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의 화원-38화 (38/62)

〈 38화 〉 핀 (1)

* * *

최악의 기분으로 눈을 떴다.

축축하고 비릿한 냄새. 도시 뒷골목 바닥에서나 나는 역겨운 냄새에 버티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지난 일 년 동안 끔찍한 잠자리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다. 차고 딱딱하다. 자다가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것처럼 온몸이 쑤시고 아프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다.

지금은 언제고, 여기는 어디지.

조금씩 어둠에 적응한 동공에 살풍경한 풍경이 비친다. 무성의하게 짜맞춰진 돌바닥과 쇠창살. 방구석에는 다 헐어버린 가죽과 찢어진 천이 나뒹군다.

지하 감옥, 아니 정확히는 반지하 감옥이라 해야 하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난 작디작은 쇠창문으로 한 줄기 달빛이 스며들어온다. 그 빛은 옅고 흐리다. 이곳에서 달은 너무나도 멀다.

“이제야 눈을 떴나?”

스산하고 메마른 정경에 어울리지 않는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분명 옥구슬이 구르는 것처럼 투명하고 깨끗한 목소리지만, 이 쓸쓸하고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지는 꼴이 어딘가 허망하고 공허하다.

두 겹의 쇠창살 너머 맞은 편에 금발의 여인이 보인다. 어둠 속에서도 희고 고운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가 보인다. 금발은 길게 늘어져 바닥에 닿았고, 이쪽을 노려보는 눈에는 감히 범접하지 못할 투지와 생명력이 깃들어있다.

“이런 상황에 태평하기는.”

이상하다. 귀가 뾰족하다. 체격과 몸짓까지 어딘가 인간 같지만 인간 같지 않다. 대체 누구지. 인간이 아닌 건가.

“당신 누구야. 어…? 어?”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뗀 순간 놀란 것은 그녀가 아닌 나 자신이었다. 눈앞의 여인과 같은 맑고 청아한 소리. 평생 들어왔던 자신의 목소리라고는 절대 생각되지 않는 높고 밝은 소리.

“아, 아아.”

몇 번이고 다시 들어도 똑같다. 낮고 뭉툭한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다. 뭐야. 왜? 도대체 무슨 일이….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난다. 머리가 아프다. 자신은 누구고, 지금껏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그리고 남은 마지막 기억은….

“으윽!”

몸을 크게 움츠린다. 손끝에 닿는 위팔이 부드럽고 물렁하다. 모든 감각이 낯설고 두렵다. 다부졌던 근육과 갖은 생채기로 거칠어진 피부는 온데간데없다.

제 몸을 보기 위해 아래를 내려다보자 시야를 가리는 큰 두 덩어리가 보인다. 어지럽다. 이런 몸으로 어찌 갑옷을 입고 칼을 든단 말인가. 그나마 몸을 가려주는 흰 거적때기마저 없었다면 그대로 정신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 마지막 기억. 상관이자 친우인 레온하르트와 함께 숲을 향해 달렸던 기억. 이미 둘에게는 의지할 국가도, 지킬 백성도 없었지만, 그저 용을 피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인간의 훗날을 위한 일이었나, 아니면 그저 살고 싶어서 달린 것이었나. 이제 와 다 의미 없는 일이다.

도화색 가스가 그 둘을 가로막았다. 순식간에 정신이 날아가고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몸이 쪼그라들고 뒤엉키던 감각. 일그러지는 정신 속에서 우리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그렇게….

“새 몸에 대한 감상은 그 정도로 하지.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네.”

여인의 차분한 목소리에 정지했던 사고가 되돌아온다. 그래, 어차피 거울도 없는 이곳에서는 얼굴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 우울한 회한과 감상이 아직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지만 떨쳐내야 한다.

주제넘게도 사람을 이끄는 자리에 있었다. 이 목숨과 이름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다.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몸의 형태 따위는 상관없다. 레온하르트와 다시 만나 그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사람들을 구원해야 한다.

