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의 화원-41화 (41/62)

〈 41화 〉 핀 (4)

* * *

빼꼼.

수도 기헨의 뒷골목.

한 쌍의 인간과 엘프가 건물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머리만 내놓고 대로의 상태를 살핀다.

동이 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잠에 빠진 거리는 쥐죽은 듯이 고요하다. 순찰하는 용 말고도 이른 하루를 시작하는 용의 모습이 이곳저곳에 보이지만, 전부 이쪽을 눈치챈 기색은 없다.

이미 우리의 탈옥이 알려졌을 법한데. 아직 쫓아오는 이는 없다. 에이든이 걸어준 기척을 지우는 마법 덕분인가.

하지만 진짜로 동이 트면 더는 몸을 숨기지 못할 거다.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한다. 제길, 이놈의 지하 통로는 왜 또 이렇게 먼 거야.

“저기, 모리츠 양? 미안하지만 정말 이 길이 맞는 건가?”

에이든이 속삭인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겨우 일 년이 지났을 뿐인데 기헨의 수도는 크게 바뀌어 버렸다.

처음 보는 건물이 곳곳에 섰고, 익숙했던 건물은 용이 헐어버렸는지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길이라도 변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운이 없었으면 꼼짝없이 길을 잃었을 판이었다.

그래도 이 대로만 건너면 이제 그 지하 통로다. 이제 그 숲은 안전하지 않겠지만, 용이 득실득실한 이 수도보다는 낫겠지.

“바로 저 앞이야. 저 허름한 창고 구석에 난 계단으로 성 밖으로 나갈 수 있어.”

에이든의 의심을 불식시킨다. 자신 있게 말했지만 그리 확신은 없었다. 원래 있던 창고 말고도 집이 몇 채 더 생긴 것 같은데…. 통로가 있는 창고가 어디지. 가운데인가.

확인하기에는 주위가 너무 어둡다. 그렇다고 동이 트기를 기다리자니 본말이 전도된다.

뭐, 가보면 알겠지.

에이든이 옆구리를 찌른다. 튀어 나가기 위한 신호다. 그는 모습을 숨긴 채 골목과 골목, 벽과 벽 사이를 뛰어넘는데 엄청난 재능이 있었다.

내가 지금껏 사로잡히지 않은 건 다 그의 덕이다. 나 혼자였으면 이곳까지 도망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금 대로는 텅 비었다. 이 시간을 놓치면 정말 날이 밝을지도 모른다. 나는 에이든을 따라 냅다 뛰었다.

이 새로운 몸은 확실히 여리고 무르지만, 무력하지만은 않았다. 이전만은 못 해도 제법 빠른 속도로 에이든의 뒤를 쫓았다.

그래, 이 창고의 문을 열고, 구석의 장을 치우면, 그 아래 지하 비밀 통로가….

나는 조금 옛 생각에 잠기며 뛰어든 그 기세 그대로 가운데 창고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곳에는.

“…? 히익!”

얼굴에 확 끼쳐오는 달고 비린 냄새. 찐득하고 응축된, 역겹고 어지러운 냄새. 진한 향수나 화장품 냄새처럼 저절로 얼굴을 찌푸려진다.

그 인위적이고 달콤한 냄새 사이로 습하고 뜨거운 살의 냄새가 섞여든다. 무슨 찌든 냄새까지 난다. 마치 돼지우리나 닭장 같은….

“어…. 어?”

눈에 들어온 건 창고 벽에 일렬로 매달린 나체의 여성들.

팔은 하늘을 향한 채 묶였고, 다리는 벽에 고정되어 있다. 그녀들의 눈과 귀는 검은 구속구로 가려졌고, 멍하니 벌려진 입과 코에선 체액이 흘러나오고 있다.

다들 임신이라도 한 건지 배가 부풀었다. 그 부푼 배마다 밝게 빛나는 분홍색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그 마법진이 깜빡깜빡 점멸할 때마다.

“하앙….”

“으응! 아앙….”

“햐앙! 앙!”

옅고 작은 신음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온다. 시고 단 여체의 냄새가 더욱더 짙어진다. 또 알 수 없는 체액이 그녀들의 가랑이와 젖 끝에서 흘러 바닥에 깔린 대야에 모인다. 이쯤 되니 그녀들이 인간이 맞기나 하는지 의심이 될 정도다.

그녀들의 머리와 척수에 연결된 관에서 무슨 분홍색 액체가 조금씩 흘러나와 중앙에 큰 유리통에 모이고 있다. 이 여성들은 다 저 액체를 모으기 위해 여기 있는 걸까.

자세히 보니 또 다른 관을 입에 물고 사랑스럽다는 듯이 쭙쭙 빠는 이들도 보인다. 대체, 대체 이곳은 뭐지.

한때 마법사들이 자랑스럽게 떠벌리던 마력 자동화 목장에도 저런 관들이 있었지.

세기의 대발명이라나 뭐라나. 소의 우유를 짜기 위한 관과 마력이 섞인 액상 먹이를 공급하기 위한 관이 분명히 기억난다. 눈앞의 관들과 매우 닮았다.

결국, 그 자동화 목장은 인도적 관점의 반대 의견과 마나의 효율 문제 때문에 폐기되었지만.

하지만 그렇다는 건….

인간이 소에게 그랬듯, 여기 있는 여성들은 용의….

