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의 화원-46화 (46/62)

〈 46화 〉 핀 (9)

* * *

아버지의 명령대로 계속 핀이란 인간을 주시하고 있다.

주시하고 있긴 한데….

‘이거, 뭐 변하는 게 없으니.’

기헨의 수도 성 외곽, 이름도 없는 작은 숲.

그 숲속에 버려진 작은 오두막에는 핀과 에이든이란 두 남녀가 산다.

나는 작은 오색딱따구리의 모습으로 분해 그 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다.

찌르르, 찌르르. 뭔가를 크게 착각한 딱따구리 하나가 시끄럽게 구애를 하지만 가볍게 무시해준다.

수수하고 눈에 안 띈다고 암컷으로 변하는 게 아니었다. 수컷 딱따구리는 정말 다급한 건지 날카롭고 시끄러운 소리를 울린다. 야, 뭔데. 꺼져.

‘아효…. 진짜,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둘이 도성에서 도망친 지 벌써 한 달째다. 크라우스의 수하들의 움직임도 없고, 둘의 일상에 변화도 없다.

아버지의 생각도 모르겠지만, 크라우스의 생각도 모르겠다. 그 녀석도 분명 아버지처럼 수하를 보내 둘의 상황을 살피고 있을 터.

크라우스는 아버지의 부대에서 직접 저 여자를 빼돌렸다. 그 의중이 분명 있을 거다.

핀과 레온하르트(아니, 리오나 이모라 해야 하나). 둘은 비록 겨우 일 년이었지만, 인간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용에게 저항한 이들이다.

용들은 보통 가장 끈질기고 격렬하게 저항한 전리품을 최고의 그릇으로 꼽는다. 호사가들은 영혼의 순수성이니, 강인한 육체와 마나의 증명이니 하며 그들을 치켜세운다.

하지만 그건 그냥 일종의 트로피 같은 거다. 용들의 왜곡된 정복욕의 발로지.

뭐, 그쪽으로는 아버지가 가장 심하니 왕한테 뭐라 할 건 아닌가.

아무튼, 그 왕이란 녀석은 그렇게 친히 빼돌린 최고급 소재를.

“핀, 그럼 다녀오겠네.”

“…해가 지기 전까지는 돌아와. 심심하니까.”

왜 저런 엘프 따위에게 맡기고 있느냔 말이다.

에이든. 지금으로서는 가장 의문스러운 인물이다.

아일라 아줌마나 어머니와 같은 엘프라곤 하는데, 전혀 행적이 조회되지 않는다.

엘프. 만 년 전 지상을 지배했고, 가장 오랫동안 용에게 대항한 종족.

지금은 용의 그릇으로서 몇 명 남아있을 뿐, 오래전에 절멸한 거나 다름없는 종족.

용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다른 이종족과는 차원이 다르게 강인하고, 지혜롭다.

그 엘프 암살자가 정말 아직 있다면 어머니 때처럼 큰 사달이 났을 것이다. 용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건 같은 용을 제외하면 그 녀석들뿐이니까.

저들은 크라우스의 부하들에게 발각까지 되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저들은 저런 태평한 일상을 영위할 수 없겠지.

왕은 왜 스스로 빼돌린 여자를 저런 출처가 불분명한 엘프랑 같이 기헨의 수도에 던져 놓았을까.

아버지는 뭔가 아는 눈치였지만 나는 하나도 모르겠다. 어머니를 버린 그 개자식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분명 크라우스가 핀과 함께 빼돌린 물건 중에는 오래된 엘프의 시체도 있었지.

에이든은 그가 만들어낸 생명체라도 된단 말인가.

어머니께 한 번 물어봐야 하나…. 괜히 과거의 일을 떠올리게 하는 건 싫은데.

“왜, 내가 없으면 쓸쓸하고 두렵나?”

퍽. 에이든의 가슴에 핀의 오른 주먹이 박힌다.

“돌아오기 싫으면 나 버리고 혼자 도망가던가. 흥!”

“자넨 또 말을….”

…아주 꿀이 떨어지네, 꿀이 떨어져.

종족 차가 있다지만 누군 천 년 넘게 동정인데, 세상 참 불공평하다. 나는 벌써 한 달째 이런 염장질을 직관 중이다.

차라리 둘의 진도가 빠르면 눈요기라도 할 텐데. 둘은 꽁냥대기만 할 뿐 거사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둘 다 부끄럼쟁이에다 답답이들이다.

핀이 원래 남자라는 것도 걸림돌이라면 걸림돌인가.