끔찍하고 절망적인 상황이어도 앞을 보고 나아가야 한다. 그게 레온하르트가 알려준 나에게 알려준 삶의 유일한 방향이다.

크게 심호흡을 한다. 억지로라도 제정신을 차린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당신 누구야.”

“하, 또 그건가. 그럼.”

여인은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손가락을 제 관자놀이에 찔러넣는다. 푸욱. 마치 푸딩을 찌르는 것처럼 손가락이 쑤욱 머리를 관통한다.

동시에 그 여인을 둘러싼 공간이 일그러진다. 여인의 살이 끈적끈적한 액체처럼 흘러내린다. 살과 살 사이에서 기묘한 광채가 흘러나온다.

“뭐, 뭐뭐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안 그래도 놀랄 일이 한두 개가 아닌데 이건 또 뭔가. 용이 기헨의 상공에 나타난 이후, 세상은 갑자기 온갖 기이하고 괴상한 일로 가득 차버렸다.

빛이 멎었다. 흘러내린 살은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쇠창살 너머 여인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고, 한 남자가 여인이 있던 곳에서 똑같이 이곳을 바라보고 있다.

같은 금발, 뾰족한 귀. 희고 고운 피부와 타오르는 눈빛까지. 성별은 다르지만 그녀가 그고, 그가 그녀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미안하네. 아까 모습은 용들을 속이기 위한 변장 마법이었네. 그릇인 척하는 게 경계를 덜 받아서 말이야.”

다부진 체격에 걸맞은 낮고 굵은 목소리. 균형 잡힌 자세와 언뜻 보이는 근육까지. 이 녀석 실력자다.

게다가 그런 변장 마법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라 해도 그런 완벽한 모습으로 자신을 꾸미지는 못할 거다. 역시 인간이 아닌가. 그릇? 그릇은 또 무슨 소리야.

그렇다면 용? 용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직접 그 모습을 본 적은 없다. 게다가 진짜 용이라면 나와 같은 처지로 감옥 안에 갇혀있을 이유가 없을 텐데.

“나는 에이든. 그대들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멸망한 종족 엘프의 생존자이자 암살자일세. 그대의 이름을 알고 싶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손을 내민다. 결코 닿을 리 없는 거리지만 그 나름의 친애의 표시처럼 보인다.

“구태여 다시 말하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정말 얼마 되지 않아. 나에게는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있네. 그 방법을 실현하려면 그대의 힘이 필요해.”

엘프? 생존자? 멸망한 종족? 또 나타난 새로운 정보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여전한 옅은 달빛이 둘을 비춘다.

침략자 용의 얼굴과 치욕스러운 마지막 기억이 떠오른다. 살아나가야 한다. 이대로 끝날 수는 없다. 이 여린 몸으로 단단한 쇠창살을 빠져나가는 일은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눈앞의 그라면.

실제로 그만한 마법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는 어느 정도 마법의 소양이 있다. 어차피 내가 이 몸으로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믿음 없이 시작되는 일은 없다. 나는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나는 인간의 왕국 기헨의 근위대 부대장이자 레온하르트의 친구 핀 모리츠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대와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지혜와 그 방법이라는 게 무엇인지 듣고 싶네.”

“좋지.”

그렇게 기묘한 이종족 친구가 한 명 새로 생겼다.

저벅저벅저벅.

낮은 발소리가 들린다. 주황색 횃불이 점점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찰랑찰랑. 발소리에 맞춰 허리춤에서 찰랑거리는 열쇠 소리도 들린다.

순찰하러 온 용일 테다. 에이든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쳐 신호를 보낸다.

부끄럽지만 해야 한다. 마음을 다잡자.

“꺄아아아아악!”

갑작스러운 고성이 고요한 감옥을 깨운다. 발소리가 빨라진다. 횃불을 든 사람 두 명이 다급한 표정으로 내 방 창살 앞에 선다.

