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리오나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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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하고 싱그러운 아침햇살이 창문 틈새로 고개를 내민다. 언제 또 밤이 지고 하루가 밝았나.
용의 하루는 빠르다. 아침 해가 기어오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가스파르는 벌써 부스스 몸을 떨며 눈을 떴다. 나른한 상반신을 간신히 일으키고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본다.
이미 수백만 번은 경험한 아침이거늘, 오늘의 아침은 어딘가 달랐다. 장수종이 겪는 필연적인 권태감과 무료함이 없다. 이 반복되는 일상이 따분하지도, 지겹지도 않다.
또랑또랑한 새들의 노랫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와 가스파르의 귓전을 간질인다. 저 멀리 정원에서 졸졸 흐르는 분수 소리가 마음에 평온을 가져다준다.
가스파르는 새삼 방안을 가득 채운 풀과 꽃의 냄새를 느낀다. 풍부하지만 맑고, 향기롭지만 투명하다. 언제나 봐왔던 그 색과 모양까지 새롭고 예쁘다. 꽃을 좋아하게 된 게 언제부터였나. 이 중에 분명 알로와즈가 선물한 꽃이 있을 텐데.
떠오르지 않는다. 가스파르의 눈에는 이제 다른 것이 비친다. 그 꽃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 아직도 가스파르의 손을 꼭 잡은 채인 가냘프고 고운….
“리오나….”
새근새근 곤히 잠든 리오나의 숨소리가 작고 귀엽다. 어젯밤 그녀가 정사에 지쳐 쓰러지기 직전에 청결 마법을 걸어둔 것이 정답이었다. 그녀의 얕은 숨에서 봄꽃처럼 달고 파릇파릇한 향기가 난다.
작지만 오똑한 코, 티 없이 깨끗한 피부와 귀엽고 도톰한 입술까지.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게 내 방에 있나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가스파르가 다시 몸을 뉜다. 이번에는 세로로 누워 팔로 머리를 괴고 리오나를 바라본다.
남은 손으로 리오나의 금색 앞머리를 살며시 간질인다. 부드럽고 윤기가 있다. 계속 만지고 싶다. 뭔가 이런 적이 또 있었는데. 뭐, 아무래도 좋다. 그 아래 매끈한 이마도 찔러보고, 말랑말랑한 귓불도 괜스레 만지작거린다.
“으응….”
리오나는 작게 웅얼거릴 뿐 깨지는 않는다. 그 반응이 또 앙증맞고 사랑스럽다. 괜히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아 스릴이 넘치고 가슴이 콩닥거린다. 이런 시답잖은 일이 왜 이리 즐거운 걸까.
오늘 아침이 이렇게 싱그럽고 신선한 것도 다 리오나 덕분이겠지. 사랑이란 게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렇게 가슴 뛰고 즐거운 것이라면 그녀와 어울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이마에 작게 입술을 맞댄다.
사랑, 사랑, 사랑. 그녀가 말한 사랑이란 게 뭘까. 메이드들도 언제나 침실에서 그에게 사랑한다고 외쳐주었지만, 그녀가 말한 사랑의 무게는 다른 메이드들과 달랐다.
가스파르도 그랬다. 용이든 이종족이든 사랑을 속삭인 적은 많았지만, 그렇게 진심이 담아 사랑을 입에 올린 건 리오나가 처음이었다.
그녀가 나를 사랑해주는 것만큼 자신도 그녀를 사랑해 줄 수 있을까. 이미 자신이 뒤틀고 망쳐버린 그녀인데. 용서받고, 책임질 수 있을까.
애초에 사랑이란 게 뭔데? 무어라고 정의되는 단어인데? 이미 마음과 마음은 맞닿았다. 그 어떤 보석이나 보물보다도 아끼고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 서로의 몸을 어르고 달래는 일이야 질리도록 해왔다.
