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핀 (3)
* * *
“자네 아직 알몸 아닌가.”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내가 걸치고 있던 헌 천 쪼가리는 재가 되어 산화했다고.
“아, 그렇지.”
그러고 한동안 서로가 서로를 빤히 바라본다. 에이든이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 펄쩍 뛴다.
으음…. 이 몸은 어딜 보나 여성의 몸이고, 눈앞의 에이든은 누가 봐도 남자니까. 일단 나도 놀라고 부끄러워해야 하나. 하아, 이것 참 애매한데.
진짜 숙녀였다면 여기서는 꺄악 소리를 지르며 잽싸게 몸을 움츠렸겠지. 하지만 나는 전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그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니 역겹고 토가 쏠린다.
“아, 그렇지. 가 아닐세! 것, 좀, 그, 허. 아이고…. 일단 아무것이나 가져와 몸을 가리게. 어찌 되었든 지금은 숙녀의 몸이 아닌가.”
에이든이 고개를 돌리고, 한 손으로 눈을 가린다. 남은 한 손으로는 손사래까지 친다. 아니, 뭐, 그럴 것까지야.
새삼 잊고 싶은 사실을 들었다. 불씨도 다 꺼지고, 밤은 아직 어두운데, 엘프의 눈에는 내 몸이 또렷하게 보이나 보다.
그러고 보니 제 몸이 송두리째 바뀌었는데 나는 아직 제대로 확인조차 못 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나는 손으로 제 몸의 이곳저곳을 만져 본다. 몸의 어디를 만지던 보드랍고 매끈하다. 으으…. 정말 이상하고 신기한 감각이다.
가슴에는 풍만하고 튼실한 유방이 달렸다. 도대체 얼마나 큰 건지 어깨가 무겁고 걷기가 불편할 정도다.
엉덩이를 잡으면 탱글탱글하면서도 몰캉몰캉한 모순 된 탄성이 손끝에 되돌아온다. 새로운 내 몸이 이렇게 있는데, 제대로 보이질 않으니 괜히 이상한 생각만 든다.
생각해보니 여자가 되었는데 키가 줄어든 느낌은 없다. 나는 체격 조건이 있는 근위대 중에서도 꽤 큰 편이었는데. 그 키가 그대로라면 이거 여자로서는 너무 크지 않나? 잡히는 것들의 무게를 생각하면 균형은 그리 나쁘지 않아 보이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마지막, 여자임을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는 부위로 손을 뻗으려 하자.
“아아아악! 그러니까! 좀! 가려! 가리라고! 자넨 아직 숙녀로서의 자각이 없는 건가!”
에이든이 소리를 지르며 감방 구석에 나뒹구는 헌 가죽을 집어던진다. 뭐야, 안보는 척하면서 다 보고 있었나. 나는 바로 엊그제만 해도 남자였는데, 벌써 자각이니 뭐니 해도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다.
애초에 에이든이나 나나 속은 남자고, 남에게 받은 몸 따위 보여주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다.
어쨌거나 확인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그 가죽을 받아든다. 에이든이 계속 이 상태면 탈출하는 데 곤란할 테니.
킁킁. 이거 쥐똥 냄새가 나는데, 어휴, 정말이지….
나는 역겨운 냄새가 나는 가죽을 대충 구겨 입었다.
“빨리 가세. 이젠 정말 저들이 깨겠어.”
이것저것 참 말도 많다. 왜인지 조금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자네가 호들갑만 안 떨었어도 지금쯤 밖이었을 텐데.”
“말이 어떻게 그렇게 되나! 용의 그릇이라 해도 일단은 숙녀의 몸. 나체로 밖을 다니다니 언어도단이네, 언어도단!”
허, 내가 상관없다는 데도 그러네.
에이든이 그리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지만, 그 어투나 여자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고지식하고 고리타분하다.
엘프는 어느 정도 오래 사는 종족이고, 에이든은 지금 몇 살이지. 실력을 봐선 인간보다 오래 사는 건 확실해 보이는데.
뭐, 에이든에게 그에 대해 들을 기회는 또 있을 것이다. 당장은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가자.
