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핀 (5)
* * *
그날은 소나기가 내렸다.
공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겨울날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눈이 아니라 비가 내렸다.
벌써 진창이 다 된 숲길을 마차가 달린다. 뒤 칸에 실려 흔들리는 내 몸에도 땅에 질퍽질퍽 빠지는 말발굽이 느껴졌다.
겨울이 되어도 그 빛을 잃지 않는 침엽수가 짙은 녹색으로 제 생기를 늙고 추레하게 뽐내고 있었다. 회색 하늘과 검은 하늘은 나에게 쇠와 재의 느낌을 주었다.
“하아…. 정말 이래야겠어?”
“뭐어? 당신이 우리에게 해준 게 뭔데, 당신만 괴롭고 힘든 줄 알아? 같이 정할 때는 아무 말도 없더니!”
고삐를 잡은 아버지의 한숨과 내 옆에 앉은 어머니의 고성이 마차 안의 정적을 부수었다. 그 부수어진 정적의 틈새로 거센 빗소리가 어지러이 몰려들었다. 나는 약간 어지럼증을 느꼈다.
“당신이 다 키웠어?! 당신이 다 키웠냐고! 나 내 돈으로 먹이고 입힌 거 아냐. 당신이 우리 살림에 한 푼이나 보태기를 했어, 뭐를 했어! 허영심만 커가지곤 없는 살림에 사치까지 부리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다 당신이 잘못한 거 아냐, 당신이! 당신이 실패만 하지 않았어도….”
나는 귀를 막았다. 자식을 버리는 그 날까지도 말다툼을 하는 부모의 무신경함에 질리기도 했지만, 그때는 그저 둘의 목소리가 불쾌하고 시끄러웠다.
마차는 더 깊고 어두운 숲속으로 향했다. 나는 자신이 더는 빠져나갈 수 없는 깊은 미궁 속으로 끌려들어 간다는 착각이 들었다.
길 중간에 낡고 허름한 수도원이 보였다. 신앙인들의 수행을 위해 도시와 마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 그러면서도 밖의 소식을 들을 수 있고, 여행자가 잠시 몸을 누이고 목을 축일 수 있는 곳.
어머니는 그 수도원 앞에 나를 내려두고 말했다.
“핀?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줄래? 어…. 우리 엄마, 아빠가 이 주변에 잠시 일이 있어서…. 응? 그래. 아! 비를 피하게 저기 저 처마에서. 그래, 그래, 그래. 우리 핀 착하다.”
아버지는 날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없이 엉망진창이 된 땅만 바라볼 뿐이었다.
이왕이면 좀 더 제대로 된 거짓말을 듣고 싶었는데.
나는 그때 이미 자신이 버려질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여덟 살도 되기 전이었지만 나는 너무 일찍 철이 들었다.
한때 잘나가는 상인이었으나, 몇 년 전 크게 사업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진 아버지. 오직 돈만을 바라보고 그와 결혼한 허영심 가득한 몰락 귀족 어머니. 나는 그런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내가 남부럽지 않은 탄생의 축복을 받았다고 항상 이야기했지만, 나는 전혀 실감이 가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네다섯 살이 되자마자 우리 가족의 삶은 급전직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넓고 반듯한 집에서 좁은 집, 더 좁은 집, 더 좁고 허름한 집까지, 이사에 이사를 거듭했다.
집에선 언제나 고성이 울려 퍼지고, 식기와 술병이 하늘을 날았다. 그 폭언과 폭력이 나를 향한 적도 많았다.
이렇게 춥고 비까지 내리는 날에 가족 셋이서 집을 나설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이 갔다. 오면서도 딱히 숨기려고 하지 않기에 어머니가 마지막에 한 그 거짓말엔 나도 조금 벙쪘다.
“그래! 정말 잠깐이면 돌아올 테니까! 거기서 벗어나면 안 된다?”
어차피 그들을 쫓을 마음 따윈 없었다. 어머니는 정말 쓸데없는 확인사살까지 하며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값싸고 추한 이별이라니. 적어도 나는 저들만큼 후지고 더럽지는 않은데.
나는 수도원 벽에 몸을 기대고 떠나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이기를 포기한 여자가 마차에 오른다. 아버지이기를 포기한 남자가 고삐를 내려친다.
가장 마지막까지 날 바라봐준 건 뒤돌아 히잉 하고 울던 말의 처진 눈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둘은 자기 말과 마차까지도 있었으면서 아이를 버린 건가.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해도 정말 최악의 인간들이다. 나를 그때 그렇게 버려준 것이 차라리 고마울 정도다.