핀의 여자 모습밖에 모르는 에이든은 그리 상관없다는 투다. 뭐, 이해는 간다. 내가 봐도 핀의 몸은 정말 매력적이고 육감적이다. 남자라면 누구나 탐할만하다. 정작 그 핀은….

핀은 다른 이의 사랑과 따스함이 무척이나 고픈 인간처럼 보인다. 굳이 정애가 아니어도, 그저 남과 저런 따스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 자체가 기쁘고 즐겁겠지.

자신의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도 모를 것이다. 어휴, 좋은 구경하기는 텄다. 텄어.

“아무튼 조심해서 다녀와. 어제도 하루종일 내 발목 만져줬잖아. 힘들면 나한테 말 좀 하고.”

“됐네. 얌전히 기다리고나 있게. 그럼.”

에이든이 핀에게 등을 보이고 손을 흔든다.

핀은 현관까지 나와 그런 에이든을 배웅하고 있다. 아니, 신혼부부냐고.

다친 몸을 비관하던 것도 잠시, 그녀는 멀쩡히 걷고 생활하고 있다. 에이든의 치유 마법은 역시 엘프라 할만했다.

치유 마법은 꽤 어려운 마법이다. 막대한 마나 소모는 물론이고, 마나와 육체의 관계 등 계산할 것도 무척이나 많다.

인간 마법사라면 긁힌 상처를 치유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엘프나 용이라면 거의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

남이 만들어낸 가짜 생명체가 그런 마법을 해낼 수 있을까. 으음…. 회의적이다. 그러면 에이든은 정말 어머니와 같은 엘프인 걸까.

에이든은 누구고, 크라우스의 의중은 뭐지? 핀과 에이든을 계속 관찰해도 의문만 늘어간다.

‘응?’

무언가가 이 숲으로 다가온다. 크고, 어마어마한 질량을 가진 무언가가.

그 사실을 깨달은 에이든이 굳은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모르는 핀은 그저 멀뚱멀뚱 에이든을 바라볼 뿐이다. 질리지도 않고 내게 구애하던 수컷 딱따구리도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건 점점 더 다가온다. 명백하게 저 둘을 노리고 있다. 이건, 이건….

투콰앙!

선혈과 불꽃을 연상시키는 붉은 용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용은 착지점에 있던 오두막을 그대로 밟아 부숴버렸다.

“꺄악!”

“핀!”

에이든이 핀을 감싼다. 핀은 간신히 그 파괴에서 벗어난다.

용은웅장한 그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마치 벌레를 내려보는 것처럼 둘을 바라본다.

크라우스다. 이제 와 갑자기 대체 왜.

그에겐 정해진 수순일지도 모르지만, 나와 모두에겐 너무나도 갑작스럽다.

나는 날아오른 비둘기를 마력으로 급히 잡아 아버님께 보낼 기별을 붙였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나는 모든 걸 목도해야 한다.

중요한 건 핀이 아니라 왕이다. 그래, 처음부터 아버님의 계획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아, 아아.”

손이 떨린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용에게 쫓겨본 적도 있고, 죽을 위기를 넘겨 본 적도 있다.

하지만 저건 격이 다르다.

우리의 오두막은 형체도 없이 무너져 산산조각이 되었다.

저 용은 그저 착지했을 뿐인데.

거대하고, 붉다. 몸을 감싼 비늘은 잘 닦인 공예품처럼 빛나고, 주위에 일렁거리는 마나는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짙다.

대지를 짓밟은 발톱과 꿰뚫는 듯한 저 시선은 나에게 생명체로서의 격의 차이를 알려주고 있다.

저게 용. 우리가 두려워하던 진짜 용.

나는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에이든의 뒤에 주저앉고 말았다.

역시 왔어. 우릴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어. 끝, 끝이야.

마치 호랑이를 눈앞에 둔 토끼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머리가 얼어붙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어서 도망쳐야 하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핀. 괜찮아. 그대로 가만히 있어.”

에이든이 나와 그 용 사이에 섰다. 나를 안심시키려는 걸까? 하지만….

그때의 그 멍청한 용들이 아니다. 저건 진짜다. 에이든도 그걸 알 텐데.

“나의 것에서 손을 떼라. 엘프.”

용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불쾌하고, 소름이 끼치는 감각.

나의 것? 나를 말하는 거야? 에이든이 아니라 나를? 왜?

“뭔가, 자네는.”

숲을 배회하던 바람이 에이든의 손끝에 모여든다. 숲의 은혜가 뭉쳐 마나로 환원된다. 에이든은 전혀 물러설 마음이 없어 보였다.

에이든의 말에 기분이 상한 걸까. 용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흥. 긴 삶을 재촉하지 마라, 엘프. 적절한 조치가 끝나면 너도 나의 것이 될 터이니.”

