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핀 (7)
* * *
“에…. 네, 네?”
수도사가 얼빠진 소리를 낸다. 나도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 아이를 바라본다.
아니, 내가 짐 마차에 손을 대 빼낸 게 맞는데 대체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이니, 레온하르트?”
놀란 이쪽과는 다르게, 하츠펠트라 불린 남성은 인자한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고 그 아이에게 물었다. 나긋나긋하고 푸근한 목소리다. 아이의 엉뚱한 소리를 최대한 존중하고 이해하려 하는 것이 보였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무표정을 짓던 귀부인은 무슨 일인지 고개를 돌리고 쿡쿡 웃음소리를 낸다. 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어…. 어……. 아, 그래!”
아이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까 그 형이랑 금화로 공기놀이를 했거든요. 그러다 제가 져서, 분한 마음에 그만…. 미안해요, 형. 내가 몰래 뒷주머니에 금화를 넣었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러면서 고개를 숙인 나에게 손을 건네온다. 흰 나비가 이제 그가 아닌 나의 주위를 난다. 그 보드랍고 고운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내가 그를 본 건 지금이 처음이다. 그리고 금화로 공기놀이라니, 기헨의 왕자님도 그런 짓은 하지 못할 터였다. 애초에 그만한 크기도 아니다.
게다가 행동의 이유가 아직 설명이 안 됐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으면 왜 그런 짓을 한 건데. 이건 아이가 으레 하는 지리멸렬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제서야 그 아이가 나를 구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위해 잘하지도 못하는 거짓말까지 하며 하지도 않은 누명을 쓰려는 것이다. 오늘 처음 본 나를 위해 대체 왜.
…내가, 내가 정말로 너였다면, 너와 똑같은 말을 하고, 너와 똑같이 행동할 수 있었을까.
아니, 결코 그럴 수 없었겠지. 너는 누구와도 다른 아이였으니까. 어디에서나 최선을 다하는 주인공이었고, 누구의 마음이라도 녹일 수 있는 따스한 아이였으니까.
어쩌면 지금도 너는….
짝짝짝. 귀부인이 작게 손뼉을 친다. 하츠펠트란 남성은 정말 장하고 자랑스럽다는 듯 크게 웃는다. 그 소리를 들은 아이가 또 배시시 웃는다.
나는 아직도 그 작고 고운 손에 손을 뻗지 못했다. 누군가의 호의를 느낀 것 그것이 처음이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하, 하지만 금화는 뒷주머니가 아니라 그 안 허리춤에서….”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수도사가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들어도 정말 쓸모없고 한심한 소리였다.
“뭐요. 내 아이의 말이 틀렸다는 거요?”
“아아아, 아닙니다. 네, 네. 그렇죠. 예.”
“이제 수가 맞을 테니 들어가 보시오. 나는 잠시 이 아이와 할 말이 있으니.”
“아, 예에….”
수도사는 금화를 주워들고 급히 뒤꽁무니를 뺐다.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나비도 나와 그 아이 주위를 크게 한 바퀴 돌더니 저 멀리 나풀나풀 날아갔다.
나는 그제야 그 손을 잡았다. 아이의 체온은 높다고 하던가. 그 손은 지금까지 잡았던 그 어떤 손보다도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그때도 분명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었지. 죄송하고, 또 죄송하다고 머리를 돌바닥에 처박고 빌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어르신은 끝까지 시치미를 떼며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나는 그럴 수록 더 부끄러웠다.
나는 그 일로 하츠펠트가의 후원을 받아 기헨의 수도로 올라 올 수 있었다. 하츠펠트가가 그렇게 후원하던 고아는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시골의 수도원들을 꾸준히 후원한 것도 다 나 같은 아이들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건 그리프와 하츠펠트가 나라를 세울 때부터 행해온 유구한 전통이었다. 수도에는 왕립 보육원과 탁아소까지 있다. 기헨은 그 정도로 옳고 바르게 큰 국가였다.