누군가의 말처럼 사랑이 시간을 함께 나누는 일이라면, 정말 언제까지고 리오나를 사랑해 줄 수 있었다. 어차피 가스파르의 시간은 거의 영원하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천 년이고, 만 년이고 결코 길지 않다.
그렇다면 그 영원 동안 거짓말로 리오나를 기만해야 하나.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다. 때가 오면 진실을 말해야 한다. 온갖 추잡스럽고 더러운 짓으로 너의 마음을 짓밟고 뒤틀어왔다고. 너의 그 마음조차 전부 만들어진 거짓이라고.
더는 자신과 리오나를 속일 수는 없다. 진심에 응하는 방법은 진심뿐이라 하지 않았나. 가스파르는 잠시 동안이라도 거짓으로 도망치려고 했던 자신을 반성한다.
그래도 잠시, 잠시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은 유예기간일 뿐이다. 리오나의 배 속 아이를 위해서라도 기다려야만 한다. 결론을 내리는 것은 가스파르가 아니라 리오나다.
“…….”
후회는 하지 않는다. 설령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해도 변하는 건 없을 거다. 리오나를 얻기 위해서라면 더 한 짓도 할 수 있었다. 남는 건 후회가 아니라 미련. 그것도 더 오래전 과거에 남겨둔 미련.
가스파르가 다시 살포시 리오나의 배에 손을 댄다. 이 아이만큼은 다른 아들들같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따스하고 부드러운 마력을 조금씩 주입한다. 이렇게라도 마음을 전하면 조금이라도 달라질까 생각했다.
이런 가스파르라도 해야 할 일이 있다. 아니,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리오나를 두고 또 다른 종족을 정복하고 조교 할 수는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 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같은 일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건 자신과 그 아이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또 짓는 일이겠지. 이제 더는 그 아이들에게 행복을 약속할 수 없었다. 이미 가스파르의 마음은 다른 것으로 가득 찼으니까.
아일라나 다른 아이들은…. 리오나의 마음이 조금 넓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직 서로가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모든 게 가스파르로부터 비롯된 일이다. 그녀들이 책임을 말한다면 모든 책임이 가스파르의 앞에서 멈추겠지. 어떤 결말이라도 각오는 되어있다…. 고 생각한다.
이 성의 메이드들뿐만이 아니다. 다른 모든 이종족들의 삶이 뒤틀린 이유는 전부 가스파르의 연구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살기 위한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발버둥이 가져온 여파는 너무나 크다.
그 큰 책임에 대한 각오까지는 무리여도, 가스파르 나름의 마무리는 지어야만 한다. 용, 특히나 크라우스와 그 아래 신세대의 용들은 이대로라면 행성의 모든 지적생명체를 게걸스럽게 삼키고 말 것이다.
가스파르도 그 이후를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그때가 되면 용은 또 어떤 모습으로 추한 삶을 유지하려 할까. 파리나 바퀴벌레의 뒤꽁무니나 쫓고 있지 않으면 다행이다.
“하아….”
예전부터 생각해온 마법이 있다. 실험 자료는 부족하지만, 이론은 이미 완벽하다. 원래 그가 일만 년 전에 생각해냈어야 할 마법. 용과 이종족들을 원래 있어야 할 방향으로 이끌 마법.
그 마법으로 이끌 미래에 대한 계획도 있다. 지금은 실행에만 옮기면 된다.
용기도 진취심도 없는 늙은 용은 그저 책임에서 눈을 돌리고 향락을 즐기기에 바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리오나 덕분에 결심이 섰다. 과거를 훌훌 털고 그녀와는 더 나은 미래를 걷고 싶다.
그녀에게 용서받고 죗값을 받는 건 다음 일이다.
가스파르가 아직도 기분 좋게 잠들어 있는 리오나의 코를 집고 콧구멍을 막는다. 점점 새빨개지는 리오나가 재밌다는 듯 웃고는, 못내 아쉽다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킨다.