몸 곳곳에 용의 비늘이 보이고 한 명은 꼬리와 뿔까지 있다. 어딘가 어설프고 어리숙해 보인다. 저게 정녕 그 두렵고 무시무시한 용의 인간 모습일까. 아무튼 나는 해야 할 연기를 한다.

“뭔 소란이냐, 인간.”

“배갓, 배가앗….”

배를 부여잡고 땅을 구른다. 최대한 애달프고 앓는 소리를 낸다. 어색한 표정을 숨기기 위해 땅에 머리를 박는다.

“하, 이 년이 먹은 것도 없으면서 지랄이야, 지랄은. 야, 너. 또 그러면…. 응? 뭐.”

“야야, 아니. 이 년 그 크라우스 님이 말해 두신 년 아니냐. 만약 잘못되면 좋게 안 끝난다고.”

“어휴, 또 그러네.”

일이 잘못되나 싶었는데 다행이다. 그나저나 크라우스는 또 누구야. 일어나자마자 하루 종일 의문투성이다. 투닥거리는 두 용 등 뒤, 에이든이 어둠 속에서 몰래 마법진을 그린다.

“야, 잠깐 이리 와봐.”

앞에 선 용이 손짓한다. 물론 다가갈 마음은 없다.

“아, 아파앗….”

“굴러서라도 오라고!”

“야야, 그러니까 좀…. 어…?”

“쫄보 새끼, 너 하다못해 인간 년한테…. 아…?”

두 거체가 스르르 쓰러진다. 털썩. 그대로 복도 위에 나란히 눕는다. 마치 죽은 것처럼 요동도 하지 않는다. 짤랑. 열쇠와 돌바닥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잠깐 잠재웠네. 그리 오래가지 않아.”

에이든이 손에 염을 담아 열쇠를 공중에 띄운다. 솜씨 좋게 두 방의 잠금을 푼다. 나도 땅에 처박았던 머리를 들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연기 잘하던데.”

“시끄러워.”

복도로 나와서야 알았다. 이곳은 기헨의 지하감옥이다. 장기 복역을 위한 감옥이 아니라, 사형수가 공개 사형을 기다리거나, 흉악범이 조리돌림당하기 직전 잠시 들리는 곳이다.

창살 안으로는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여태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체 왜 자신이 수도로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곳 위치를 안 것만으로 큰 수확이다.

에이든의 말대로 시간이 얼마 없다. 감옥 안 창에 비친 달과 별이 밤의 끝을 알리고 있다. 해가 뜨면 일이 이상해진다. 서둘러야 한다.

“서둘러야 해. 기척으로 봐서는 저 둘뿐만이 아니야. 길은 내가 알아.”

“그래. 이번에는 내가 자네를 믿겠네.”

그렇게 에이든과 같이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야, 야! 뭐야, 너희들!”

입구 계단을 급히 내려오는 또 한 쌍의 용인이 보인다. 벌써 들켰나. 기척을 알아차리는 건 저들의 특기이기도 하다.

“하아….”

작은 감옥에 출입구 말고 도망칠 곳은 없다. 저항할 수단도 없다. 우리의 탈옥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나. 인간의 모습이라 해도 용은 용일 터다. 아무리 에이든이라 해도 이렇게 정면으로 맞닥트리면 승산 따위 없어 보였다.

“핀 모리츠라고 했었나.”

“어? 어.”

“그럼, 모리츠 양.”

에이든이 떨어진 횃불을 집어 든다. 마치 검이라도 쥔 것처럼 앞장서 자세를 잡는다. 그런 장난감 따위 용의 비늘에 통할 리 없을 텐데도.

“잠시 그렇게 내 뒤에 서 있게.”

횃불이 이글거린다. 눈의 착각일까. 그렇게 말하는 에이든의 뒷모습이 횃불보다도 더 밝고 환하게 이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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