그날의 풍경은 아직도 나의 마음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추억이 되었다. 그날 레온하르트가 뻗어준 그 손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대로 길거리의 부랑자가 되거나 도적질을 일삼다 감옥에 갔을 것이다.
지금보다도 더 인간을 믿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내 부모와 다름없는 인간이 되어 인생을 허비했겠지. 나는 그날 처음 본 그에게 구원받은 거다.
정작 레온하르트는 다 잊어버린 건지 나를 사관학교에서 처음 본 걸로 생각하고 있지만.
아니, 뭔가 괘씸한데. 형이라면서 초면에 반말까지 했으면서. 그걸 홀라당 다 까먹어?
실제로 내가 더 나이가 많다. 그리 큰 차이도 아니고, 기수가 같은 데다, 그가 더 지위가 높으니 친구 하는 거지. 만약 반대였으면….
아니, 이러니까 내가 안 되는 건가. 참 천성이란 게 바꾸기 힘들다.
뭐, 내가 말하면 기억해 줄 거다. 그 녀석은 그런 녀석이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구하는, 그런 이야기 속 주인공 같은 사람. 주위를 행복하게 만들고, 그걸 즐기는 정말 마음 따뜻한 사람.
쪽팔리니까 죽을 때까지 절대 말 안 할 거지만.
그래, 나도 그처럼, 그 아이처럼. 따스하게 손을 내밀고, 등을 내어줄 수 있는 남자가 되고 싶었는데….
나는, 나는 지금….
또 의식이 부양한다. 빛이 보인다. 그리운 태양의 빛이….
끼익. 나무 궤짝이 들어 올려지는 소리가 났다. 역겨운 하수구 냄새가 아닌 풀과 나무의 냄새가 콧잔등을 간질인다.
나는 눈두덩이를 찌르는 따사로운 햇살에 버티지 못하고 눈을 떴다.
새와 벌레가 시끄럽게 지저귀며 아침을 알린다. 차고 보송보송한 공기가 싱긋한 숲 내음을 품었다. 햇살은 안개에 부수어져 옅은 빛무리를 뿌린다.
우린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이 땅도 결국 용의 것이지만, 용들이 득실거리는 수도보다는 나았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풀과 숲이란 말인가. 에이든도 감격에 겨운 목소리를 내었다. 정말로 그립고 애달픈 한숨과 함께.
다행히 우릴 기다리는 용은 없었다. 분명 이 출구도 다 파악이 끝났을 텐데. 인간과 엘프 한 쌍 따위, 결국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건가.
아니, 그래도 좀 이상하다. 나는 몰라도 에이든을 놓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텐데…. 용 녀석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놀랍군. 용의 점령지에 이런 크고 울창한 숲이 있다니. 예전이라면 한 방울의 마력까지 전부 짜내어 하늘로 가져갔을 터인데.”
내 의문은 에이든의 의문으로 지워졌다. 방금 눈을 뜬 참이라 머리가 좀 멍하다. 생각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 그는 신기하다는 듯 계속 주위를 둘러보며 터덜터덜 걷는다.
“…흐응. 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마력 추출 방법이 생겼나 보지. 수천 년 전하고는 다르게.”
나는 이제야 입을 연 그에게 조금 퉁명스러운 대답을 해줬다.
“핀…. 그 시설은 예전에도…. 아닐세. 지금 그런 괜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지. 전에 이곳에 온 적이 있다고 했지. 이 주변에 잠시 몸을 쉴만한 곳이 있나?”
에이든이 말을 흘렸다. 하긴, 뭐 그리 좋은 이야기라고.
나는 레온하르트와 함께 피난민을 이끌던 기억을 떠올려본다. 그래, 수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지도 모르고 태평하게 나무를 베던 나무꾼이 있었지.
우린 끈질긴 설득 끝에 그를 피난민 대열에 합류시키고 사정을 들었다. 이 주변에 분명 그의 집이 있을 것이다.
“어. 이 주변에 나무꾼의 집이 있을 거야.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지만, 그 뭐야. 대충 탐색 마법으로 찾으면 나오지 않겠어? 아까 빛낸 것처럼 파앗 하고.”
