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리오나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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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나가 천천히 팔을 푼다. 아직도 울먹이는 얼굴로 가스파르를 바라보고 있다.
가스파르는 여전히 굳게 굳은 얼굴로 리오나를 바라만 볼 뿐이다.
“가스파르…. 난, 난 가스파르 곁에 있기만 해도 너무 행복해. 우울하기만 했던 지난 일 년은 물론이고, 부족한 것 없던 레온하르트의 삶보다도 리오나인 지금이 더 행복해.”
“리오나….”
“네 곁에 있으면 하루가 빛나는 별 같고, 네가 나를 원하면 정말 하늘을 나는 것처럼 기뻐. 언제나 꿈꾸는 것처럼 세상이 아름답고 행복하단 말이야. 그런데 가스파르는 왜…. 가스파르는 내 곁에 있으면 그렇게 기쁘지 않은 거야?”
리오나가 물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짜낸다. 분명 기특하고 귀여운 말인데, 한 달 전만 해도 그렇게 바라고 바랐던 말인데, 지금의 가스파르에게는 돌려줄 말이 없었다.
리오나의 그 마음과 말조차 자신이 만든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도 결국 아들들과 똑같다. 얕은 사실을 드러내 위로를 받을 생각은 해도, 중요한 진실까지 드러내 관계를 파탄으로 이끌 용기는 없었다.
“아냐, 리오나. 나도 물론 너와 함께 있으면 항상 기쁘고 즐거워. 오늘은 그저 그냥 내가….”
“또, 거짓말.”
“…….”
뭐라고?
“왜 또 그런 뻔한 거짓말을 하는 거야? 지금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면서, 그렇게 쓸쓸한 눈으로 날 바라보면서. 왜?”
너야말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혼자 고민하고 아파하던 이야기도 해주지 않고, 또 내 앞에서는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나 하고. 가스파르에게 나는 뭐야? 그저 편하고 쉬운, 수없이 많은 메이드들 중 한 명일 뿐이야?”
“아니, 리오나. 그러니까, 잠깐만, 잠깐만.”
리오나가 단호한 어투로 가스파르의 말을 부정한다. 흘러넘치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눈을 부릅뜨고 가스파르를 노려본다. 그녀는 명백하게 화를 내고 있다.
어울리지도 않게 허리를 기울이고 몸을 가까이해 가스파르를 위압한다. 작은 몸이지만 그 몸에 실린 감정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날카롭고 선명하다.
리오나에게 무어라고 해야 하지. 애초에 리오나는 왜 이렇게 나의 말에 반기를 드는 거야. 다른 메이드들처럼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다고 긍정해주면 될 일을. 너희 같은 꽃은 그저….
“가스파르. 나에게 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야. 이미 나한테는 너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가스파르에게 나는 뭐야? 난 너의 기쁨과 같이 아픔이나 슬픔까지도 함께하고 싶어. 응? 제발 대답해줘, 가스파르.”
리오나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올곧고 뚜렷하다. 그래서 더 두렵다. 어쩌면 선왕의 말보다도 무겁고 섬뜩하다.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말이 되지 못한 말만이 혀끝에 맴돈다.
식은땀이 흐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리오나. 어제는 꼬리를 달고 내 밑에서 앙앙거리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무한히 긍정해주었으면서, 지금은 대체 왜.
그저 조금 둘러대기만 하면 될 텐데, 작은 변명 하나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메이드들을 구워삶았던 혀가 지금은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대체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하고,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하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괜스레 자세를 고쳐 앉고, 리오나에게서 눈길을 돌린다. 그녀가 조금씩 다가온다. 손이 떨리고 머리가 아프다. 덥지도 않은데 식은땀에 벌써 등과 이마가 흥건하다.
리오나의 말, 표정, 눈동자가 두렵고, 또 두렵다. 이 상황이 불편하기 그지없고 도망치고 싶어진다. 아니, 내가 왜? 그녀가 나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왜 나의 꽃에게서 도망쳐야 하지?
말도 안 돼. 이건 이상하다. 리오나도 리오나지만 이런 한심한 생각이나 하는 자신이 제일 이상했다.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문다. 지금껏 그를 둘러싸온 모순이 한 덩어리로 뭉쳐 리오나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만 같다.
아냐, 리오나. 정말 아니야. 다 진심이야. 나도 너만큼 너를 좋아해.