충격적인 광경과 다다른 진실에 사고가 정지한다.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통로는 이 건물이 아닌 건가? 아니, 애초에 이 여성들은 대체….

누구겠는가. 모두 기헨의 백성들이다.

용이 도래한 그 첫날 사로잡힌 이들인가. 아니면 나와 레온하르트를 따르다 결국 붙잡힌 이들인가. 귀족인가, 평민인가. 아니 그런 게 이제 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남자였나, 여자였나. 그것조차 알 수 없다. 머리가 이상해질 것만 같다. 뜨겁고 묵직한 것이 배 아래에서 올라온다. 이건 정말….

“보지 말게, 모리츠. 지금 자네가 이 진실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네. 그러니, 제발…. ”

에이든이 뒤에서 손으로 내 눈을 가린다. 남은 손으로 내 팔을 잡고 뒤에서 껴안는다.

내가 이 방을 둘러본 건 고작 몇 초도 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걸 보고 이해해 버렸다.

용들은…. 용들은 처음부터 인간을…. 이런 목적으로….

방금 에이든이 흘린 말이 떠오른다. 용들이 지나간 땅에는 풀 한 포기, 나무 하나 자라지 않는다고. 그들은 자신들과 그릇의 영생을 위해 점령한 땅의 모든 생명과 마나를 착취해 하늘로 가져간다고.

말도 안 된다. 이런 일은 있어선 안 된다. 벽에 걸린 저 백성들도 모두 누군가의 부모이자 자식이었을 터이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그 가정과 사회를 짓밟은 침략자 용을 위해 저런….

“핀 모리츠. 지금은 시간이 없네. 용들에게 끔찍한 일을 당한 건 자네와 자네 종족만이 아니야. 나중에 내가 다 말해주겠네. 용들은 무엇이고,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하는지. 일단 지금은 그 지하 통로가 어디 있는지 말해 주게.”

하, 하지만….

에이든이 나를 더 거세게 끌어안는다. 안심시키려는 듯, 보호하려는 듯, 나의 몸을 감싼다.

“저기! 저기 있다! 목장 앞에!”

저 멀리 뒤에서 용의 고함이 들린다. 대로 앞에서 이런 눈에 띄는 짓을 했으니 당연한가. 하지만 나는 아직도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이든의 목소리가 다급해진다.

“모리츠, 제발! 후회고, 복수고 모두 자네와 내가 살아야 의미가 있다네! 우울한 감정에 사로잡히기보단 앞으로 나아가자고 하지 않았나! 제발 그 지하 통로가 어디 있는지 말해주게. 이 건물에 있기는 한 건가?”

에이든이 천천히 손을 내린다. 다시금 그 끔찍한 광경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의 말이 맞다. 바로 조금 전에 자신이 한 말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남을 이끄는 자는 항상 침착하고 평정해야 하느니. 사관생도였을 때 지겹도록 들은 말이다.

나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기억을 되살려 이 방의 구석을 가리켰다. 에이든이 널브러진 관과 여체를 넘어 그곳으로 달려간다. 나도 구토감을 참으며 그 뒤를 따른다.

“있다.”

에이든이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이제는 인간 목장이 된 창고의 구석에 그 지하 통로의 입구가 있었다.

딱히 선반이나 물건으로 막혀있지도 않았다. 일 년 전 레온하르트와 내가 잠갔던 그 모습 그대로다. 녹이 슨 자물쇠와 견고하고 반듯하게 짜인 나무 덮개까지.

용들도 이 통로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렸겠지만,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그대로 방치한 것일 테지. 어쨌든 우리에겐 다행이다.

“하아앙!”

“흐응!”

매달린 여성들은 계속해서 옅은 신음을 흘린다. 안까지 들어오니 그 달고 역한 냄새가 더 세게 진동한다.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어지럽다. 이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이들이 정말 그 기헨의 백성들이 맞나.

나도 이 목장이 들어선 수도의 지하감옥에 갇혀있었지. 에이든과 함께 탈출하지 않았다면 설마 나도 저렇게….

아니, 괜한 생각은 관두자. 탈출의 길이 바로 눈앞에 있다.

쾅.

에이든이 힘으로 자물쇠를 부순다. 우리를 쫓는 발소리가 가깝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우린 용에게 발각됐다. 전처럼 태평하게 어둠 속에 숨어 사담이나 나눌 여유는 이젠 없다. 아무튼 죽을 동 살 동 뛰어야 한다.

레온하르트와 함께 지나온 그 통로에 이젠 에이든과 함께 뛰어든다. 어둑어둑한 데다 가파르기까지 한 계단을 위험천만하게 달려 내려간다.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정말 용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강하고, 기척을 감지하는 것에 뛰어난데다, 저렇게 잔악무도하기까지 한 용들에게서.

“핀, 빨리!”

앞서 뛰어든 에이든이 내 손을 잡고 이끈다. 그 뒷모습과 내 팔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넘어질까 두렵고, 쫓아오는 용들도 무서워 그 손을 꼬옥 잡았다. 남에게 이끌려지는 그 감각이 서글프게도 싫지만은 않았다.

내가 속으로 아무리 부정해도, 이 여린 몸은 예전 남자의 몸처럼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그건 내가 바꿀 수 없는 사실이다.

에이든은 굳은 표정으로 말도 없이 어둠을 가른다.

모든 게 혼란스러운 나는 그저 그렇게 그의 뒤를 쫓는 것 말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의 세상이 뒤집혀간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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