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의 화원-33화 (33/62)

〈 33화 〉 리오나 (33)

* * *

어둠이 텅 빈 가스파르의 둥지를 메웠다. 사위는 물에 잠긴 것처럼 고요하다.

커다랗고 둥근 창문 사이로 스민 달빛이 휑한 연회장을 밝힌다. 온갖 술과 음식이 테이블마다 넘치고, 비열한 웃음소리와 교성이 뒤섞였던 게 어제 같은데, 이곳은 벌써 석 달째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테이블은 싹 다 치워버렸다. 당연히 먼지를 쓰는 메이드도 없다. 아주 크고 너른 공간인데 거의 아무것도 없다. 단상 구석에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위한 피아노 하나와 스무여 개의 관현악기가 있는 게 다다.

“으음.”

가스파르가 자신의 턱시도 정장을 공연스레 가다듬는다. 기본적으로 몸에 착 달라붙지만, 움직이는 곳은 품이 여유롭다. 느슨한 나비넥타이까지 보니 딱 춤을 추기 위한 연미복이다.

어딘가 진정되지 않는지, 가스파르는 연신 나비넥타이를 묶었다가 풀고, 머리를 매만진다. 긴장감에 마른 침까지 삼킨다. 오늘의 그는 정말로 그답지 않다.

리오나가 늦다. 가스파르가 마법으로 그녀의 옷을 갈아입혀 주려 했지만, 그녀는 자기가 원하는 드레스를 입고 싶다며 성의 드레스룸으로 달려가 버렸다. 꼭 이 성의 드레스룸에 가보고 싶었다나 뭐라나.

그 드레스룸은 이종족들의 전통의상과 화려한 드레스로 가득하다. 아일라를 시작으로 밖에서 하나둘 가져온 것이 벌써 그렇게 찼다. 내일 메이드들이 돌아오면 또 한가득 추가되겠지.

어차피 항상 메이드 복만 입으면서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만 년이 지나도 여자란 건 정말 모르겠다.

리오나도 그랬다. 밥 먹다 말고 갑자기 춤이라니.

인간이라면 생각만 해도 배가 아파져 오겠지만 다행히 용과 그릇의 몸은 그렇게 무르지 않다. 배의 알에 무리가 가는 일도 없겠지. 리오나가 도를 넘은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한참 동안 옷만 가다듬던 가스파르가 이젠 악기에 손을 댄다. 악기들은 수십 년째 방치된 그 모습 그대로다.

그 어이없는 종전기념회에서도 악기는 울리지 않았다. 그 녀석들에게 문화를 즐길 교양 따위는 없다.

보존 마법 덕분에 악기의 모양과 다듬새는 멀쩡했지만, 그 현과 관이 정말 최상의 상태일 리가 없었다. 조율해놓지 않으면 끔찍한 소리가 나 분위기를 망칠 것이다.

가스파르가 천천히 정신을 집중한다. 줄에는 마법의 실을 걸고, 관에는 마법의 바람을 불어 넣는다. 그러고 직접 피아노 앞에 앉아 A3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린다.

“윽.”

역시 도저히 못 들어줄 끔찍한 소리가 났다. 다시 정신을 집중해 악기들을 조율한다.

현악기의 줄을 당기거나 풀고, 관악기는 관과 부품을 아예 새롭게 짜 맞춘다. 모든 악기를 조금씩, 조금씩 오보에의 라에 맞춘다.

“…….”

이제야 제법 들어줄 만한 소리가 난다. 섬세한 조정을 끝내고 다시 모든 악기로 라음을 연주한다.

“으음….”

꽤 괜찮다. 그 여세를 몰아 사분의 삼박자, 우아한 왈츠의 한 악절을 연주한다. 퉁 닥 닥, 퉁 닥 닥.

“…좋아.”

섬세하고 조화로운 소리가 난다. 텅 빈 연회장에 고상하고 기품있는 선율이 울려 퍼진다. 풍부함은 부족하지만 애초에 차린 게 별로 없으니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어떤 손님이 와도 부끄럽지 않다. 리오나가 원하는 곡에 따라 또 조율이 필요하겠지만 그건 그때 일이다. 지금은 이만하면 됐다.

“후우.”

피아노 앞에서 일어나 괜스레 기지개를 켜고 심호흡도 해본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거야. 리오나의 얼굴은 매일 봐 왔다. 오늘은 어째선가 그 얼굴을 다시 보는 것이 새롭고 설렌다.

가스파르는 신경 쓰이는 마을 처자를 기다리는 순박한 소년처럼 안절부절못한다. 당장 어젯밤만 해도 리오나를 깔아뭉개고 마음껏 희롱했으면서 참 우스운 꼴이다.

