걸세. 내가…. 내가 그랬듯이 말이야.”
크라우스의 황금마차가 떠오른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용들 중 가장 탐욕스럽고, 이기적이었던 자가 바로 나였네. 나는 세상에서 제일 큰 금고와 그 금고에 담긴 어마어마한 양의 보석들을 항상 자랑하고 다녔지. 그때까지 나는 내가 가장 위대하고 강인한 용인 줄로만 알았어. 선왕이 내 목에 걸린 금목걸이를 뜯어 눈앞에서 불태워버렸을 때 내가 느낀 충격은 실로 대단했지. 그 치욕스러움과 황망함이란…. 나는 그 죄로 이 커다란 냉장고의 책임과 부끄러운 이름을 받아들여야만 했네. 가스파르(Gaspard)…. 왕실의 재물을 지키는 자….”
“가스파르….”
기운 태양이 길고 짙은 그림자를 만든다.
가스파르는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지금의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회한과 유감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리오나를 바라본다. 지금껏 보지 못한 모습이다.
“난 그날 잃어버린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이 텅 빈 가슴을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자네들을 끌어들인 것에 지나지 않아. 보석 대신 꽃을 끌어안고 있을 뿐이지. 내가 지금껏 자네들에게 한 모든 일이 가짜 죄책감으로 지어낸 비겁한 변명일지도 모르네. 하지만.”
하늘을 날던 보석의 비단들이 리오나에게 다가온다.
하얀 보석들이 리오나의 드레스를 덮었다. 수정과 다이아몬드들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켜켜이 쌓인다.
원래 입고 있던 드레스를 장식하는 게 아니다. 보석으로 짜인 새 순백색 드레스가 리오나의 몸 위에서 완성되어간다.
밑단이 길게 늘어진다. 더 풍성하고 아름다운 드레스가 리오나의 몸을 감싼다.
머리 위로 가장 작고 고운 보석들이 모여 반투명한 면사포를 이룬다. 귀와 목에도 크고 아름다운 다이아몬드가 걸렸다.
마치 벨 웨딩드레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리오나만을 위한 웨딩드레스.
땅의 보석들이 쏟아내는 각색의 무지개들이 리오나의 순백색 드레스를 더 아름답고 돋보이게 비춘다.
리오나가 움직일 때마다 수많은 보석이 마치 진짜 천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무게가 상당할 텐데도 전혀 무겁거나 불편하지 않다.
“아아….”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여성들의 영원한 꿈. 순결과 고귀함의 상징이 리오나의 몸을 덮고 있었다.
왕족과 귀족들의 결혼식은 질리도록 봐왔다. 하지만 지금 리오나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만큼 아름답고 화려한 드레스는 없었다.
가스파르가 조금씩 다가온다. 이미 굳게 마음을 정한 듯 그전의 쓸쓸하고 고독한 표정은 없다. 리오나의 지금 모습을 보고 환희와 확신에 가득 찬 표정이다.
그처럼 멋지고 미쁜 신랑을 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아마 자신처럼 아름다운 신부도 또 없을 것이다. 가스파르의 그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사랑해, 리오나. 자네를 사랑하는 이 마음만은 진실이네.”
리오나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겁고 진한 행복이 피어오른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완벽하고 멋진 남자가 아닐 수도 있어. 훨씬 더 이기적이고 비겁한 남자일지도 모르지. 나는 너와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도 다르고, 손에 잡은 것도 너무나 많아. 그래도 이 마음만은 틀리지 않는 진실일세. 부디 내 마음을 받아주겠나."
가스파르가 붉은 장미 한 송이를 품에서 꺼내 건네온다. 시간도 멈춘 이곳에서 아직도 살아 숨 쉬는 그 꽃은 세상 무엇보다도 특별하고 가치 있어 보였다.
소녀의 꿈과 환상. 사랑하는 이와의 가장 중요한 순간.
다른 대답 따위 있을 리 없었다.
“나도! 나도 사랑해, 가스파르! 너와 함께라면 어디라도, 언제까지라도 좋아. 사랑해, 정말 사랑해. 가스파르….”
그 붉은 장미를 받아든다. 파멸적인 쾌락과 행복이 전신을 관통한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 나는 앞으로 평생을 이런 행복 속에서 살게 되겠지.
태양이 완전히 진다. 사위가 어둠에 둘러싸인다. 전혀 두렵거나 무섭지 않다. 바로 곁에 가스파르가 있으니까.
“아…. 쪽. 츄릇….”
가스파르가 말없이 다가왔다. 입을 맞춘다. 달콤한 서약의 키스. 그 두근거림과 즐거움은 평소와 같았지만 다른 것도 있었다.
“츄릅, 하앗, 베에….”
더 진하고 뜨거운 가스파르의 마나가 목구멍에 흐른다. 마음의 빗장을 풀고 가스파르라는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그와 리오나의 영혼이 서로 섞인다. 아니, 그의 영혼이 그녀의 영혼을 일방적으로 범한다. 리오나라는 존재 자체가 지워지지 않는 그의 색으로 영원히 물들어 버린다.
하복부가 타는 것처럼 뜨겁다. 용의 문장이 한 획 더 성장한다. 주인이 돌아왔다. 마법 회로로 이어진 뇌와 자궁이 서로 공명하며 가스파르가 주는 정신적 행복과 그가 짜놓은 술식이 주는 육체적 쾌락을 연결한다.
혀와 혀가 섞이고, 타액과 타액이 서로 얽힐 때마다 리오나는 가스파르가 원하는 모습으로 완성되어간다. 그녀도 그것을 느끼고 있다.
그렇기에 더 애타고 열렬하게 가스파르의 입술을 갈구한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가 원하는 여자가 되고 싶다. 그가 다루기 쉽고 편리한 여자가 되고 싶다.
“후아…. 하아…. 하아….”
가스파르가 입을 떼자 리오나의 열띤 한숨이 터져 나온다. 눈빛이 흐리고 초점이 잡히지 않는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건 오직 가스파르, 주인님뿐이다.
그저 키스만 했을 뿐인데 리오나의 가랑이 사이로 애액이 흘러넘친다. 그 천박한 즙이 깨끗하고 순수한 순백색의 보석들을 적신다. 저절로 다리가 꼬이고 허리가 들뜬다. 몸이 그를 원하고 있다.
가스파르가 천천히 손을 리오나의 어깨와 허리에 두른다. 기쁨과 성취감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다.
리오나는 선망과 경의가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나의 구원자이자 악마.
악의 마왕이자 백마 탄 왕자님.
도대체 얼마나 입을 맞대고 있었던 걸까? 별과 달이 떠오른다. 하늘은 맑고 가득 찬 달빛은 너무나 가깝다. 따스한 황금빛 대신 차가운 은빛이 둥지를 감싼다.
잠든 호수에도 달이 떴다. 각각의 보석들이 방금과는 전혀 다른 빛으로 새롭게 피어난다.
낭만적인 풍경과 사랑하는 연인.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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