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핀 (8)
* * *
우린 그렇게 말다툼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둘 다 지쳐서 그저 묵묵히 걸었다.
알록달록한 버섯들과 푸르른 잎새. 먹이를 찾는 짐승들과 사랑을 노래하는 숲새들.
천연의 생명은 인간의 멸망은 다른 세계 이야기라는 마냥, 우거지고 뒤섞이고 있었다.
나는 그 아름다움이 오히려 쓸쓸하고 괴로웠다. 에이든이 없었다면 그대로 길을 잃었을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그렇게 걸었을까.
우린 우여곡절 끝에 나무꾼의 오두막을 찾아냈다.
“네가 괜한 소리만 안 했으면 더 빨리 찾았을 텐데.”
“자넨 정말이지…. 에휴, 말이 아깝군.”
나무꾼의 집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벽면에 조금 이끼가 들었을 뿐, 문과 창문은 견고해 보였다.
집 안도 멀쩡했다. 오랜 방랑 생활 때문일까, 침대와 여타 가재도구들이 반갑다. 먼지만 조금 걷어내면 당장 써도 될 정도였다.
“호오. 생각했던 것보다는 낫구먼.”
에이든이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물론 나도 동감이었다.
“아! 아파!”
“미, 미안하네.”
“아앙! 거기 좀 살살….”
“이, 이러면 되나?”
에이든이 천천히 내 몸을 침대 위에 눕힌다. 몸의 이곳저곳이 서로 부딪히고 겹쳐진다. 나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꺄악! 그러니까 제발 상냥히….”
“정말 미안하네, 나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왼손을 제외한 사지를 전혀 움직일 수 없는 나는 그저 에이든에게 몸을 맡길 뿐이다. 그런 나를 내려놓는 건 꽤 중노동이겠지.
에이든이 만들어낸 마법의 손이 도움을 주고는 있지만, 이전보단 그 힘과 수가 부족하다. 그가 지쳤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에이든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다. 안색도 그리 좋지 않다. 그는 정말 괜찮은 걸까.
그러니까 애초에 왜 나를….
“그래, 됐어. 어, 어. 그대로.”
간신히 몸의 평행이 맞았다. 일을 마친 에이든이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친다. 짚으로 엮인 싸구려 침대였지만, 남에게 업혀있는 것보단 나았다.
“후우. 나는 계속 이 주변을 돌면서 혹시 모를 위협이 있나 찾아보겠네. 자네나 나나 눈뜨고 아무것도 못 먹지 않았나. 숲에서 먹을만한 것도 좀 가져오겠네.”
먹을 것. 정말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의 말대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으으…. 맥주, 새끼돼지 통구이. 양의 다리와 와인 소스.
꼬르륵.
주린 배가 최후의 단말마를 내질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의식하니 갑자기 어마어마한 공복감이 몰려왔다. 배고파, 배고파.
“아하하하. 무척이나 풍요로운 숲이니 우리가 그 은혜를 조금 거두어도 죄가 되진 않겠지. 잠시만 기다리게. 엘프가 숲에서 얼마나 멋진 일을 할 수 있는지 알려주겠네.”
에이든은 내 손을 꼭 잡고 그렇게 말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데, 또 쉬지도 않고 밖에 나가 먹을 걸 구해오겠다고?
이 녀석은 얼마나 바보인 거야.
“가지 마.”
나는 그렇게 일어서려는 그의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핀?”
“가더라도 조금만 쉬고 가. 너도 지쳤을 거 아냐.”
진심이었다. 남 말고 자신을 더 생각해도 좋을 텐데.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신경쓰일 정도다.
그런데도 이 녀석은.
“나를 걱정해주는 건가.”
또 쓸데없는 소리만 했다.
“…! 그, 그건 네가 쓰러지면 나만 곤란하니까!”
“자네, 아까는 죽음까지 각오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 말 들어주지도 않았으면서.
