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의 화원-30화 (30/62)

〈 30화 〉 리오나 (30)

* * *

“아, 진짜….”

리오나가 아직도 얼얼한 허리를 부여잡고 오랜만에 성 밖을 나선다. 오늘은 이 성의 일 년 중 가장 특별한 날이다. 가스파르는 벌써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하아, 아이고.”

리오나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그 자세가 어딘가 위험하고 힘이 없어 보인다.

어제는 가스파르가 강아지 귀와 꼬리를 들고 왔다. 동물 장난감에 좋지 않은 기억만 있는 리오나가 한사코 거부해도 그는 거의 고개까지 숙이며 사정사정을 했다.

어찌 리오나가 그런 가스파르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한동안 싫은 척을 했지만, 결국 그 강아지 귀와 꼬리를 받아들였다.

기대에 가득 찬 가스파르의 눈동자 앞에서 고양이 때와 똑같이 주섬주섬 옷을 벗고 조심스럽게 강아지 귀와 꼬리를 착용했다.

파닥파닥. 파닥파닥파닥!

“……? 으응? 하앙! 흐아아앙!”

리오나가 마지막 구슬을 삼키자마자 꼬리는 마치 날아갈 것처럼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꼬리에 진동에 따라 구슬이 리오나의 애널을 또 미친 듯이 자극했다.

“가, 가스파르. 햐앙! 이건 또 왜! 하아앙!”

가스파르는 조금 전까지의 사정사정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당황하는 리오나가 귀엽다는 듯 환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가스파르는 이 강아지 꼬리도 저번 고양이 꼬리처럼 착용자의 감정에 따라 그 움직임을 바꾼다고 했다.

파닥파닥. 파닥파닥.

그 꼬리의 움직임은 정말 사랑하는 주인님을 앞에 둔 한 마리 강아지의 그것이었다.

리오나는 가스파르의 앞에 서기만 해도 마치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주인을 다시 만난 강아지처럼 들뜨고 기쁜 마음이 든다는 걸 다 들켜버렸다.

리오나가 너무 부끄러워 화를 내려고 해도 도저히 화가 나지 않았다. 금빛이 감도는 넓고 풍성한 강아지 귀가 화를 내는 방법을 잊게 만들었다.

그런 리오나의 머리를 가스파르가 쓰다듬어 준다. 허둥대던 리오나의 움직임이 멈췄다. 땅에 주저앉아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아들인다.

평소보다 더한 행복과 충성심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꼬리를 더 세게 흔들고 두 손을 개의 앞발처럼 쳐들고 가스파르에게 매달렸다. 가스파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발가벗은 채로 주인에게 열심히 몸을 비비는 리오나와 그런 리오나에 모습에 크게 만족한 가스파르. 둘은 또 그렇게 알콩달콩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밤을….

“으아아아아악!”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고양이 때도 심했지만 어제의 강아지는 정도를 넘었다. 그때 그 추잡한 행위들과 격해진 감정을 떠올리면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만 같다.

으으으…. 가스파르와의 관계에서 도저히 주도권을 잡을 수가 없다. 언제나 가스파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 버린다. 그가 자신에게 푹 빠져있는 것만은 확실한데.

“아냐, 아니야….”

정말 그건 확실한 걸까. 결국 이렇게 육체적 관계만 계속된다면, 자신과 다른 메이드들 사이에 차이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리오나의 몸과 그 몸이 주는 쾌락에 질리면 언제든지 다른 메이드를 침실로 부르겠지. 만 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가스파르는 그런 남자였다.

가스파르의 몸뿐이 아니라 마음마저 얻을 방법은 없는 걸까. 예전에 좀 더 여러 영애들과 마음을 통해 봤다면 알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위치가 다르니 역시 도움이 안 됐을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보니 모든 게 깜깜하기 그지없다.

“하아.”

이렇게 생각만 한다고 답은 나오지 않는다. 가스파르가 기다리고 있다. 서둘러 정문으로 나가자.

리오나가 정문으로 나오자, 가스파르는 물론이고 성의 모든 메이드가 정원을 중심으로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원 이곳저곳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오늘은 날씨도 좋고, 하늘도 높다. 구름의 그림자가 아니다. 창공을 나는 용의 그림자다.

