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의 화원-34화 (34/62)

〈 34화 〉 리오나 (34)

* * *

가스파르의 굵지만 부드러운 손이 피아노의 건반 위를 난다. 현에는 보이지 않는 줄이 걸려 감미로운 소리를 발하고, 그에 맞춰 바람을 탄 관악기들의 웅장한 소리가 텅 빈 연회장을 가득 채운다.

높고 빠른 소리, 오직 리오나만을 위한 신나는 춤곡이 가스파르의 손끝에서 울려 퍼진다.

리오나도 가늘지만 그만큼 고운 달빛 아래에서 춤추기 시작한다. 곡의 빠른 박자에 맞춰 발과 다리는 바쁘게 땅을 딛고, 팔과 손은 어둠을 가른다.

리오나의 구두와 연회장의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가스파르의 연무곡에 박자를 새긴다. 리오나의 춤 선을 따라 일정한 리듬으로 통하는 경쾌한 소리가 둘의 마음속 흥을 돋운다.

리오나의 동작에 맞추어 드레스의 붉은 천이 하늘하늘 너울거린다. 피보다 붉은 천이 리오나의 강렬한 동작에 따라 넓게 퍼져 옅은 속살을 드러낸다. 가는 달빛과 만나 마치 불꽃처럼 피어오른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이 아닌, 마치 정말 살아있는 불꽃처럼 제가 빛을 발하는 것 같다. 그 아름다움과 생명력에 연주에 집중하고 있던 가스파르도 얼이 빠진다.

하지만 음악과 춤을 멈출 수는 없다. 리오나의 허리와 손끝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곡을 이끈다. 더 붉고, 더 정열적이게. 그녀의 아름다움에 지지 않게.

그녀의 고운 얼굴과 섬세한 몸놀림에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사실 그녀가 추는 춤은 여성의 춤이 아닌 남성의 춤이다. 허리와 발에 굳센 힘이 담겨있고, 손끝은 여성의 몸을 감싸 안는 것처럼 관능적이다.

분명 레온하르트는 인간들의 파티장에서 여성을 유혹하거나, 아까 말한 술집에서 장난처럼 남들을 웃기기 위해 저 춤을 추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마치 장미꽃같이 붉고 뜨겁게 가스파르를 유혹하는 몸사위처럼 보인다. 춤을 추면서도 뜨거운 눈빛으로 가스파르를 바라보고 있다.

몸의 선이 다르고 담긴 마음이 다르다. 그녀가 춤에 기교를 넣고 허리를 틀 때마다 드러나는 허벅지가 가스파르를 홀린다. 신나고 빠른 음악이 그 연주자인 가스파르조차 깊은 흥분으로 이끈다.

자연스럽게 곡과 춤에 음란한 기운이 스며든다. 담긴 환희와 기쁨은 변함이 없지만, 더 질척하고 너절한 두 남녀의 속내가 손끝에 걸려 그대로 음색과 동작을 통해 드러난다.

리오나가 춤을 추며 가스파르에게 다가온다. 가스파르도 곡을 절정으로 이끈다. 남성의 춤은 조심성도 거리낌도 없다. 여성인 리오나의 몸의 매력을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동작으로 마음껏 드러낸다.

둘은 이제 손이 닿을 것처럼 가깝다. 가스파르의 마음도 동한다. 곁눈으로 리오나의 윗가슴골과 허벅지가 보인다. 리오나가 곡의 흐름에 따라 몸을 틀면 가스파르의 시선도 그에 맞춰 따라간다.

리오나도 다 알고 있다. 오히려 묘하게 어떤 어필을 하는 것같이 보인다. 손끝이 거의 가스파르의 팔과 닿을 듯 말 듯 하다. 음기를 띄운 퀵스텝을 위한 연무곡은 이미 절정에 다다랐다.

그렇게 리오나는 춤을 절정으로 이끌며 가스파르에게 다가오다가….

갑자기 리오나가 크게 몸을 돌리더니 세차게 땅을 차고 손을 하늘에 뻗는다. 누가 봐도 춤의 마무리다. 정말 다 끝낸 것처럼 동작을 마치고 가스파르를 힐끗 보더니 활짝 웃는다.