“거 참 좆같은 소리만 하네.”

용이 앞발을 뻗었다. 흉측한 발톱이 주저 없이 에이든의 머리통을 향한다.

“에이든!”

그때, 어마어마한 풍압이 에이든의 손끝에서 풀려났다. 그를 감싼 바람의 장막이 용의 손톱을 가로막았다.

“으으윽!”

그러나 힘의 차이는 명백하다. 용은 그저 가볍게 힘을 싣고 있는데, 에이든은 몸의 모든 마나를 불태우며 간신히 버틸 뿐이다.

“제법이야. 어떻게 탈출했는지 알만하군. 지금껏 도망쳐다닌 것도 그렇고, 나쁘지 않은 소재인데 말이야.”

발톱이 다가온다. 거센 바람 사이를 파고든다. 저 용은 정말 에이든이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런데 내가 너같이 버릇없는 엘프에게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아아아아악!!!”

용이 한층 더 거센 힘을 발톱에 싣는다. 에이든과 내 주위의 땅이 움푹 꺼진다.

에이든의 목숨은 풍촉과 같다. 나는, 나는 또 용에게 내 친우를….

안 돼. 그것만은 안 된다.

어차피 이 목숨은 그에게 빚진 것이다. 그 덕분에 잠시 행복한 꿈을 꾸었다. 이렇게 빚만 지고 끝이라니, 내 성에 맞지 않는다.

용이 원하는 건 그가 아니라 나다. 내가 희생한다면.

“흐윽…!”

잠긴 목을 쥐어짠다. 어서 말을 해.

제 바람에 할퀴어진 에이든의 팔에서 피가 솟구친다. 이젠 정말 시간이 없다.

에이든의 용기에 비하면 티끌 같은 일이다. 나는 군인이다. 언제 어디서나 책임을 다해야 한다.

나는 움직여지지 않는 혀와 입술을 간신히 짜내 말을 이었다.

“요, 용! 내가! 내가 필요한 거…! 지…?”

그러나 그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쿵 하는 굉음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에이든이 설마 버티지 못했나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내 이해를 아득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순백색의 용이 그 붉은 용의 옆구리에 힘껏 몸통 박치기하고 있었다.

거체와 거체가 부딪힌다. 붉은 용은 생각지도 못한 일격에 균형을 크게 잃고 숲에 쓰러진다.

나무가 뿌리째 들려지고, 돌풍과 흙먼지가 하늘을 향해 솟구친다. 나는 그 어마어마한 질량에 그저 압도당한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갑자기 나타난 붉은 용도 놀라운데, 저 흰 용은 또 뭐야? 지금 우릴 도와준 건가?

“뭐 하나! 빨리 도망치게!”

처음 듣는 목소리, 하얀 용의 것이다. 진의는 몰라도 그의 말이 맞다. 하, 하지만….

“으윽, 아하악….”

에이든이 입과 코에서 피를 쏟는다. 힘을 완전히 소진한 건지 그대로 무너져 땅에 무릎을 꿇는다. 도저히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내 상처도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그를 업고 뛰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으어억…. 마르크…?”

불의의 공격에 당한 붉은 용이 쓰러진 몸을 일으킨다. 시간이 없다.

둘 다 똑같이 두려운 용이지만, 두른 마나나 체구를 비교하면 붉은 용이 더 크고 맹렬하다.

이름 모를 용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순 없다.

“에이든! 에이든!”

애타게 에이든을 불러봐도 그는 묵묵부답이다. 숨은 쉬고 있지만, 눈의 초점이 맞지 않는다.

“흐윽…. 흑! 에이든!!!”

바보, 또 나를 지키다….

이젠 아무래도 좋다. 발이 또 부러져도 좋아. 내가 걷고 숨 쉴 수 있는 건 전부 너 덕분이니까.

난 나보다 훨씬 큰 그의 몸을 혼신의 힘을 다해 잡아들었다. 그의 팔을 내 어깨 위로 둘러업고 부축한다. 온몸의 신경이 비명을 지르지만 상관없다. 일단 도망쳐야 해.

“…가스파르가가 직접 내 권위에 도전한다 봐도 되겠지?”

“하, 어미를 끔찍이 생각하는 방랑아의 돌발 행동이죠. 저도 엘프 암살자와 꽤 각별한 사이거든요.”

용들이 뭐라 뭐라 하지만 전혀 모르겠다. 나에게는 에이든이 제일 중요하다.

에이든은 계속 피를 쏟는다.

끊어질 것 같은 다리를 이끌고 걷고 또 걷는다.

에이든. 제발 살아 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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