유유히 가스파르의 둥지를 위를 날던 용들이 하나둘씩 날개를 접고 둥지에 착륙한다. 비늘에서 윤기가 흐르고, 풍채는 거대한 아름다운 용들이다.

크라우스가 수행원들을 이끌고 가스파르의 둥지를 찾아왔을 때가 떠오르는 광경이다. 괜찮다. 오늘은 그렇게 불쾌한 경험은 하지 않아도 된다.

저 용들은 모두 가스파르의 자식들이다. 그와 메이드들이 만 년 동안 이룬 사랑의 결실이다.

착륙한 용들이 차례로 모습을 바꾼다. 제 자식을 기다리던 메이드가 그 품으로 달려 나간다.

리오나는 천천히 가스파르의 옆에 섰다. 가스파르는 정원 중앙에 서서 그 광경을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하하하. 호호호.

이곳저곳에서 다정한 말과 도란도란한 웃음이 들려온다. 가스파르의 자식들은 일 년에 한 번 이 둥지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하루 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가장 가스파르가 정한 대가족의 룰이었다.

각지에서 제 역할을 다 하던 가스파르의 아들들은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각에 모두 이곳에 모여 가족의 정을 나눈다.

아일라, 미나, 마야도 모두 자기 아들과 즐거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아일라네는.

“하, 어차피 적당히 시간 때우다 효도 비행하고 끝일 텐데, 뭐가 좋다고 떼로 모이는지.”

“그런 말 좀 하지마. 게다가 효도 비행이라니. 우리가 진짜 나이 든 것 처럼 들리잖아.”

“적어도 어머니는 웬만한 용보다 나이 많으신 게 맞….”

퍽.

“아악! 마력 담아서 때리지 좀 마요! 그거 진짜 아프니까! 악! 아아악!”

미나네는.

“바쁠 텐데 괜히 시간 아깝게 또 왔어! 흥! 서로 얼굴 본다고 딱히 뭐 좋은 일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에이~.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오늘은 엄마 줄 선물까지 들고 왔는데 섭섭하네?”

“…줘 봐.”

“네?”

“거 줘 보라고.”

“하하, 짜잔! 우리 귀여운 미나와 어울리는 커다란 막대 사탕! 귀엽죠, 맛있겠죠! 자, 아이처럼…. 아악! 아아아악! 귀 놔요! 아파! 진짜 선물 있으니까아아악!”

아니, 저게 도란도란한 가족 풍경 맞나. 뭐, 저 둘은 원래 성격이 그러니까. 그와 반대로 마야네는 정말 다정한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헤헤. 이렇게 얼굴 보니 너무 좋다~. 오늘은 또 어디로 갈까요~?”

“흐응~. 눈 보러 가실래요, 어머니? 산과 들에 소복이 쌓인 아름다운 눈도 보고, 귀여운 여우랑 토끼도 보고.”

“좋아! 사실 아들이랑 가는 거면 어디든 좋아~. 에헤헤~.”

“어머니도 참….”

다른 메이드들도 각자의 아들들과 정다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오랜만에 본 형제들끼리도 인사를 나눈다.

나도 언젠가 배의 아이와 함께 저곳에 서게 될까.

분명 보통 사람이 본다면 정겹고 가슴 따뜻해질 풍경일 텐데, 계속 무언가가 마음에 걸린다.

시기나 질투심일까. 가스파르와 다른 이 사이에서 맺어진 사랑의 결실을 보는 건 꽤 짜증이 나는 일이었다. 이미 잘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달랐다. 괜히 장이 꼬이는 것처럼 심사가 뒤틀린다.

리오나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루어져 왔던 일이고, 설령 진짜 리오나가 가스파르의 옆에 서게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쁠까.

특히 저 용들의 태도가 그랬다. 분명 가족 행사일 텐데 제 어미만 찾을 뿐 아비 되는 가스파르에게는 한발짝도 다가오려 하지 않는다. 곁에 선 리오나도 곁눈질로만 바라볼 뿐 인사조차 하러 오지 않는다.

“가스파르?”

리오나가 가스파르의 손을 잡고 슬며시 그 얼굴을 올려다본다. 평소와 같은 굳은 얼굴이었지만, 그 속내를 읽을 수가 없었다. 가스파르는 그저 쓸쓸하게 자신의 아들들을 바라만 볼 뿐이다.