나를 버린 건 둘이 더 쉽게 이혼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나. 아니면 그 마차와 말을 밑천으로 다시 한몫 잡고 정말 돌아오려 했나.
이제 와 궁금하지도 않다. 용들이 인간 사회를 지배한 지금, 그들이 죽었던 살았던 내 알바도 아니다.
그들에겐 아까 전 가축들처럼 용이 주는 거짓 행복과 쾌락도 아깝다. 뭐, 용들이 굳이 쓰겠다면야 그 정도밖에 쓸모가 없겠지만….
아까 전? 가축?
무슨 말이지?
나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지?
나는…. 나는 여태껏 뭘….
깊은 수렁에 잠긴 의식이 서서히 부양한다. 내 이름을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를 버린 사람들이 지어준, 잊고 싶고 지우고 싶던 나의 이름. 그 이름을 정말이지 애타고 가슴 아프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세상의 빛이 돌아오고 망막에 상이 다시 맺힌다. 여긴 어디고 나는 지금까지 뭘 했었지. 그래, 맞아….
나는 비참한 과거에서 더 비참한 현실로 돌아왔다.
아니, 그래도 지금은 옆에 있어 주는 자가 한 명은…. 있나.
“핀! 핀! 핀 모리츠! 일어나게. 제발…. 제발 일어나 주게….”
눈을 뜨니 에이든이 내 손을 잡고 궁상을 떨고 있었다. 맞은편 벽에 그려진 마법진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그 밝은 빛에 머리가 조금 띵하다.
사고가 다시 돌아간다. 분명 나하고 에이든은 그 역겨운 인간 목장의 구석에서 지하 통로를 발견해 바로 뛰어들었다. 그 전에 내가 바보같이 시간을 끄는 바람에 용에게 발각되었지.
뒤를 쫓아오던 용의 발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잡히면 그나 나나 성하게 끝나지는 않을 터였다. 에이든이 왜 질질 짜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태평하게 보낼 시간이 없다.
“뭐, 뭐해, 에이든. 지금 당장이라도 용을 피해서…. 으윽!”
나는 누운 몸을 일으키려다 찌르는 듯한 고통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프다. 발목이 부러질 것처럼 아프다. 아니, 이미 부러졌나.
아픈 건 발목뿐만이 아니었다. 몸 이곳저곳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조금 전 지하 감옥처럼 으레 하는 비유가 아니다. 정말로 몸 구석구석에 푸른 멍이 들어 있고, 몸의 어디든 조금이라도 움직이려 하면 뜨겁고 날카로운 고통을 뇌에 전해온다.
아, 설마설마했는데. 나는 이 지하 통로의 계단을 내려오다 정말로 넘어진 거구나. 그 충격에 정신을 잃고 떠올리기도 싫은 그 기억에 다다른 거고.
그대로 죽거나 붙잡혀도 이상하지 않은데, 나는 어떻게 이렇게 살아있는 거지.
“핀! 핀! 일어난 건가! 다행일세, 다행이야. 정말, 정말 다행이야….”
…누구 때문이겠는가. 다 이 녀석 덕분이겠지. 아무래도 이 엘프 암살자는 나를 둘러업고 용들을 피해 이곳까지 도망쳐온 모양이다.
여긴 정확히 어디지. 나는 한 번 이 통로를 지난 적은 있어도, 이 통로가 정확히 어떤 모양이고 얼마나 큰지는 모른다. 이곳도 처음 보는 곳이었다.
그래도 주변에 용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녀석 나를 업고 어디까지 도망쳐온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냐고 묻지는 말자. 실제로 나는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괜한 촌스러운 짓은 안 하는 편이 좋다..
“으, 으윽….”
“안정! 안정을 취하게. 지금 내가 치료하고 있으니.”
내가 자세가 불편해 몸을 조금 움직이자 에이든이 또 호들갑을 떨었다. 그의 말대로 다친 발목에 그의 손길이 닿으면, 찌릿찌릿하지만 따스하고 편안한 감각이 환부에서 솟아올랐다.
치유 마법인가. 그 어떤 마법보다도 생명력을 소모하는 힘들고 어려운 마법인데.
“하아…. 하아….”
그의 지친 숨소리가 들린다. 그는, 그는 대체 왜….
대체 왜 오늘 처음 본 이종족에게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내가 그였다면 아무 쓸모 없는 핀 모리츠라는 인간 여성 따위 버리고 혼자 살 길을 찾았을 것이다. 길을 모른다 해도 그가 가진 실력이면 용들의 감시망을 피해 혼자 달아나는 일 따위 식은 죽 먹기였을 텐데.
