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의 화원-39화 (39/62)

〈 39화 〉 핀 (2)

* * *

횃불의 불길이 점점 세지는 것 같더니 더 크고 푸른 빛이 되어 에이든의 양팔을 감싼다.

순식간에 바싹 타버린 나무막대가 숯이 되어 바닥에 떨어진다. 한 용이 계단을 내려와 위를 향해 뭐라 고함을 지르며 이쪽을 손가락질한다.

거리를 두고 뒤에 선 나한테까지 그 열기가 느껴지는데, 에이든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탄탄한 근육이 둘러싼 두 팔을 창염의 갑주가 보호한다.

마력은 생명력. 생명이 깃든 것에는 물론이고, 생명이 깃들지 않은 물과 공기에도 섞여들어 있는 그것. 횃불은 그저 기폭제였을 뿐, 화염은 이제 에이든의 마나를 태우며 저 스스로 살아 숨 쉰다.

마법의 중요함과 그 원리는 사관학교에서 질리도록 들었다. 나는 언제나 나보다 앞섰던 레온하르트를 조금이라도 앞지르기 위해 마나의 구조와 마법의 원리를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마력이 생명력이라면, 마법은 그 생명력을 불태워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만드는 일. 모순 없는 논리와 틀림없는 계산만 있으면 무슨 일이라도 가능하다.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일부터 한 생명의 성별을 뒤바꾸는 일까지.

레온하르트도 마법에는 약했다. 그를 따라잡을 수 있다면, 그의 옆에 설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다.

이 년간의 노력 끝에 깨달은 건 나 자신도 그와 같이 마법에 소양이 없다는 사실 뿐. 나는 작은 불길 하나, 얕은 바람 하나 일으키지 못했다. 분명 이론은 완벽했을 텐데. 계산과 함께 제 생명력을 불태우는 일은 고도의 정신력과 육체적 소모를 동반했다. 나약한 나로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나는 결국 검사는 검을 들어야 한다고 자위하며 또 그의 꽁무니만 쫓았다. 그가 나를 부장으로 임명한 이후로도 변한 건 없다. 정말 내가 그의 부장으로서 옳은 인물인가 아직도 의문이 든다.

지금 에이든은 꺼져가던 횃불을 창염으로 바꾸어 팔에 두른 채 용과 대치하고 있다. 위에 있던 용도 내려와 또 두 명의 용이 우리 앞에 섰다. 용들도 에이든의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건지 섣불리 다가서려 하지 않는다.

“후우…. 하앗!”

집중을 마친 에이든이 두 손을 활짝 편다. 그의 손동작에 맞춰 창염으로 이루어진 마법진이 허공에 펼쳐진다. 불길은 불길을 부르고, 한순간에 펼쳐진 수없이 많은 마법진이 두 용을 사방에서 둘러싼다.

타오르는 마법진이 저와 같은 창염을 내뿜는다. 어마어마한 열기가 지하감옥 안을 가득 채운다. 빛과 불길 때문에 용의 거구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아아….”

그 놀라운 광경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온다. 인간은 통달한 마법사라 해도 이런 대단한 일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저 거리의 어릿광대 같은 잔재주나 잠깐 부릴 뿐. 우월감과 자존심만 셌지, 그들은 왕가의 지원이 없으면 자신의 삶조차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는 밥버러지에 지나지 않았다.

평화롭던 기헨에 살던 나로서는 마법의 중요성을 역설하던 전략서와 교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마법에 대한 열렬했던 관심도 사그라들었다. 마법은 일상을 사는 평범한 인간들의 관심 밖 영역이었다. 용이 부리는 불과 번개에 지져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건 공포였고 학살이었다. 실제로 죽은 사람이 많건, 적건 상관없다. 닿지 않는 하늘에서 행해지는 일방적이고 압도적인 폭력은 인간에게 트라우마를 쑤셔 박기 충분했다.

그런데 지금 에이든은 그런 용을 둘이나 상대하며 전혀 물러서지 않고 있다.

엘프. 그런 종족은 처음 들었다. 그건 정말 인간과 함께 살아가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종족인 걸까. 아니면 우리에게 닥쳐온 또 다른 위협에 지나지 않을까.

“헛짓거릴…. 흐읍!”

