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의 화원-28화 (28/62)

〈 28화 〉 리오나 (28)

* * *

“자, 아앙~.”

“아앙~.”

“…….”

“옳지~! 우리 애기. 아구, 잘한다~!”

“에헤헤….”

“…저기, 마야?”

“다음엔 수프 주세요, 수프!”

“리오나, 당신도 좀!”

달그락달그락.

“그럼. 자, 또 아앙~.”

“아앙~.”

“그러니까아아악!”

쨍그랑!

아일라가 고함을 지르며 두 주먹으로 베드 테이블을 내리쳤다. 식기와 음식물이 하늘을 난다. 마야는 또 기묘한 동작으로 그 식기들을 낚아챘다.

“그냥 임신한 것뿐인데 음식을 떠먹여 줄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쏟아진 음식물들은 바닥이나 이불에 닿기 직전에 방울방울 공중으로 떠올랐다. 마야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식기들을 베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식기 위로 방울방울 떠오른 양고기 수프, 계란과 치즈가 다시 담긴다.

마치 궁정 광대의 기행 쇼같이 신기하고 놀라운 광경이다.

“오오오….”

짝짝짝. 절로 감탄이 나오고 손뼉이 쳐진다. 과연 전 암살자. 몸놀림이 재빠른 건 물론이고 마법의 솜씨까지 탁월하다. 평소의 느긋한 분위기와 맹한 표정으로는 예상하지 못할 민첩함이다.

퍽.

“꺄아아아악!”

“꺄악! 홑몸도 아닌 애를 어떻게 때리시는 거예요~! 주인님이 아시려면 어쩌려고~!”

마야가 리오나를 감싼다. 제 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리오나의 머리를 가슴팍에 묻고 맞은 곳을 쓰다듬어 준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리오나를 둘러싼다.

“선배가 말을 하면 귓등으로라도 듣는 척을 해야죠. 괜찮아요. 때린 건 머리니까. 배의 알하고는 상관없잖아요?”

“선배님, 너무해!

아야야…. 이 폭력 메이드, 남이 상처받을 말까지 거침없이 한다. 확 가스파르한테 다 일러바쳐?

“그러니까 적당히 하라고요. 적당히. 리오나, 당신! 아무리 주인님의 아이를 회임했다지만 선배들을 계속 부려먹기만 하고! 메이드로서 일을 맡기지 않는다고 했지, 이 성의 안주인 행세를 하라고 한 적은 없어요!”

리오나와 가스파르의 이차전은 첫날밤보다 집요하고 격했다. 여자의 몸의 사용법을 깨우친 리오나와, 그런 리오나를 붙잡고 꿰뚫어 제압하는 가스파르. 결국, 그 뜨거운 정사가 끝난 건 해가 다 지고 난 후였다.

둘이 성에 돌아온 건 다음 날 새벽이 다되어서였다. 예정에 없던 주인의 늦은 귀환에 발만 동동 구르던 성의 모든 메이드가 달려 나왔다.

그런 그들을 맞이한 건 어딘가 후련한 표정의 주인과 멋쩍게 웃으며 회임 사실을 알리는 요망한 막내 메이드. 성이 뒤집어지는 건 당연했다.

가스파르는 아무 말도 없이 방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고, 꼬치꼬치 캐물어 봐도 리오나는 이리저리 말만 돌렸다.

이 성에서 신입 메이드가 주인의 씨를 받는 거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리오나의 경우는 특별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침에 비행에 나가 그 다음다음 날 새벽까지 사흘이나 주인과 단둘이 시간을 보낸 메이드는 그녀가 유일했다. 종이 주인과 함께 비행에 나가는 것만 해도 절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득 찬 용의 문장을 보면 둘이 무슨 일을 하며 그 긴 시간을 보냈을지 빤히 보였다. 부러움에 찬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나마 아일라와 미나가 배려해서 길을 터주지 않았다면, 리오나는 밤새 선배 메이드들에게 시달려야 했을 거다.

용의 알이 그릇의 체내에 존재하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릇의 성기는 주인의 삽입을 감지하자마자 난소와 노른자를 생성하고 약속된 수정을 기다린다. 설계된 성기는 기타 불필요한 생리현상으로 모체의 생활에 불편을 주지 않는다.