괜히 리오나도 무겁고 울적한 마음이 든다. 그런 가스파르에게 몸을 기대고 그와 똑같은 곳을 바라본다. 가스파르는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이 제 자식들을 바라만 본다.

손가락과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낀다. 가스파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일 년 중 가장 끔찍한 하루가 또 시작됐다.

원래 이 행사는 자식들이 다른 용들처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가스파르가 아일라와 함께 생각해낸 것이었다. 벌써 만 년 가까이 이어져 오고 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용들은 보통 육아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날수만 있게 되면 제 앞길을 알아서 개척해 나가야 한다. 가스파르 또한 그렇게 자랐다. 그 때문일까, 안하무인에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한 용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런 아들을 두고 싶지는 않았다.

분명 그의 아들들은 다른 용들과 다르게 자라났다. 제 어미를 사랑하고 따르길 좋아했다. 다른 그릇들과는 다르게 마음에 여유가 있는 가스파르의 메이드들은 일 년 중 단 하루일 뿐이라도 아이들과 함께 지내며 정과 사랑을 나누었다.

함께 하늘을 날고, 곱고 예쁜 것을 찾아다니며 아름다운 추억을 쌓았다. 처음엔 모든 게 가스파르의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릇과 다르게 저들은 점차 성장한다. 머리가 굳고, 고집과 사상이 싹튼다. 육체는 물론이고, 체내의 마나와 마법의 소양까지 성장한다. 비밀은 영원하지 않았다.

저들은 가스파르가 제 어미에게 저지른 짓을 모두 알고 있다.

아비가 해온 행위가 얼마나 어미의 생각과 행동을 제한하고 있는지, 어미가 원래 무엇이었고, 누구 때문에 여자의 몸이 되어 끝나지 않는 봉사를 하고 있는지.

처음에는 모두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저들이 더 나이 들고 머리가 굳으면 달라지겠지. 어차피 다른 용들은 더 심한 짓도 하고 있는데.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의 거리는 점차 멀어질 뿐이었다. 가스파르는 한 명이지만 아들과 그 어미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미 각자의 삶이 있는데 한 명 한 명 대화를 나누기 조차 어려웠다.

가스파르와 그들은 달랐다. 아비와 마음을 터놓은 기억도 없고, 어미의 따스한 품속에서 사랑을 받은 기억도 없다. 대화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저들은 언제나 제 어미만을 걱정하며, 아비를 경멸하는 눈빛조차 숨기지 않는다. 자기들끼리 무슨 말을 하고 다닐지도 뻔하다.

하지만 아들들아. 너희라고 뭐 다를 것 같으냐.

너희도 이제 나이가 찼으니 그릇을 받아야만 할 거다. 첫째는 이미 기한이 다 되었는데도 괜한 부끄러움에 손을 대지 않고 있다지. 너희도 용이다. 용의 욕망이 너희를 가만 둘 것 같으냐.

과오는 돌이킬 수 없고,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 너희도 언제까지나 어미의 품을 그리워하며 살 수는 없다.

너희가 정녕 부끄러움을 안다면 제 어미에게 사실을 밝히고 원래의 삶을 돌려주려 했겠지. 관계가 파탄 날 것이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괜히 나에게 화풀이만 할 것이 아니라.

결국, 너희도 내 아들이다. 나와 똑같이 꾸며진 죄책감과 거짓 우월감으로만 삶을 살아가는 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아.

우리 용은 이미 저주받은 종족이다. 살기 위해선 남을 짓밟고 타락시켜야만 한단 말이다.

그 순간이 오면 너희도 이 아비를 이해하겠지. 그때가 오면 너희는 부끄러움에 어미 얼굴이나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아비는 그게 걱정이 되는구나.

“가스파르?”

리오나가 손을 꼭 잡아 온다. 위로하는 표정으로 나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사랑에 빠진 표정을 본 기억은 수없이 많아도 그런 표정을 본 기억은 거의 없었다. 리오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를 텐데.

리오나가 몸을 기대온다. 차갑게 식은 가슴에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스며든다. 리오나는 그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

손깍지까지 껴 온다. 그 손을 꽉 잡아 준다. 그렇게 둘이서 시끄러운 용과 메이드들을 조용히 바라본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단둘만 똑 떨어진 세계에 남겨진 착각마저 든다.

서로가 서로를 더 끌어안는다. 지금은 이 따스함만 있으면 다 아무래도 좋았다.

리오나, 너는 정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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