그건 그렇고 너무 늦는다. 설마 성에서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지금 성에는 둘 말고 아무도 없다. 오늘은 별빛도 약하다. 이거 진지하게 기척을 찾아야 하나….

“가스파르?”

리오나가 가스파르를 부른다. 가스파르가 고개를 돌린다.

“생각해보니 네가 좋아하는 술이 뭔지 안 물어봤지 뭐야. 그래서 내가 마실 맥주랑 가장 비싸 보이는 와인 한 병 가져왔어. 상관없지?”

머루 같은 어둠 속에서 리오나의 모습이 드러난다. 겨우 가는 달빛 한 줄이 연회장을 비출 뿐이지만, 세로로 찢어진 가스파르의 동공은 리오나의 아름다운 모습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리오나는 피보다도 붉고 정열적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붉고 하늘하늘한 천이 리오나의 발목까지 내려온다. 대담하게 노출된 등과 어깨는 요염하기 그지없다.

드레스는 온통 붉은데, 오른쪽 팔만 검다. 머리에는 새하얀 꽃장식이 달렸다. 그 대비가 또 고상하고 아름답다. 그 가늘고 고운 팔 끝에서 두 명분의 술병과 잔이 덜렁거린다.

리오나가 조심성 없이 술병과 잔을 그랜드 피아노의 선반 위에 올려놓는다. 가스파르는 어안이벙벙한 표정으로 그런 리오나를 바라본다.

“헤헤. 어때? 예쁘지?”

“어, 어어….”

리오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가스파르가 갑자기 고개를 돌린다. 그 얼굴이 조금 붉다.

“에헤헤…. 예쁜 드레스가 너무 많아서 꽤 고민했어. 그래도 그 표정을 보니 성공이네.”

리오나가 허리를 숙여 고개를 돌린 가스파르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가스파르는 애써 표정을 숨긴다. 왜인지 지금의 리오나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흐응~? 흐흐. 지금의 가스파르도 멋져. 헤헷. 또 반할 것만 같아.”

리오나가 계속 그 티 없는 얼굴을 들이댄다. 못 이긴 가스파르가 싱긋 웃으며 대답을 대신한다. 리오나가 또 쿡쿡 웃는다.

리오나가 도자기 병의 줄 뚜껑을 따서 두 잔에 따른다. 홉과 보리의 냄새가 주위에 퍼진다. 가스파르는 수도사들이나 마시는 흐르는 빵 따위에 관심은 없었지만, 리오나와 함께라면 다르다.

저 와인보다도 비싸고 좋은 술이 저장고에 넘쳐흐른다. 하지만 다 필요 없다. 어차피 술은 사랑하는 이와 마시는 것이 가장 맛있다.

리오나가 잔을 건네온다. 기쁨으로 가득 찬 리오나의 얼굴을 보니 꿉꿉했던 가스파로의 기분도 절로 좋아진다.

하지만 정말 괜찮을 걸까, 그 분홍색 마나 말고 다른 걸 마시게 해도.

그 액체는 리오나의 몸에 기쁨과 생기를 불어넣어 정신을 안정시키는 것은 물론, 막대한 마력을 소비하는 용의 문장이 유지될 수 있도록 마나를 공급해 주는 역할도 한다.

의존성이 있지만 그리 강하지는 않다. 술이나 담배가 더 강한 정도다. 그 액체 대신 술이나 물 같은 다른 음료를 입에 대기 시작하면 리오나의 정신에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크하."

이제 와 저 잔을 빼앗을 수도 없는 일이다. 후회와 한숨보다 쓸모없는 것은 없다. 이제 망설임은 버리자. 가스파르는 리오나와 함께 단숨에 잔을 비웠다.

“크으~. 하아. 이거야, 이거. 이게 대체 얼마 만이야.”

가스파르에게는 그저 평범한 맥주였지만 리오나는 무슨 생명수라도 들이킨 양, 어깨를 움츠리고 짜릿한 표정을 짓는다. 그 솔직한 호들갑이 귀엽다.

리오나는 가스파르를 앞에 두고 연거푸 잔을 들이킨다. 멋들어진 고전 그랜드 피아노 옆에서 자기 혼자 술판을 벌인다.

리오나의 얼굴이 벌써 붉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와인을 홀짝거리는 가스파르에게 몸을 기댄다.

“후우, 가스파르…. 알겠지만 난 섬세하거나 마음씨 깊은 여자가 못 돼. 네가 아까처럼 슬픈 표정을 지으면 뭘 해줘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아냐, 리오나. 이젠 괜찮아. 마음 쓰지 않아도 돼.”