“아니, 그…. 아무튼! 조금 쉬었다 가라고! 너까지 쓰러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가뜩이나 나는 그냥 짐 덩이일 뿐인데….”
알고 있다. 그가 무리를 하는 것도, 예전 동료들을 찾아 떠나지 못하는 것도, 전부 다 나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 분하고 괘씸했다.
우린 어제까지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다. 서로 알고 나서도, 나는 어리석고 무능한 모습밖에 보여주지 못했다.
앞으로 있을 용과의 싸움에도 나는 계속 짐 덩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녀석에게 대체 왜 이렇게까지 신경을 쏟는단 말인가.
에이든은 작게 어깨를 으쓱이더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왜인지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웠다. 그가 손을 뻗어 내 앞머리를 쓰다듬는다.
“괜찮네. 그런 무른 몸으로 암살자를 자처한 기억은 없어. 게다가 이 주변은 숲이지 않나. 몇 시간을 보내던 지치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네.”
“바보, 아까까지 그렇게 힘들어했으면서!”
숲이라니. 설명이 되지 않는다. 엘프랑 숲이랑 무슨 관계인데? 그냥 고향이 숲인 것뿐 아니야?
“걱정하지 말게. 계속 마법을 쓰다가 체내 마력이 조금 소모된 것뿐이야. 무엇보다…”
꼬르르르르륵~.
“그렇게 꼬르륵대는 배로 말해봐야 설득력이 없지 않은가.”
“…….”
그가 떠나고 텅 빈 오두막 안. 옴짝달싹도 못하는 나는 나지막이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 앞으로 일어날 일.
아직도 발목을 찌르는 고통 때문일까, 머리가 어지럽고, 지끈지끈하다.
모든 게 이상하고 뒤죽박죽이다.
냉정히 돌아보면 모든 일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용이 나를 가둔 이유부터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의식을 잃었을 때 그냥 배에 마법진을 그리고 관을 꽂았으면 됐지 않나?
녀석들이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 목장을 잠깐 본 것만으로도 뻔히 알 수 있었다. 가축, 그 이하.
그런 인간을 꽁꽁 싸매 감옥에 던져놓을 이유가 없다.
에이든도 그렇다. 그 용의주도한 용들이 그의 변장술에 그렇게 쉽게 속아 넘어갔을까.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왜 지금 쫓아오지 않나. 쓰러진 용만 넷이다. 그 용들이 원래 제 모습으로 쫓아오기만 해도 우린 손쓸 방법이 없다.
게다가 탈출하는 모습과 그 통로까지 완벽하게 파악 당했다. 용들이 만약 정말로 우리를 놓쳤다면, 그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능의 극치다.
단 하루 만에 인간을 멸망시킨 용들이 그럴 리 없다. 나의 조국 기헨이 그런 녀석들에게 멸망당했을 리 없다. 역시 뭔가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녀석들은 크라우스라는 이름을 입에 올렸었지. 꽤 무서워하고 경외하는 말투였다. 어쩌면 그 녀석 때문인가.
으으, 이 이상 정보가 없다. 추론에 쓸만한 소재가 너무나도 한정적이다.
“그 녀석도 그래….”
가장 납득이 안 가는건 에이든의 태도다. 수 천 년 동안이나 용과 싸워 왔다면서, 뭐가 그렇게 태평한 걸까.
상황이 요상하기 그지없는데, 지금 당장 저 문을 열어젖히고 용이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은데, 여유롭게 낙오자나 보살피고 있다니. 신경이 어떻게 되먹은 거야?
내가 에이든이라면…. 내가 정말 그라면….
“……에휴. 나도 나네.”
괜한 생각은 그만두자.
그는 내가 아니다. 마치 내가 레온하르트가 아닌 것처럼.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이뤄질 수 없는 꿈을 꾸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이미 부러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 바로 지금의 나다. 지난한 추론 끝에 어떠한 결론이 나오든,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고작 일 년간 도망쳐다닌 나보다 그가 용을 더 잘 알겠지. 용이란 건 대게 자만심으로 가득 찬 녀석들이라, 우리가 도망치든 말던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다. 그것도 에이든 덕분에.