당장 지금도 나에게 치유 마법을 쓸 마나로 탐색 마법을 썼으면 이미 그 혼자 숲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왜.
“나는…. 나는 넘어진 건가? 그것도 이 통로에 들어서자마자?”
“미안하네. 내가 그때 잡아주었어야 했는데…. 나도 경황이 없어서….”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래서 나를 업고 여기까지 도망쳐 온 건가? 용들을 다 따돌리고?”
“그래. 용들도 포기했는지 이젠 안전하네. 치료하는 데 잠시 시간이 걸리니 조금만 버텨주게나.”
옅고 푸석한 금발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그가 이대로 치유 마법을 계속한다면….
“왜! 왜 나한테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 나는, 나는 자네에게 짐 덩이밖에 되지 않는데.”
애초에 용에게 발각된 것도 다 나의 바보짓 때문이다. 어떤 풍경이 펼쳐졌던, 그대로 문을 열고 지하 통로를 찾았으면 들키지 않고 이 통로에 진입할 수 있었을 거다.
서두르다 이렇게 넘어지는 일도 없었을 거다. 에이든의 신호가 틀렸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다 나 때문에….
“괜찮네. 핀. 그런 말 말고 지금은….”
“내 몸에서 손 떼게, 당장.”
“하, 하지만.”
“그 마법 멈추라고.”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호의, 받아서는 안 된다.
“당장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얼굴 하고선 뭐가 괜찮다는 건가. 자네 바본가? 멍청인가? 발각되자마자 당장 나를 버리고 도망쳐도 모자랄 판에 업어 들고 치료까지 해줘?”
질린다. 야비한 암살자 주제에, 수천 년이나 살아온 주제에. 뭐가 중요한 지도 모르고 바보같이 남에게 이런 호의나 베풀고. 혼자 도망쳤다면 옛 저녁에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나는 이제 어떻게 되어도 좋네. 지금까지 자네 짐밖에 되지 않지 않았나. 괜한 체력 쓰지 말고 가게."
"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내가 자네를 어떻게 두고 가나."
"자네야말로 괴이한 소리 말게나. 애초에 우리가 무슨 사이였다고."
내 말이 옳다. 우린 기껏 해봐야 오늘, 아니, 어젯밤 처음 만난 사이에 지나지 않는다.
필요에 의해 묶인 아주 잠시 동안의 관계일뿐인데, 이렇게 한쪽이 짐만 돼서는 유지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나는 결심이 섰다.
"이대로 여기서 죽던, 용이 발견해서 방금 같은 가축이 되던, 내게 정해진 나의 미래가 있겠지. 지금은 이런 모습이지만 나도 무인이네. 남의 발목이나 잡으며 살아가고 싶지는 않아. 어서 가게. 가….”
조금 모질고 거친 말이었지만 전부 진심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그들처럼 후지고 멍청한 인간이 되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살았다. 그런데 지금 이 꼴은 뭔가.
남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그의 발목만 잡고 있지 않은가. 누구보다도 후지고 한심하지 않은가. 설령 이렇게 삶을 잇는다고 해도 지금 같은 시대, 멀쩡하고 떳떳한 결말은 나에게 찾아오지 않겠지.
하지만 그는 다르다. 그에게선 레온하르트와 같은 냄새가 난다. 동화나 영웅담의 주인공 같은 따사롭고 정의로운 이의 냄새가.
처음부터 내가 낄 자리가 아니었다. 그의 실력이라면 동료를 찾아 정말 거사를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와 그의 동료들이라면 소문으로만 들려오는 용의 왕의 모가지를 따고 세상을 뒤집을 수도 있겠지. 나는 방해만 될 뿐이다. 아무리 오래 치료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상처가 그리 쉽게 아물 리 없다.
나는 더는 칼을 들 수 없겠지. 갑옷을 입고 말을 탈 수도 없을 거고. 설령 여자의 몸이 되었다 해도 정신을 차리고 사지만 멀쩡하면 용에게 맞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래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가치가 없다. 레온하르트와 다시 만난다 해도 들 고개가 없다. 버려진 나는 결국 여기까지인 것이다. 계속 남의 방해만 될 바에는 차라리 이대로 지하에서 썩는 편이….
에이든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다. 발목에 닿았던 손은 이미 떨어졌다.
모질게 말한 게 조금 통했는지 호들갑치고는 순순히 내 말을 따른다. 그도 무인이니 내 심정을 이해해 준 걸까.
그래, 그걸로 된 거야. 나도 이제 좀 편해지자.
내가 그렇게 마음을 놓으려 하자.
"…대체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