단순하고 유아적인 말의 파편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감히 입 밖에 꺼낼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부끄럽고 유치한 표현으로 머리가 가득 찬다. 나는, 나는 대체 왜….
“아.”
가스파르의 입에서 깨달은 듯한 감탄이 터져 나온다. 그의 표정이 더 일그러진다.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변명이 떠오르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자기의 말을 무조건 긍정하기만 하는 이들과 만 년을 함께 살았다. 이렇게 솔직하게 부딪혀 오는 감정과 진심을 경험한 지 너무나 오래되었다.
다른 용과 나누는 대화는 그저 사무적이고 의례적인 말뿐. 타락하기 전의 그릇들과 나누던 대화도 압도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한한갓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완전한 그릇이 된 메이드들과 나누었던 말은 대화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들뿐이었다. 그가 아무리 제멋대로에 무리한 부탁을 해도 그녀들은 그저 웃고 기뻐하며 그의 말을 따랐다.
그에게 말이란 마음이 아니라 의사를 전하는 수단이었고, 메이드들은 그에게 마음은커녕 의사조차 전달하지 못한 채, 그저 그의 말을 반복하기에 바빴다.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본 사람의 진심일까.
누군가와 진심을 다해 대화를 나눈 게 언제였나. 그 꽃이 만발한 별장에 묻힌 알로와즈와의 대화가 마지막이었을까. 그는 그가 가스파르라 불리기 전에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친우였다.
만 년도 훌쩍 넘긴 오래전의 일이다. 용의 기억조차 아득하게 만드는 먼 과거란 말이다. 리오나의 진심 어린 말이 생경하고 어색한 것도 당연했다.
이 성은 가스파르만을 위한 화원 따위가 아니었다. 단지 꽃과 그물로 장식된 털 달린 새장이었을 뿐. 그는 그 좁은 새장 속의 봉황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한마디씩 곱씹어 본다. 그녀가 왜 우는지, 그녀가 왜 화를 내는지 알고 이해하기 위해 잊었던 감각을 되살린다.
그녀는 정말로 가스파르를 사랑한다. 가스파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그래서 그가 느꼈을 고통을 제 것처럼 느끼며 울었고, 그녀가 그를 생각하는 것만큼 그가 그녀를 생각해 주지 않았기에 화를 낸 것이다. 생각해보면 간단한 것 아닌가.
물론 다른 메이드들도 가스파르를 사랑하지만, 그녀들은 리오나처럼 울거나 화를 내지는 않았을 거다. 그건 가스파르가 만들어 낼 수 없는 감정이니까.
“가스파르? 가스파르!”
가스파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리오나가 걱정스러운 듯 그의 이름을 부른다.
왜 메이드들 중에서 그녀만이 진심을 가지고 그를 대하는지 알 수는 없다. 조교 과정 중에 문제가 있었나, 아니면 보석 호수에서의 일 때문인가. 이제 와 다 의미 없는 일이다.
언제나 참인 이치는 순수한 진심에는 같은 진심으로 대해야만 한다는 도리뿐이다.
가스파르가 다시 고개를 든다. 거기엔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걱정스럽게 가스파르를 바라보는 리오나의 얼굴이 있었다. 그 귀여운 눈꼬리에 방울방울 눈물이 맺혀있다.
“가스파르. 난 가스파르가 나처럼 행복했으면 좋겠어. 언제나 웃고 밝은 모습만 보여줬으면 좋겠어. 난 내 행복보다 가스파르의 행복을 더 바라는걸.”
“리오나, 미안해. 나는 지금까지 너를 진심으로 대하지 못했어. 항상 말로만….”
“괜찮아. 그러니까 그런 슬픈 표정은 짓지 마. 이렇게, 웃어 줘. 네가 그런 표정을 지으면 그만큼 내 가슴이 아프고 애가 탄단 말이야.”
리오나가 가스파르의 얼굴에 손을 뻗는다. 손가락으로 가스파르의 눈꼬리와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려 웃는 표정을 만든다.
그렇게 강제로 지어진 표정에도 감정이 깃든다. 이렇게라도 웃으니 모든 망설임과 멍울이 다 부질없고 하찮게 느껴진다.
그래, 넌 사랑을 받으며 자란 티가 나는 아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주위를 웃음 짓게 만드는 아이.