다행히 하늘은 아직 어두웠다.
지하 감옥에서 벗어나 골목 구석에 몸을 숨긴다. 밤공기가 차고 날카롭다. 쥐똥 냄새나는 가죽은 열을 지키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 년 만에 본 수도에 감회가 새롭다. 저기서 저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더 걸으면 그립고 또 그리운 내 집이 나타날 터였다. 내가 아무리 그립다 해도 그곳에 돌아갈 수는 없겠지. 그 집도, 이 도시도 이제는 인간의 것이 아니니까.
저 멀리 도시의 중앙에 함락당한 성과 왕궁이 보인다. 저 고풍스러운 왕궁은 평소라면 창문에서 환한 빛을 새어 나오게 해 도시 전체에 그 권위와 위신을 드러내었겠지만, 지금은 작은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다.
지금 저 성과 왕궁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용이 세운 가짜 왕과 권신들? 용들이 다 같이 들어 서 있으면 어쩌나.
거리를 밝히는 마법석도 다 불이 꺼져 있다. 길을 나다니는 사람도 하나 없다. 새벽이긴 하지만 번영과 평화를 상징하던 기헨의 수도가 이렇게까지 조용하다니. 새삼 왕국이 망하고 수도를 빼앗긴 것이 실감이 간다.
집들은 다 텅 비었는지 작은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원래 있던 주민들은 다 어디로 간 거지.
괜스레 남은 가구와 재화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하, 이런 옛 버릇은 버려야 하는데.
에이든도 제법 신기하다는 듯이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본다.
“이게 자네들 인간의 도시인가. 이거 참 쓸쓸하구먼.”
에이든이 혀를 찬다. 그리 좋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원래 이런 도시가 아니라고 항변하려 했지만, 쓸데없는 사족이라 말을 참았다.
에이든과 함께 건물과 건물 사이를 걷는다. 길을 아는 내가 방향을 정하면, 몸을 숨기는 방법을 아는 에이든이 주위를 둘러보고 정확한 경로와 계획을 짠다.
도시는 조용하지만, 아까처럼 도시 곳곳을 순찰하는 용들이 언뜻언뜻 보인다. 만약 잡힌다면 아까와 같은 요행을 바랄 수 없다. 최대한 몸을 숨기며 거북이처럼 천천히 나아간다.
도시의 어디를 가나 사람의 그림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무겁다. 낮이건 밤이건 상관없이 생기가 넘치던 도시였는데. 겨우 일 년 만에 이렇게….
“우리 엘프들이 살던 숲도 이렇게 용들에게 함락당하고 죽은 숲이 되었지. 그들이 휩쓸고 간 곳에는 풀도 나무도 자라지 않았어. 그들은 그들의 그릇과 자신들의 영생을 위해 점령한 땅의 모든 생명과 마나를 착취해 하늘로 가져갔지.”
유난히 높고 반듯한 건물의 그림자에서, 에이든이 갑자기 그런 소리를 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왜 이곳에 있는 걸까. 엘프는 내가 지금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종족인데. 그 종족의 암살자라는 놈이 대체 왜 인간 왕국의 수도 지하 감옥에. 그것도 용에게 함락당하고 일 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나도 도화탄을 맞고 난 이후의 기억이 없다. 그 치욕스러운 경험 끝에 정신을 잃고 눈을 뜨니 바로 그 지하 감옥이었다. 그렇다면 그도 비슷하게 정신을 잃은 걸까. 나와 다르게 몸은 멀쩡한데.
다시 어둠을 틈타 대로를 가로지르고 담벼락 그림자 속에 숨는다. 이건 재수 없던 귀족 프린츠의 저택 담벼락이지만 지금은 도움이 되었다.
…그 녀석의 현재를 상상하니 뒤통수가 조금 송연하다. 좋지 않은 예감에 온몸의 털이 바짝 선다.
“에이든. 나도 그렇다지만 자네는 대체 왜 그 지하 감옥에…?”
