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의 화원-43화 (43/62)

〈 43화 〉 핀 (6)

* * *

에이든은 마치 자신에게 업히라는 듯이 내게 등을 보이며 쭈그려 앉았다.

뭐지?

내 말을 듣기나 한 건가?

“야, 너 뭐하냐?"

아, 이게 아니지.

"아니. 자네 뭐하나?”

“업히게.”

말투를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도 잠시, 나는 그 무성의한 대답에 열불이 뻗쳤다.

“야, 너 내 말 안 들었어?"

“어리광부리지 말고 어서. 치료는 좀 더 안전한 곳에 가서 계속하겠네.”

“이게 진짜…!”

무인의 결단을 어리광이라니. 나는 정말로 화가 나서 그나마 멀쩡한 왼손으로 에이든의 등을 팡팡 때렸다. 그는 아프지도 않은지 꼼짝도 안 한다.

"싫다고! 혼자 가라고! 좀 냅두라고!!! 어?!”

“정말이지….”

“꺄, 꺄악! 이거 놔! 놓으라고! 야! 야! 안 들려?! 야아!!!!!”

투명한 마법의 손이 나를 덥석 잡아든다. 나는 꼼짝없이 에이든의 등에 업힌다. 아니 진짜 이놈이….

“저 앞에 숲의 냄새가 나네. 자네가 말한 출구겠지. 자네 말이 맞기도 해. 아무리 세상이 망했다지만 사람 둘 숨을 곳이 어디 없겠나. 나도 양기를 보충하고 마저 그대를 돕겠네.”

“됐고! 이거 놓으라고오!!! 아악!!!!! 아!!!!!”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등을 때려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나는 하릴없이 그의 등에 업혀 출구를 향해 둥실둥실 떠간다.

이 녀석 정말 내 말을 듣기나 한 걸까. 내가 아무리 악을 써봐도 에이든은 막무가내였다. 등을 때리고 아픈 몸을 흔들어봐도 그는 그저 입을 앙다문 채 걷기만 한다.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놈이야?

"야, 안 들려? 안 들리냐?! 어!!!?"

내가 무시당한 것 같아 귓가에 소리를 지르면, 그는 고고하게 고개만 홱 돌려버린다. 그 잔망스러운 짓거리가 나를 더 자극한다. 나는 남이 이렇게 멋대로 구는 걸 참을 수 없는 사람이다.

게다가 그 못된 벽창호의 등은 정말이지 넓고 푸근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짜증이 났다. 뚜벅뚜벅. 에이든은 걸음을 멈출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이.... 이 자식이....

“바보! 멍청이!!! 머저리!!!!!”

헛된 메아리가 텅 빈 지하 통로에 울려 퍼진다. 아무래도 이 녀석과의 인연은 조금 더 이어질 것 같다.

오랫동안 방치된 지하 통로에서는 습하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통로의 일부분이 도시의 하수도와 연결되어있는 건지, 때때로 진하고 역한 냄새가 올라오기도 했다.

속이 불편해진 나는 그 냄새에서 도망치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에이든의 등에 코를 처박았다.

넝마는 그의 큰 체구를 거의 가리지 못했다. 코끝에서 그의 등을 흐르는 식은땀이 느껴졌다. 엘프는 체취가 옅은건지, 나쁜 냄새가 나지 않았다. 이미 내 코가 비뚤어진 것뿐일지도 모르지만.

에이든은 나를 업고 천천히 걸으며 출구까지 향한다. 일정한 걸음걸이와 느린 속도에서 그가 나를 배려하는 것이 느껴졌다.

한동안 저항해 보았지만 에이든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래고래 소릴 질러봐도 그는 대답 없이 묵묵히 걷기만 할 뿐.

그는 걷고, 또 걷는다. 그가 말한 저 앞이 어느 정도 먼지 모르겠다. 이 길이 일 년 전 그 길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내 눈에 보이는 건 그의 크고 너른 등판뿐이다.

나는 포기하고 그 등에 몸을 기댔다. 하, 이 늙은이 벽창호 녀석. 지상으로 올라간 후에는 또 어쩌려고.

정말 나를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

아무리 힘을 주어봐도 오른손과 양다리가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나마 목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차라리 불행이라 부르는 편이 옳을 것이다.