당황한 가스파르가 춤이 끝난 줄 알고 재빨리 곡을 마무리하려 하자, 리오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스텝을 밟고 몸을 흔든다. 이번에는 더 당황한 가스파르가 성급히 몸과 정신에 긴장을 불어넣어 얼렁뚱땅 곡을 살린다. 단 한 명의 연주자에 의지하던 오케스트라가 지리멸렬한 소음을 내뱉는다.

당연하게도 곡의 진행이 서툴고 우스운 꼴이 된다. 만약 진짜 공연의 연주자였다면 몹시 부끄럽고 송연한 일이다. 가스파르가 샐쭉한 표정으로 리오나를 바라본다. 리오나는 마치 유치한 장난이 통해 기뻐하는 어린아이처럼 또 활짝 웃는다.

멀쩡한 춤의 움직임에 야한 동작을 섞은 것도 처음부터 다 의도한 것일 테다. 가스파르의 마음마저 꿰뚫어 보고 놀려 먹으려고. 그가 무슨 반응을 보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도 다 예상했다는 투다. 가스파르는 언젠가부터 리오나의 손 위에서 놀고 있었다.

가스파르가 항복의 표시로 웃으며 두 손을 들고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선다. 피아노 연주는 멈추지 않는다. 이제는 마법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뛰논다.

그가 웃어 보이자 리오나는 더 크게 미소를 짓고는 춤추기를 계속한다. 가스파르는 이제 곁눈질이 아니라 똑바로 리오나의 춤을 감상한다.

정말이지 곱고 아름답다. 달은 여전히 처연한 빛을 땅에 내리며 저 하늘에 떠 있는데, 그녀와 닿은 달빛은 뜨겁고 활기차게 불타오르는 것만 같다. 곡과 춤의 진행도 지리멸렬한 시작에서 벗어나 제 궤도에 올랐다.

리오나는 가진 끼와 재능도 뛰어나다. 아니, 레온하르트의 끼와 재능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가 지금 가진 기억과 재능은 오롯이 그가 그를 위해 가꾸고 길러왔던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은 오직 가스파르만을 위해 쓰이고 소모되고 있다. 하나의 인생이 달빛 아래에서 불타오르고 있다. 가스파르가 오직 그녀만을 위한 연무곡을 연주한 것처럼 리오나도 오직 그만을 위한 춤을 춘다. 오직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 하나로.

가스파르는 춤에 대해 그리 빠삭하지 않다. 그런 문외한인 가스파르도 리오나의 춤에 담긴 사랑과 열정은 읽을 수 있었다. 리오나의 마음속 자신은 대체 어떤 모습인 걸까.

가스파르의 심장이 두근거린다. 요즘 들어 자꾸 이런다. 평소에도 언제나 정신을 차리면 리오나의 모습만을 쫓는 자신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여자가 된 리오나의 모습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그래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그래왔던 것처럼, 가스파르도 밤마다 그녀를 생각하며 하루를 지새웠다. 리오나가 진심을 드러내기 전부터 말이다. 이미 마음은 통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스파르는 춤만큼이나 사랑에도 문외한이다. 아직 사랑을 모르는 그는 마음을 그녀와 가까이하기 두려워했다. 다른 메이드들처럼 몸만을 가까이해도 가슴속 응어리진 욕망을 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건 서로 다른 욕망이라는 것도 모른 채.

리오나가 또 크게 몸을 돌린다. 펼쳐진 드레스의 끝에 걸린 달빛이 붉게 흩뿌려진다.

그런 그녀를 망가트리면서 가스파르는 희열과 함께 고통을 느꼈다. 생경한 감정에 동요하면서도 자신이 가진 진실을 돌아보지 못했다. 어차피 이루어져서는 안 될 사랑이라고 마음 한편으로 단정하고 있어서였을까. 그래서 미련이 남고 마음이 아팠던 걸까.

지금은 다르다. 진심과 진심이 서로 맞닿았다. 이미 마음이 사랑을 따르고, 몸이 그녀를 원하는데, 그가 이제 와 뭘 할 수 있을까. 심장은 여전히 거세게 뛴다. 그녀를 바라보면 머리가 몽롱하고 얼굴이 뜨겁다. 그저 멍하니 사랑하는 그녀를 바라만 볼 뿐이다.

리오나가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뻗으며 춤을 마무리한다. 이번에는 진짜 끝이다. 곡도 그 절정에 맞춰 꼭 알맞게 끝난다.