정작 술에 강하지는 않은 걸까. 체온이 오른 리오나의 몸에서는 옅은 봄내가 났다.

“내가 마음이 쓰이는데 뭘. 내가 레온하르트였을 때에는 신참이 오거나 울적해 보이는 놈이 있으면 핀과 함께 술집으로 데려가 진창 술을 먹였어. 밤이 샐 때까지 되도 않는 노래를 부르며 같이 어깨를 걸고 춤을 췄지.”

그래서 술이나 춤을 좋아하냐고 물어본 거구나. 그것 말고는 사람을 위로할 방법을 모르니까. 그 나이대 수컷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훈련 때문에 야영하게 되면 다른 진지에 있는 핀 몰래 병사들과 불을 피워 또 술을 붓고 고기를 구웠지. 귀족들이랑 먹는 향신료 범벅보다 그렇게 먹는 고기가 진짜 맛있었어. …지금 생각해보니까 핀도 알면서 모른척한 것 같아. 헤헤. 뭐, 어쩔 거야. 어차피 내가 대장인걸!”

"그래, 그래."

흐흐흐. 실없게 웃는 그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리오나는 기분 좋다는 듯 가스파르의 손에 머리를 비빈다. 그릇이 되면서 체질이 변해 술에 약해진 걸까, 리오나와 다르게 이야기 속의 레온하르트는 꽤 주당이다.

"다 그렇게 웃고, 떠들고. 술잔 속에는 지위나 명예 따위 없어. 그날만은 같이 우정을 마시며 친구가 되었지. 옛날의 난 핀이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도 몰랐어. 항상 진지하고 엄격한 아이였는데, 정말 순수하고 맑은 얼굴로 웃더라고. 꼭 술이 없더라도 난 그렇게 모두가 행복한게 좋아."

리오나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가스파르를 바라본다. 약간 몽롱한 눈동자가 어딘가 애처롭다.

"가스파르, 그러니까 너도 내 앞에서만큼은 티 없이 웃어줘."

"리오나…."

리오나가 행복하게 회상하는 레온하르트의 삶은 이미 끝났다.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의 친우 핀은 크라우스에게 납치당했고, 그가 아끼던 병사들은 이제 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리오나가 영원할 거라고 믿었던 그 행복을 끝낸 건 다름 아닌 가스파르다. 그는 새삼 이 상황의 모순을 깨닫는다.

게다가 리오나를 아끼고 사랑한다면서, 정작 그와 그녀에 대해 아는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자신이 짓밟은 인생과 미래에 희열을 느끼면서 그 가치를 가늠하지도 못한다.

지금까지 리오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문장으로 그녀의 삶과 태도를 표현하려 하면 말문이 막혔다. 이게 옳은 걸까. 그럴 리 없는데.

가스파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회상에 잠긴 리오나는 귀여운 미소를 짓고 몸을 좌우로 흔들며 콧노래를 부른다. 정말 세상 행복하다는 투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도 다 쓸모없이 느껴진다. 어휴, 정말이지….

“으응? 으잉! 으! 또 그 표정! 내가 하지 말랬는데 또!”

가스파르를 힐끗 본 리오나가 목소리를 높인다. 또 미련이 얼굴로 드러났나 보다. 오늘은 그녀의 마음을 맞추는 것이 어렵다.

“미안, 미안. 리오나. 그냥 조금 이상한 생각이 나서.”

가스파르가 손사래를 친다. 리오나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가스파르의 얼굴을 바라본다. 얼굴에 구멍이라도 낼 기세다.

“안 되겠어. 역시 술만으로는 부족하지. 가스파르, 거기서 피아노 좀 쳐 줘. 내가 죽이는 춤을 보여줄 테니까.”

폴짝. 리오나가 의자에서 일어서 단상 앞으로 향한다. 가스파르는 그녀가 대체 뭘 죽이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일단 하란 대로 피아노 앞에 자세를 고쳐앉는다.

“그래서 무슨 노래?”

“아무튼 빠르고 신나는 거!”

리오나가 정확히 달빛이 드리우는 곳 아래에 선다. 처연한 달빛을 받은 리오나의 등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나저나 참 적당한 주문이다. 뭐, 좋아.

리오나가 자세를 잡고 숨을 가다듬을 동안, 그녀가 못 들을 정도로 아주 미세한 소리로 재조율을 마친다.

사분의 사박자. 가스파르는 아주 느리게 뛰는 자신의 고동에 음악을 맞추면 놀라울 정도로 신나고 빠른 곡을 연주할 수 있다는 걸 몸으로 알고 있다.

리오나가 한 손을 든다. 가스파르가 그 사인에 맞춰 연주를 시작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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