평생에 거쳐 재활한다고 하더라도 검과 방패는커녕 포크와 수저도 들지 못할 것이 뻔했다. 남의 도움 없이는 평범한 일상을 영위할 수도 없는 몸이 된 것이다.

나, 핀 모리츠란 인간은 끝난 것이다.

다른 병들고 다친 이들의 인생까지 욕보일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나의 인생과 나의 가치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부러진 검으로는 아무것도 베지 못한다.

누구보다도 가치 있는 인간이 되고 싶었다. 남을 지키고 보호해주는 인간이 되고 싶었다.

레온하르트처럼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남들을 이끄는 이가 되고 싶었다. 주변을 행복하게 만드는 인간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씩 어긋나기만 했다. 나는 사랑을 배우지 못했다. 사랑을 주는 방법 따위 알 리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면 언제나 주위에 철벽을 치고 병사들을 엄하게 대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모두가 레온하르트만을 따르고 나를 경원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레온하르트가 워낙 부드럽고 따스한 성격이고, 기헨이 평화로운 통일 왕국이라 크게 문제가 안 된 것뿐이다.

결국, 용이 들이닥친 그 날, 내가 명령을 내려도 움직이는 근위병은 아무도 없었다. 나의 고함을 듣고 정신을 차린 레온하르트가 명령을 내리고서야 그 녀석들은 우왕좌왕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심한 꼴이다. 내가 좀 더 어엿한 부장이었으면 한 명의 백성이라도 더 데리고 탈출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제대로 된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부하들과 멀쩡한 신뢰 관계조차 쌓지 못했다. 핀 모리츠란 인간의 가치는 처음부터 이 정도였을지도 모른다.

“…흐윽…….”

눈물이 차오른다. 그 눈물을 가리기 위해 더 깊게 그의 등에 고개를 처박는다.

부모에게 버려졌을 때도 울지는 않았는데, 지금 대체 왜….

이제 더는 부정할 수 없다. 나는 결국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거다.

다시는 버려지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필요 받고 싶었고, 누구라도 내 존재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주길 바랐다. 그래서….

그래서 군인의 길을 걷고, 사관학교에서 차석까지 올라 수석인 레온하르트의 부장까지 되었는데.

지금의 나는 이런 꼴로 남의 보호나 받으며 질긴 생을 연장하고 있다.

나는 빗속에 버려진 일곱 살 아이에서 전혀 성장하지 못했다.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 녀석들이 지금의 날 보면 뭐라고 할까. 레온하르트나 다른 동료들이 본다면 또 뭐라고 할까.

싫다. 예전처럼 부정당하고 소외당하기만 하는 삶은 질렸다. 어차피 멸망한 세상. 이대로 삶이 끝나도 나쁘지 않았는데. 이 녀석은 왜 나를….

눈물이 두 뺨을 흐르는 게 느껴진다. 두둥실, 두둥실. 에이든의 발걸음에 맞춰 내 몸이 일정한 리듬으로 흔들린다.

한참을 잤는데도 아직도 피로하고 혼미하다. 몸과 마음이 소모될 대로 소모되어 버렸다. 저절로 눈이 감긴다. 그에 등에 고개를 박을수록 그의 체취와 체온이 더 깊게 느껴진다.

잠으로 도망치는 건 내가 어릴 적 자주 저지르던 실수였다. 그저 눈을 감고 뜬다 해도 변하는 것은 하나 없는데.

부모의 언성이 높아질 때면 나는 항상 몸을 피하고 내 방에 들어가 이불을 덮어썼다. 눈과 귀를 막고 그 폭풍이 나에게까지 도달하지 않기만을 빌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싫어. 싫다고. 뭐라도 좋으니까 이대로 끝내줘.

성장은커녕 점점 어렸을 적 그때로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프고, 괴롭고, 어지럽다. 그냥 도망치고 싶다. 나는…. 나는….

나는 그렇게 에이드의 등 위에서 또 잠이 들었다.

다시 떠오르는 건 어린 시절의 기억.

그의 따스하고 너른 등에 기댄 채, 침전하는 의식 속에서 떠올린 건 내가 처음 겪은 온기와 호의.

그렇게 수도원에서 길러지게 된 나는 하루가 지날수록 더 비뚤어지기만 했다.

수도원에서의 삶은 그리 풍족하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 목적과 의의가 수행에 있으니.