용의 발톱이 허공을 가른다. 그 엄청난 속도와 질량에 창염의 거센 불길이 갈라진다. 감옥 안의 분위기가 일변한다.

그 거센 불길에도 불구하고 옷만 조금 그슬렸을 뿐, 용은 몸은 멀쩡하다. 역시 저들의 몸은 정상이 아니다.

사람의 팔 끝에 달린 용의 발톱이 흉측하고 볼썽사납다. 좁은 감옥에 맞춰 몸을 조금만 변형시킨 건가.

앞서 선 용이 그대로 에이든에게 뛰어든다. 그 거체가 좁은 일자 통로를 움직이는데, 나의 눈으로도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매끄럽고 날렵하다.

마치 번개가 친 것처럼 빠르고 압도적이다. 크고 날카로운 발톱이 에이든의 목을 향해 육박한다.

“크윽!”

에이든이 화염을 두른 양팔로 간신히 몸을 지킨다. 발톱에 튀긴 창염이 세차게 타오르며 용에게 불길을 내뿜지만, 용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힘의 차이는 역력하다. 힘으로 찍어 눌린 에이든이 질질 뒤로 밀려난다. 뒤의 용은 에이든이 깔아둔 마법진을 다 찢어발겨 버렸다. 복도가 좁아서 다행이지, 바로 이 대 일의 상황이 만들어졌다면 에이든도 나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다.

“에, 에이든!”

오늘 처음 본 그가 나를 지키며 용과 이렇게 용맹스럽게 싸우고 있는데 자신은 대체 무얼 하고 있나. 여린 여자아이처럼 뒤에서 남의 보호나 받는 꼴이라니. 이래서야 정말 마을 아녀자 같지 않은가.

아무리 현실을 부정해도 이 몸으로는 그의 짐 덩이밖에 되지 않는다. 하다못해 내 몸이 멀쩡하기라도 했으면…. 했으면?

했으면 뭐가 달라지나? 용에겐 검도 창도 듣지 않는다. 저 창염에 견딘 것을 보면 인간의 모습도 똑같을 것이다. 예전의 자신이라 해도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 뻔하다. 괜히 나서다 에이든의 발목이나 잡지 않으면 다행이지.

나는 군인으로서는 국가는 물론이고, 백성과 가족도 지키지 못한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내가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나는 결국 친우마저 지키지 못했다.

이미 이 일 년간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는가? 용에게는 대적할 수 없다. 설령 그 같은 이종족이라도 해도 변하는 건 없다.

에이든은 벌써 두 용이 쓰러진 장소까지 밀려났다. 뒤에 선 용도 점점 다가오고 있다. 패색이 짙다. 만약 그가 쓰러진다면 나는.

그에게 속아 넘어갔을 뿐이라고 고개를 조아려야 하나. 미천한 인간이 주제넘게 탈옥을 하려 했다며 빌어야 하나.

죽고 싶지는 않다. 설령 여자의 몸으로 노리개가 된다고 하더라도 죽고 싶지는 않다. 살아야 한다. 살고 싶다. 아직 나는 하지 못한 게 많다. 누리지 못한 게 많다. 이런 식으로 끝나고 싶지 않다.

비열하고 비참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찬다. 나는, 나는…. 또 거짓으로….

“핀! 떨어진 나무막대와 천을!”

밀려난 에이든이 소리를 지른다. 지금 당장이라도 용의 발톱이 그의 목을 꿰뚫을 것만 같다.

그의 발밑을 나뒹구는 숯덩이가 보인다. 천? 천이라면 내가 걸친 이 헌 천 쪼가리 말고는 없다.

이미 다 타버린 나무막대와 천 쪼가리를 대체 뭐에 쓰려고. 하지만 생각보다는 몸이 앞섰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떨어진 나무막대를 쥐어 들고, 몸에 걸친 천을 홀랑 벗고 그에게 던진다.

나는 이미 그를 믿었고, 그는 그런 나를 믿겠다고 했다. 적어도 지금 나의 몸은 그를 믿었다.

에이든의 왼손을 둘러싼 화염이 갑자기 물과 바람으로 변화한다. 동시에 그가 오른손의 손의 힘을 쥐어짜 용의 발톱을 간신히 흘려낸다.