곧 그가 바라는 소식을 가진 손님이 이 성에 돌아올 것이다. 그 일은 그때부터 시작이다. 제발 이 마음과 계획이 틀리지 않았기를.
잠꾸러기 소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방을 나선다. 일이 잘되면 그녀도 그녀가 바라던 이를 볼 수 있겠지.
가스파르가 찬바람 휘날리는 비행장에 섰다. 조금 전에 해가 떴지만, 공기는 아직 차고 날카롭다.
용의 눈에는 아직도 하늘에 떠 있는 기운 달과 별이 아슬히 보인다. 곧 떠오르는 태양에 다 쫓겨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과 달이 그 자리에서 없어지는 것은 아닐 테다.
여전히 시끄럽고 싱그러운 새소리를 들으며 그런 하늘을 올려다본다. 저 멀리 흰색 용 한 마리가 날아오는 것이 보인다. 마야의 아들 마르크다.
대가족의 막내이자, 가스파르가 가장 어렵게 얻은 아이.
마르크는 어미의 옛 성격을 닮아 누구보다도 책임감 깊고 영민했다. 형들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치면서도 아비인 가스파르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았다. 가스파르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자랑스러운 아들이다.
가스파르의 가정이 단란하지 않다는 건 다른 용들도 다 아는 유명한 이야기다. 나이가 찬 가스파르의 아들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 하고 있지만, 그들은 어디에서나 제 아비의 이름을 꺼내기를 꺼렸다. 교류는 일 년에 한 번, 그것도 반쪽짜리일 뿐인 가족 행사.
그런 만큼 가스파르의 아들들은 크게 경계 받지 않고 다른 군단의 영역이나, 심지어 왕궁까지도 쉽게 출입할 수 있었다. 그들의 힘과 재능은 아비 못지않게 탁월했다. 용의 사회에서 피보다 옅고 느슨한 관계는 없다. 그들을 거부하는 곳은 없었다.
그중에서 마르크만이 아비와 친하다는 건 다른 형제들도 모르는 비밀이다. 마야의 특이한 정신 상태와 위치 때문에 그 아들인 마르크는 그다지 주의를 받지 않았다.
마르크는 버림받은 제 어미를 따스하게 돌봐준 가스파르에게 큰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다. 그가 형제 중 유일하게 아비를 따르는 이유였다.
그는 엘프 암살자였던 어미에게서 받은 재능으로 가스파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알 수 없었던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가 다른 아들들과 다르게 아침 일찍 가스파르의 성을 찾았다. 전할 말이 있다는 뜻이다.
쿵. 마르크가 비행장에 발을 디딘다. 그 등 위에 곤히 잠든 마야의 모습이 보인다. 원래라면 그녀도 다른 메이드들처럼 오늘 점심까지 아들과 함께 할 수 있었겠지만 어쩔 수 없다. 나중에 조금 달래주자.
“북극여우나 토끼는 잘 보고 왔나?”
“덕분에요. 어머니께서는 평생 숲에만 살았다고. 그 숲을 빼앗긴 후에는 수 천 년 동안 용을 피해 땅속에 숨어 살아야 했다면서 그렇게 희고 예쁜 동물들은 처음 본다고 그러시던데요.”
마르크도 이해심이 조금 더 있을 뿐, 성격이 그리 좋지는 않다. 누구 자식 아니랄까 봐.
“…그래서? 그 사랑하는 어미와의 시간까지 쪼개 나를 먼저 만나러 온 이유가 있을 텐데.”
가스파르가 마르크를 올려다본다. 내용은 어렴풋이 예상이 된다. 그래, 그. 아니, 그녀.
“아버지께서 찾으시던 인간…. 핀 모리츠를 찾았어요. 지금은 기헨의 옛 수도 지하에 있고. 곧 왕궁으로 보내진다고.”
그녀부터가 시작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