정자를 받은 수정란은 삼 개월 동안 모체로부터 마나와 영양소를 공급받아 껍질과 흰자를 구성한다. 그렇게 완성된 용의 알은 인간의 아이처럼 산도를 따라 모체 밖으로 배출된다.

배출된 알은 육 개월 동안 어미의 따스한 품속에서 마나와 체온을 공급받는다. 도합 구 개월이 지나면 알이 부화하고 용의 아이가 마침내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성에서 메이드가 가스파르의 씨를 받아 알을 잉태하면, 그 구 개월 동안 메이드로서의 일은 면제되고 다른 메이드들에게서 어느 정도의 편의를 받을 수 있다.

리오나는 벌써 엿새 동안이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미나나 마야 같은 선배 메이드들을 부리며 놀고먹고 있다. 소문을 들은 아일라가 리오나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본 것이 바로 그 꼴이다.

물론 아일라도 회임한 여성에게 그리 큰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했다. 이 성에 규율을 세우고 질서를 바로잡았던 건 가스파르가 아니라 아일라였다. 막 들어온 신입이 그 선을 넘는다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주인님의 알을 가지자마자 잘난 듯 구는 리오나나, 그런 리오나가 귀엽다고 응석을 다 받아주는 메이드들이나 다 똑같다. 만 년 전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으으으….”

아직도 분에 겨운지 아일라가 부르르 몸을 떤다. 지금까지의 다른 메이드들은 설령 회임을 했더라도 서열에 따라 적당히 알아서 제 앞가림을 했는데, 리오나만 대체 왜 그러냐는 투다.

아일라와 리오나 사이에는 만 년, 마야와 리오나 사이에도 이 천년이라는 경력의 차이가 있다. 아일라 입장에서는 확실히 속이 뒤집히는 일이겠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 이 성의 메이드들 사이에서나 통하는 사정이다.

리오나는 혹여 이 구 개월이 다 지난다 해도, 한낱 메이드로 돌아갈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가스파르의 옆자리. 아일라가 만 년 동안 감히 생각도 하지 못했던 그 자리뿐.

구 개월만 지나면 이 배 속의 아이는 가스파르의 적자로서 모두에게 축복받으며 그 생을 시작할 것이다. 리오나에게는 그럴 자신이 있었다.

“마야도 그래요. 리오나가 정말 당신 아이도 아니고. 진짜 당신 아들은 지금 신대륙에서 싸우고 있을 텐데.”

“그치만~. 걔랑은 서로 얼굴도 자주 못 보는 걸~. 내가 임신했을 때도 오냐오냐 잘 대해줬으면서 리오나한테만 왜 그래~?”

“그야 그때 당신 상태가…. 됐어요. 그리고 아들 얼굴이야 며칠만 지나면 바로 볼 수 있잖아요? 그때까지만 참아요. 괜히 가족관계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히잉~.”

“아일라 선배님! 제가 죄송해요. 마야 선배한테 너무 그러지 마시고….”

리오나가 아일라의 손을 붙잡고 크고 동그란 눈동자로 용서를 구한다. 아일라도 이 눈동자에만은 약했다.

“하아…. 아무튼! 구 개월만 지나면 당신도 이전처럼 평범한 메이드에요. 그때를 대비해 너무 늘어지지 말도록 하세요. 알겠죠?”

아일라는 그런 말을 남기고 리오나의 방을 떠났다. 아일라가 요즘 까탈스럽다. 연회장에서의 일 이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괜찮아요, 리오나~. 또 저러다 말 거에요~.”

그 반대로 마야하고는 꽤 친해졌다. 그전까지는 어딘가 다가서기 어려운 이미지였는데, 알고 보니 푸근하고 이것저것 신경 써주는 착한 언니였다. 이참에 궁금했던 것을 물어본다.

“마야 선배도 엘프라고 들었는데, 왜 아일라 선배님이나 다른 엘프 선배들처럼 귀가 뾰족하지 않으신 거죠?"