잠깐 생긴 시간의 틈새에 그가 잽싸게 나무막대를 잡아챈다. 물과 불이 바람과 재와 만난다. 문외한인 나의 눈에도 그의 마나가 폭발하는 것이 보인다. 에이든은 말 그대로 제 몸을 불사르고 있다.

큰 펑 소리가 나며 에이든의 손끝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주위가 섬광과 연기로 가득 찬다. 거의 밀폐된 거나 다름없는 지하 감옥은 바로 코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된다.

좁은 감옥을 가득 채운 연기에 비해 작은 창 하나에서 흘러들어오는 달빛은 너무나도 옅고 얕다.

에이든의 기척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정말 이 장소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이 앞에 있었는데. 아무리 보이지 않는다지만 이상하다. 그래, 그의 본업은 암살자. 아까 같은 화염 마법보다 기척을 지우는 은신 마법이 특기 일터다.

“뭐야!”

“이 쥐새끼 어디 갔어!”

예민한 감각을 가진 용들도 당황하며 양팔을 휘적인다. 나는 그 팔에 휩쓸리지 않게 최대한 몸을 낮춘다. 에이든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사위를 가득 채운 매캐한 냄새에 코를 막고 생각한다. 설마 이 틈에 저 혼자 도망가려는 건 아니겠지.

“으, 으응? 이건 또 뭐야?”

용들의 발에 이미 쓰러진 두 용의 몸이 걸렸나 보다. 툭툭 소리가 난다. 뒤에 있던 용도 다 다가온 건지 두 발소리가 가깝다. 그렇다는 건….

눈에 익은 마법진이 어둠 속에서 다시 피어오른다. 그 위치나 모양도 알고 있는 나의 눈에도 아주 어렴풋이 보이는데, 발치에 정신이 팔린 두 용에게 보일 리가 없다. 에이든은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어, 어어….”

“아? 아….”

털썩.

거대한 네 그림자가 겹쳐진다. 다소 어이없는 마무리다. 에이든은 애초부터 싸우는 것보다 이런 기발하고 정신을 헤집는 마법에 재능이 있었겠지. 용들이 쓰러지자 주위를 가득 메운 연기도 사그라든다. 나도 벽에 손을 기대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에이든이 감옥 구석에서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한 모습이다. 아주 잠깐 못 본 것 같은데 벌써 그 모습이 반갑고 정겹다.

“에이든, 너 정말….”

“고맙네, 모리츠 양! 그대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정말 위험할 뻔했네!”

그가 환한 얼굴로 나에게 달려온다. 들뜬 목소리로 내 말을 자른다.

“아, 아니. 내가 뭘 했다고.”

기지를 발휘한 건 내가 아니라 에이든이다. 나는 그저 보호받는 위치이면서도 그를 믿지 못하고 의심만 했는데. 상황이 나빠지자 비겁하고 비열하게 그를 버릴 생각까지 했는데.

“아니네.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용 앞에서 용기를 낸 것만으로 대단해. 자네가 아니었다면 정말 위험할뻔했어.”

에이든은 그러면서 내 두 손을 꼭 잡아 온다. 그가 그럴수록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내 가슴을 가득 채운다. 나와는 다른 시원시원하고 대범한 모습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처음 본 이미지와 조금 다르다.

애초에 뭐가 위험했다는 거야. 그 실력이라면 나를 버리고 혼자 탈출하는 일 따위 간단했을 텐데. 조금 전만 해도 얼마든지 혼자 빠져나갈 수 있었을 거다.

“아무튼 지금은 시간이 없네. 길을 안다고 했지. 먼저 잠든 둘이 깨어나기 전에 어서 나가세.”

“어, 어…. 그러지.”

에이든이 그렇게 두 손을 꼭 잡은 채로 나를 이끈다. 연약한 나의 몸은 하릴없이 그에게 끌려간다.

조금 조심성 없고 배려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에게 끌려가는 그 감각이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무튼 목숨의 은인이다. 아직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그와 함께라면 조금 안심이 된다.

수도는 이미 완전히 점령당했을 거다. 탈출하려면 예전처럼 지하 통로를 이용해야 한다. 나는 부디 그 통로가 아직 멀쩡하기를 바라며 바쁘게 에이든의 뒤를 쫓았다.

“아, 맞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