같이 벽을 등지고 나아가며 에이든에게 물었다. 주위에 용의 기척은 없다. 이 정도 정보공유는 탈출을 위해서도 필요하겠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내 마지막 기억은 용에게 끔찍한 생체실험을 당하다 정신을 잃은 것이었어. 그러고 눈 떠 보니 그곳이었네.”
역시 비슷한가. 생체 실험? 용들은 그런 짓까지 하는 건가.
“아까 들은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대들도 우리 엘프와 같은 길을 걸었나 보군. 강인한 발톱과 그 생명의 성별을 뒤바꾸는 마법. 우리도 숲 사람의 명예를 걸고 끈질기게 버텼지만, 멸망을 피할 길은 없었지. 자네들도 그렇지 않나?”
“그래. 용들이 나타나자마자 수도는 순식간에 함락당했고, 왕은 사로잡혔지. 나는 친우와 함께 패잔병과 피난민들을 모아 용을 피해 각지를 떠돌았어. 결국 일 년 만에 나도 이런 꼴이 되고 말았지만.”
치욕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군인이 나라를 빼앗겼다는 말을 하다니. 그나저나 용들의 횡포는 인간만을 향한 게 아니었나. 다른 종족에까지 마수를 뻗었었다고?
에이든은 오랜 과거를 회상하는 것처럼 잠시 허공을 바라본다.
“일 년…. 나는 세계수가 쓰러지고 이천 년 동안을 그림자 속에서 살았네. 평생을 같이한 동지들과 함께 용들의 치세를 무너트리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또 엿봤지. 세계수와 함께하던 날들에 비하면 정말 모멸과 고통의 연속이었어. 그래도 힘을 합쳐 성과를 낸 적도 있었지. 결국 그 일 때문에 나는 사로잡히고 말았지만…. 마야, 에반. 나는 그들이 아직도 엘프를 위해 헌신하고 있을 거라 믿네.”
“에이든….”
이천 년. 인간인 나로서는 정신이 까마득해지는 시간이다. 통일 왕국 기헨도 세워진 지 삼백 년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하는 말로는 엘프가 용에게 굴복한 건 이천년보다도 훨씬 더 오래전 일 같았다.
옛 친구의 이름을 담는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그립고 또 그립겠지. 목숨을 걸고 뜻을 같이한 동지였을 테니까. 이루지 못한 꿈과 서글픈 회한이 그 목소리에 모두 담겨있다.
그와 같이 나에게도 뜻을 같이하기로 맹세한 친우가 있다.
레온하르트. 끝까지 뜻을 같이하다 함께 도화탄에 쓰러진 나의 친구.
그도 나와 같이 여성의 몸으로 변해 온갖 고초를 겪고 있을 터였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찾아 구해내고 싶다. 다시 같이 뜻을 모아 이 용의 지배를 끝내고 싶다.
무의식적으로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무른 손바닥에 날카로운 손톱이 박힌다. 단단하고 다부졌던 주먹은 온데간데없다.
레온하르트, 대체 너는 지금 어디에…. 희박한 별빛에 부디 그 몸과 마음이 성하고 상처 없기를 빌어본다.
“…….”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아무 의미없는 짓은 그만 두자.
괜찮다. 레온하르트는 나 따위보다 훨씬 더 올곧고 정의로운 녀석이니까. 항상 주위를 밝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녀석이니까. 그의 부장일 뿐인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제대로 역경에 맞서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쪽에서 먼저 나를 구하러 찾아올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에이든과 함께 살아서 이 수도를 빠져나가는 것부터 생각하자.
나는 마음을 다잡고 뒤에서 나를 따라 걷는 에이든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 투박한 손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자네의 친우들은 지금도 용의 폭정을 끝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거고, 이곳에서 도망치면 사람 둘이 잠시 몸을 숨길 곳은 분명 있을 테니까. 지금은 우울한 회한에 잠기기보단 앞을 향해 나아가자.”
“…고맙네. 엘프인 내가 인간에게 가르침을 받을 줄은 몰랐군.”
에이든이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한다. 그 목소리는 더는 떨리지 않았다.
종족은 달라도 그는 꽤 올곧고 바른 마음의 소유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괜한 말만 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한마디 또 해줄까 했지만 이번에는 참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