예전부터 궁금했었다. 마야는 아일라나 다른 엘프 메이드들 처럼 귀가 뾰족하지 않았다. 리오나가 처음 그녀를 봤을 때, 아일라와 같은 엘프라고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아, 그건….”

마야가 말끝을 흐린다. 그녀는 늘어지는 말투이긴 해도 말을 끝내지 못하는 성격은 절대 아니었다.

“…이건 그 전 주인님이신 크라우스 님께서 보기 흉하다고 자르신 거예요. 그분은 그전까지 엘프를 보신 적이 없으셔서…. 그래서 직접 가위로….”

“아.”

괜한 말을 했다. 리오나도 마야의 과거에 대해서 가스파르에게 들은 것이 있다. 좀 더 생각하고 말을 해야 했는데.

“괜찮아요. 저도 크라우스 님을 원망하지는 않아요. 다들 약하고 치기 어릴 때가 있으니까…. 이 귀가 그나마 지금 봐줄 만한 건 다 가스파르 님이 다듬어주셔서예요. 저와 가스파르 님을 이어주는 끈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슬프지 않아요.”

“마야 선배….”

이번에는 리오나가 마야를 끌어안는다. 체격 차이 때문에 꽤 우스운 꼴이었지만, 그 가는 팔에 담긴 진심은 충분히 마야에게 전해졌으리라.

“어머, 절 위로해주시는 거예요~? 에헤헤~. 귀엽기도 하지~”

마야가 그런 리오나를 다시 세게 끌어안아 준다. 마야는 어린 리오나를 마치 아이처럼 어르고 달래는 것을 좋아했다. 리오나도 그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싫지 않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리오나, 당신. 사실 말 못 할 엄청난 야욕을 가지고 있죠?”

갑작스러운 마야의 진지한 말투에 리오나의 몸이 얼어붙는다.

“네, 네? 대체 무슨….”

“전 다 알 수 있어요. 사람의 아주 작은 낌새를 알아차리는 게 제 평생의 업이었는 걸요.”

“저, 저. 그…. 아니, 제가 뭘….”

리오나가 횡설수설한다. 아니, 말도 안 돼.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괜찮아요. 이 성에서 그 자리를 노리는 건 지금 리오나뿐이니까. 어차피 다 주인님께서 정하실 일인걸요.”

당해낼 수 없다. 이 정도면 이제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내는 편이 낫다.

“…그렇게 티가 났나요. 그렇게 내색을 한 기억은 없는데.”

“아니요~? 아일라나 다른 메이드들은 눈치도 못 챘을 거예요~. 설령 눈치챘다 하더라도 크게 뭐라 하지도 않을 거고~.”

그런 걸까. 모두 가스파르를 향한 마음만큼은 진심이니 꽤 격렬한 싸움이 될 거라 예상했는데.

“뭐, 저로서야~? 주인님 말고 안주인님이 또 생기면 그건 그것대로 재밌을 거 같고~. 뭣보다 꿈꾸는 소녀는 언제나 아름다운 법이니까요~.”

“하아….”

역시 참 유별난 사람이다. 버릇없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마야의 사고방식은 남들과 달랐다.

“그래서! 그런 꿈꾸는 리오나를 응원하기 위해! 주인님을 단숨에 포로로 만들 수 있는 마법 아이템과 플레이를 이 마야가 직접 알려주도록 하겠어요~! 어차피 오늘도 주인님은 리오나의 방을 찾으시겠죠~?”

“네, 네? 뭐, 그야….”

그건 확실했다. 가스파르는 리오나를 임신시키고도 이 엿새 동안 리오나의 몸만을 탐했다. 그는 오늘 밤에도 찾아 오겠다는 말을 아침 꼭두새벽부터 해왔다.

가스파르와 마야는 이천 년도 더 된 사이다. 가스파르에 대한 것이라면 하나라도 더 듣고 싶었다.

“네, 부디! 제발! 마야 선배님!”

“흐흐~. 그건 바로~ 바로~?”

이러쿵저러쿵.

리오나는 그 작고 고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마야 선생님의 쪽집게 가스파르 공략 강의를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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