짝짝짝. 가스파르가 손뼉을 친다. 리오나는 숙녀가 아니라 마치 신사처럼 허리를 크게 숙이며 화답한다.

그러고서는 재빨리 달려와 가스파르에게 몸을 던진다. 가스파르가 커다란 품으로 그녀의 작은 몸을 와락 안아준다.

“어때, 어때. 가스파르? 나 멋졌지?”

가스파르의 품은 정말 아늑하고 포근했다. 춤을 추느라 땀이 조금 흘렀는데도 거리낌 없이 리오나를 꽉 안아준다. 가슴팍에 뺨을 비비느라 찰랑거리는 머리를 그가 천천히 쓰다듬어 준다.

“그래, 그래. 최고였어, 리오나. 정말 아름다웠어.”

“에헤헤….”

이미 머리에 열이 올라와 있는데, 가스파르의 손이 닿자 두둥실 행복한 기분이 한가득 차오른다. 가스파르의 목소리, 가스파르의 칭찬, 가스파르의 체온. 게다가 지금은 가스파르도 리오나가 귀엽다는 듯이 활짝 웃고 있다. 너무 행복해서 머리가 녹아버릴 것만 같다.

그전보다도 더 가슴이 두근거리고 온몸이 저릿저릿하다. 가스파르를 지키고 있던 어떤 허물이 무너져버린 것 같다. 리오나의 귓가에 그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리오나의 가슴을 더 세차게 뛰게 만든다. 이제 또 그와 함께 춤을 춰야 하는데, 벌써부터 벅차오르는 감정이 진정되지 않는다.

그가 조금 더 솔직했다면 아까의 반응도 달랐을까? 지금 그의 마음은 어떤 모습일까?

리오나가 한 손을 빼꼼 빼내어 피아노 위에 놓인 가스파르의 잔을 집어 든다. 아직도 와인이 반 잔이나 넘게 남아 있다.

“가스파르, 용도 술에 취할 수 있어?”

“어? 어어. 용도 취할 수 있어. 오직 원할 때뿐이지만.”

그건 정말 멋진 일이다.

“그래? 그럼….”

리오나가 살짝 가스파르의 품에서 벗어난다.

“오늘은 나랑 같이 취해 줘.”

“응?”

그러고는 빼낸 손에 든 와인을 단숨에 들이킨다. 누구 잔인지 무슨 상관이람. 들이켰는데 삼키지는 않는다. 입에 와인을 머금은 채로 가스파르와 입술을 맞댄다.

“하압. 응. 으응.”

“흐읍, 읍….”

와인의 달콤하고 떫은맛이 입안에 퍼진다. 확실히 비싼 와인인지 향이 풍부하고 그윽하다. 그 깊은 맛에 리오나와 가스파르의 맛이 섞인다.

혀와 혀가 얽힌다. 와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핥고 빨아올린다. 머리에 뭉게뭉게 안개가 끼고, 온몸에 힘이 빠진다. 이렇게 달고 맛있는 키스는 둘 다 처음이었다.

몸과 몸도 당연하다는 듯이 맞닿는다. 가스파르의 손이 리오나의 허리를 향한다. 리오나는 가스파르의 다리 사이로 제 다리를 끼워 넣는다.

와인 조금이 두 입술 사이에서 흐른다. 리오나의 턱에서 목, 목에서 가슴골로 붉은 선이 생긴다.

“푸핫, 하아…. 하아….”

“응? 가스파르? 나랑 함께…. 꺄앙?!”

가스파르가 리오나의 허리를 거칠게 끌어안는다. 남은 손으로 가슴까지 주무른다.

열이 얼마나 올랐는지 얼굴까지 새빨갛다.

“아앙. 같이 또 춤추기로 했으면서. 그 연미복이 다 뭐가 돼. 하앙!”

“너 때문이잖아, 리오나. 또 네가 나를….”

진심으로 만들었잖아.

가스파르를 유혹하는 건 언제나 쉽고 즐거운 일이다. 지금은 마음마저 통해 있으니 더욱더. 뭐, 이것도 춤이라면 춤이다. 리오나가 다시 가스파르와 입을 맞춘다. 가스파르가 취한 게 리오나인지 술인지는 알 수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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