“자네가 마법에 대해 그리 빠삭하지 않다는 건 알겠군.”
“뭐어?”
그래도 몇 년이나 공부했는데.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알겠네. 찾아보지. 좀 걸릴 것 같으니 아까처럼 잠이나 자게나.”
하아, 이 녀석을 진짜 어떻게 하지.
나는 일부러 정신 사납게 몸을 꿈틀댔다. 조금 잘났다고 사람 무시나 하고 말이야. 코끝으로 그의 목선을 간질이고, 그나마 자유로운 왼손으로 옆구리를 찔러댄다.
“것, 좀. 가만히 좀 있게나.”
“싫어. 안 졸린단 말야. 아까 내 말은 하나도 안 들어 줬으면서 내가 왜.”
“에휴…. 그리고 아까 그 말투는 다 어디로 갔나? 설마 정신까지 벌써 계집이 된 건 아니겠지.”
“닥쳐.”
난 원래 이런 말투다. 사석에서 레온하르트나 얼마 안 되는 술친구를 만나면 으레 이런 시답잖은 소리를 하곤 했다.
그러면 난 에이든하고 벌써 친해진 건가. 아니, 아니다. 저 녀석이 날 막 대하니 나도 막 대해 주는 것일 뿐.
목소리까지 여자가 되었으니 톤이 높고 밝아진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유별난 소리를 한 기억은 없다. 괜히 헛소리야, 헛소리는.
그러고 보니 이제 바뀐 내 몸이 뚜렷이 보인다. 지하 통로 속 마법진의 옅은 빛이 아니라, 밝디밝은 태양 빛이 내 몸을 여실히 비춘다.
목을 돌려 내 몸을 내려다본다. 업힌 자세 때문에 제대로 볼 수는 없지만, 가늘고 매끈한 팔과 다리, 볼륨감이 넘치는 엉덩이와 가슴이 확연하다.
참 신기한 일이다. 평생 쓰고 봤던 내 몸이 이젠 내 몸이 아니다. 어차피 다쳐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면 남자의 몸이나 여자의 몸이나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나는 더 확실히 새로운 몸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비튼다. 자연스럽게 크고 푹신한 가슴이 에이든의 등에 눌린다. 나는 별다른 자각도 없이 그 가슴을 에이든의 등에 비비고 또 비볐다.
으음. 분명 남자의 욕정을 자극할만한 몸이다. 길을 가다 마주친다면 남자는 백이면 백 고개를 돌아보겠지.
몸의 곡선과 굴곡이 거의 완벽하다. 아름답고 성숙한 여성의 표본 같다. 나는 그게 나의 몸이라는 실감 없이 그저 조각품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몸의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헌 가죽이 점점 벗겨진다. 살과 살이 맞닿는다. 서로 땀으로 끈적하지만 차가운 아침 공기와 닿아 오히려 기분이 좋다. 나는 개의치 않고 계속 몸을 뒤척거린다.
“저어…. 저기요?”
에이든이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응? 또 왜. 나무꾼 집이나 빨리 찾아.”
“그…. 등에 뭐가 닿는데.”
닿긴 뭐가.
“야, 네가 강제로 업은 거잖아. 그리고 닿았으면 한참 전부터 닿았을 텐데, 이제 와 뭔 소리야.”
진짜 또 헛소리만 한다. 나는 빨리 내려와 눕고 싶은데.
“그, 그러니까. 섰다고.”
“뭐가 서. 너가?”
이 늙은이가 발정 났나. 누굴 보고 미친 소리야.
"아, 아니…. 너어…."
"뭐라고?"
답지 않게 목소리가 땅을 긴다. 뭐냐고 진짜.
“너가 섰다고! 딱딱한 게 두 개 느껴진다고! 등에서 가슴 떼라고!”
….
…….
“아아아아아아악!!!!!”
“야! 떨어질라! 가만있어! 가만! 으아악!!!”
개새끼. 내려가면 죽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