수도원은 보육원이 아니었다. 갑자기 늘어난 입에 그들도 꽤 곤란했을 것이다. 평화롭고 풍요로운 기헨에서 아이를 버리는 일은 자주 있지 않았다.나는 오히려 전보다도 잘 먹거나 입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수도사들은 종교인들이 으레 하는 가식적인 말로 나의 불행을 위로해 주었지만, 그런다고 나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배울 수 있는 것도 아주 한정적이고 지엽적인 것뿐. 어린 나는 자연스럽게 도시로의 탈출을 꿈꿨다. 이대로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 밑천을 모으기 위해 가끔 수도원을 들르는 여행자나 후원자의 물건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 손재주가 부족해 크게 야단이 났지만, 멈출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이런 벽창 수도원에서 평생 성경이나 외우며 살 수는 없었다.

그건 내가 꽤 높은 성공률을 보이며 승승장구하던 중에 일어났다.

때아닌 횡재에 내가 기분 좋게 휘파람을 불고 있을 때.

“핀! 네 녀석 또 손님의 물건에 손을 댄 거냐!”

늙은 대머리 수도사 하나가 울그락불그락 하는 얼굴로 갑자기 내 방에 들어왔다. 나는 태연한 얼굴로 시치미를 뗐지만,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왜요! 왜! 안 했다니까!”

“오늘 들어온 금화가 한 닢이나 부족한데 뭘 안 하긴, 뭘 안 해! 그분들이 틀릴 리가 없는데!”

수도사는 내 몸을 잡고 흔들어 댔다. 나는 발악하며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힘의 차이는 역력했다. 그는 결국 내 바지춤에서 금화 한 닢을 찾아냈다.

금화 한 닢, 지금 생각해도 꽤 큰 돈이다. 번듯한 상인이나 직공도 눈이 돌아가는 금액인데, 그 아홉 살 어린이에게는 얼마나 크게 느껴졌을까.

나는 멍이 눈에 띄지 않는 배와 허벅지를 흠씬 두들겨 맞은 뒤, 피해자 앞에 던져졌다.

수도사들보다도 더 인자하고 자애로워 보이는 남자와 얼음처럼 차가운 무표정의 여자. 멍하니 나비가 나는 것을 바라보는 어린아이까지.

이 수도원을 정기후원하는 귀족이었다. 입은 옷과 태도에서 상류층의 품격이 여실히 느껴진다. 주위를 흐르는 공기부터 여유롭고 화사하다. 도둑질을 당했는데도 노여움과 놀람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와는 결코 엮일 일 없는 구름 위의 사람들.

일견 초연한 것처럼 보여도 삶에 찌들대로 찌든 수도사와 꾀죄죄한 몰골의 나와는 천지 차이다.

크고 무뚝뚝한 나무 십자가가 그런 모두를 내려다본다. 나는 이 상황이 어딘가 우스웠다.

“죄송합니다, 하츠펠트 님! 저희 꼬맹이가 주제도 모르고…. 이 녀석, 빨리 고갤 숙여.”

“…죄송합니다.”

치욕적이다. 누군 좋아서 이런 삶을 사는 줄 아는 건가. 그 누구도 자신의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다. 저기 저 아이와 내가 무엇이 다른가. 그저 부모가 다르다는, 그 이유 하나로….

불공평하고, 불공정하다. 나는 나의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거다.

땡그르르. 갑자기 수도사의 손아귀에서 흘러나온 금화 한 닢이 바닥을 굴렀다. 구르고 굴러서 그 아이의 발치에 다다른다.

그 금화의 움직임에 따라 팔을 허우적거리는 수도사의 꼴이 또 우스웠다. 금화가 결국 귀족들을 향하자 못내 다가가지 못한 그 꼴이 또, 또 우스웠다.

아이의 주위를 날던 흰 나비가 그의 손끝에 앉았다. 아이는 한동안 나비와 금화를 번갈아 보더니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또래지만 정말, 정말 귀엽고 예쁜 아이였다.

큰 눈을 시작으로 모든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오밀조밀하다. 화사한 금발과 투명한 피부는 마치 인형 같다. 나와는 다르게 티 없이 순수하고 깨끗하다.

그 어떤 고난이나 고통 하나 없이 살아온 것이 여실히 느껴진다. 나는 그 순수한 눈망울이 부럽고 샘이 났다.

아아, 내가 너였다면.

“에헤헤…. 죄송해요. 사실 제가 했어요.”

내가 정말로 너였다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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