모호하고 부정확한 추측보단 확실하고 분명한 사실을 바라보자.
나는 워낙 남의 호의가 낯선 사람이다. 에이든의 순수한 마음이 놀랍고 어색해서, 혼자 괜한 호들갑을 떨고 있는지도 모른다.
호의를 솔직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예의가 아니다.
게다가 그런 건 촌스럽고 추하잖아?
지금은 그저 믿고 기다리자. 에이든도 생각이 있겠지.
꼬르륵.
…그가 가져올 먹거리에 조금 흥미가 가기도 했다.
꼬르르르륵.
아니, 사실 그게 더 중요했다.
보글보글.
휘적휘적.
“하아…. 이 숲의 냄새.”
이슬에 담긴 버섯과 나물들이 보글보글 끓는다.
에이든이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그릇을 이리저리 휘젓는다.
돌아온 에이든은 놀랍도록 쌩쌩했다. 안색도 밝고, 행동도 시원시원 한 것이, 처음 볼 때보다도 더 강인하고 의지에 불타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말로는 숲의 기운을 받기 위해 흙을 코로 흡입하고, 수액을 혈관에 주입했다고 하는데…. 대체 어디까지가 진심인지는 모르겠다. 에이든이 그런 농담을 하는 성격도 아니고….
엘프는 사실 변태 종족인 걸까. 용도 그렇고, 내가 이종족에 가졌던 막연한 환상들이 점차 산산이 조각난다.
어쨌든 그는 방과 식기들을 뒤덮었던 먼지를 손짓 한 번에 다 날려버리고, 가져온 식재료들을 요리하기 시작했다.
마나도 금세 다 회복한 건지 불과 물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완연한 봄의 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운다.
배가 고프다. 고기와 술이 없지만, 처음부터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다. 일단 입안에 쑤셔 넣을 수 있는 거라면 뭐라도 좋다.
“자! 몸을 보양하고 주린 배를 채우기엔 제격일걸세.”
“으, 응. 고마워.”
따스한 국물이 가득 든 그릇을 받아든다. 스튜? 수프? 그렇다기엔 국물이 맑은데. 그래, 먹어보면 알겠지.
“…맛있어.”
“흥, 당연하지 않나. 숲과 엘프가 함께 만든 음식인데.”
그 재수 없는 반응을 차치하면, 정말 군더더기 없는 맛이었다.
따스한 국물이 지치고 식은 몸을 데워주고, 맑고 깊은 맛이 허한 기운과 정신을 가득 채워준다. 버섯과 나물로만 만든 국물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다.
포근하고 온화한 마음이 절로 샘솟는다. 국물을 삼켜도 그윽하고 감미로운 맛이 여전히 혀를 감싸 안는다.
짜고, 달고, 쓴 것 말고는 맛을 몰랐는데, 이런 맛이 있었다니.
“더 줘.”
나는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우고 에이든을 재촉했다. 에이든은 쓴웃음을 지으며 또 한 그릇 가득 퍼준다.
“체하겠어. 누가 와서 안 빼앗아 가니 천천히 좀 들게.”
“시, 시끄러. 이 씨….”
이렇게 따스하고 정성스러운 음식을 먹어본 건 처음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살기 위해서 먹는 음식인데도 그랬다.
“하하하. 흘리겠네, 흘리겠어. 숙녀가 입 주변이 그게 뭔가.”
“안 쓰던 왼손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뭐, 너가 먹여주기라도 할 거야?”
“흐음…. 안 그럴 이유야 없지. 자, 아앙 하게.”
“뭐뭐뭐뭐뭐.”
“왜 그러나? 자, 아앙.”
“미친거 아냐?! 돌았어!? 돌았냐고! 야! 치워! 치워어! 아아아악!”
…….
….
나야말로 조금 미친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에이든하고 둘이 이렇게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텐데.
나는 변하지 않는 바보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