그 행위와 마음씨가 무척이나 예뻐서, 눈에 눈물을 단 채 웃는 리오나의 그 미소가 몹시 찬란해서, 가스파르는 어느샌가 리오나를 껴안고 있었다.
리오나도 다시 가스파르를 껴안아 준다. 아까와는 느낌이 다르다. 몸과 몸이 닿은 곳에서 리오나의 따스한 마음이 전해져 온다. 이 모든 게 연극이라면 그 연극을 끝낼 수 있는 건 가스파르, 자신뿐이다.
자신이 어떻게 리오나의 마음을 헤집고 망가트렸는지 말해야 한다. 자신은 그만한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남자라고, 그저 비루하고 추하게 늙은 망령 난 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리오나, 이렇게?”
가스파르가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리오나는 세상에서 가장 기쁘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화답한다. 그 미소에 차가웠던 가슴이 눈처럼 녹아내린다.
“응! 가스파르. 언제나 그렇게 웃어줘.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정말 좋아해, 가스파르. 하읍….”
“나도 사랑해, 리오나. 흐읍….”
리오나가 입술을 맞대온다. 수줍은 듯 꼭 감은 두 눈은 여전히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가스파르도 눈을 감고 리오나를 온전히 느낀다.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듯 껴안고 그 체온과 감정을 공유한다. 빠르게 뛰는 리오나의 고동에 맞춰 가스파르의 가슴도 점차 가파르게 뛴다.
리오나의 몸이 뜨겁다. 자연스럽게 가스파르의 얼굴에도 열이 오른다.
얼굴이 뜨겁다. 가슴이 세차게 뛴다. 달콤하고 저릿한 무언가가 가스파르의 몸을 관통한다. 이미 몇 번이고 리오나의 입을 맞췄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또 비겁하고 지리멸렬한 생각이 든다. 리오나가 원하는 게 정녕 진실일까. 사실 이 키스처럼 달콤하고 짜릿한 거짓말을 바라는 게 아닐까. 지금 리오나는 나보다도 행복하고 기쁠 텐데, 내가 그걸 부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나.
여기서 진실을 밝힌다면 또 나의 잘못된 이기심이 만들어낸 과오가 늘어날 뿐이지 않은가.
리오나는 평소와 다르게 적극적으로 혀를 얽어온다. 지금은 앉아 있는 가스파르의 얼굴이 리오나의 얼굴보다 낮았다. 리오나는 정열적으로 가스파르를 갈구한다. 점점 가스파르가 리오나에게 매달리는 자세가 된다.
리오나의 혀와 타액이 조금씩 가스파르를 범한다. 가스파르의 자세가 무너지고, 리오나는 덮듯이 가스파르 위로 몸을 기댄다.
가스파르의 약해진 마음과 텅 빈 감정에 리오나가 스며든다. 잊혀 방치되어 왔던 마음의 방 한편이 그녀에 대한 감정으로 가득 찬다. 그건 아까까지의 미안함이나 후회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검고 칙칙한 감정이 아니라, 화사하고 싱그러운 분홍빛 감정. 그 감정이 혀끝에서 혀끝으로 전해져 온다. 두근거리고, 애타고, 설레는, 알록달록 꽃 빛의 감정. 오랜 세월 비어있던 가스파르의 마음의 방문에 리오나가 제 이름을 내건다.
“푸하. 하아…. 하아….”
가스파르의 얼굴이 빨갛다. 그리 오래 입술을 맞댄 것도 아닌데 거친 숨을 내쉬며 가슴을 부여잡는다.
어딘가 몽롱하고 열띤 표정으로 리오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평소의 여유로운 그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리오나는 은은하게 웃으며 가스파르에게 몸을 기댄 채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종으로서 주제넘은 무례한 행동이지만 가스파르도 리오나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말라비틀어진 풀이 물을 빨아올리듯, 가스파르는 리오나의 사랑과 온기에 온몸을 허락한다. 망설임과 부끄러움은 아직도 여전한데, 오히려 이전보다 리오나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리오나….”
“헤헤, 가스파르. 혹시….”
가스파르가 훨씬 자연스럽고 행복에 가득 찬 미소를 짓는다. 리오나는 그런 가스파르가 재미있다는 듯이 쿡쿡 웃는다. 그러고서는.
“술이랑 춤 좋아해?”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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