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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화원-47화 (47/62)

〈 47화 〉 계획 (1)

* * *

어두운 연구실 안. 태고의 마나를 담은 마법석이 기이한 청록색을 발한다.

텅 빈 유리병과 투박한 쇠꼬챙이, 온갖 생명체들의 혈액과 정액이 저마다의 빛으로 그 청빛을 반사한다.

나는 비릿한 냄새를 참으며 천천히 그 마나를 다스리고, 정제한다.

무엇과도 닿지 않았고, 아직 무엇으로도 변하지 않은 그 마나는 마법석 속에서 거세게 소용돌이치며 내 손길을 거부했다.

이곳은 내 성의 지하 연구실. 나는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수백 년간 방치되었던 이곳을 다시 찾았다.

철창에 갇힌 붉은 도마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쪽저쪽 고개를 돌렸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영 모르는 눈치다.

나는 계속해서 태곳적 마나를 다스리며 조심스럽게 그 마법석을 도마뱀에게 가져다 대었다.

마나에 반응한 도마뱀이 네 발을 바쁘게 옴짝달싹한다. 고통이라도 느끼고 있는 건지 우왕좌왕하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제발…. 제발!”

나는 용을 만들고 있다.

정확히는 용의 조상을.

‘계획’이란 건 간단하다. 나와 용이란 종족의 착오를 되돌리는 일이다.

뒤엉키고 뒤죽박죽이 된 것을 있어야 할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용의 수컷의 일정수를 용의 암컷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이종족들을 용의 손아귀에서 해방하고, 더럽혀진 용의 혈통을 온전히 바로 세운다.

이 도마뱀은 그저 용의 대리에 지나지 않아.

이론은 이미 완벽하다. 용이란 건 단지 조금 변형된 도마뱀일 뿐이다. 이 도마뱀의 성별만 바꿀 수 있다면 용은…. 나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

사실 나의 계획의 뿌리가 되는 의견은 용이 종족 보전의 위기에 빠진 그 첫날부터 나왔다.

회의 테이블의 말석에 앉은 한 용이 자랑스럽게 손을 들고 말했다. 용의 수컷을 암컷으로 바꿀 수 있다면 바로 해결된다고.

이미 이종족의 성별을 바꾸는 일은 성심 불량한 용들이 심심풀이로 많이 하던 짓이었다. 그 마법을 그대로 우리 자신들에게 쓰면 되는 일이다. 간단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뒤탈도 없고, 부작용도 없고. 다들 모여 머리 꽁꽁 싸매고 열을 낼 일도 아니다.

회의 끝! 종족의 위기 끝! 이종족도 용도 행복한 그 이전 평화로운 생활로….

하지만 사태는 그렇게 태평하게 끝나지 못했다.

처음 그 안건이 제시되었을 때, 테이블을 둘러싼 용들은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했다.

회의를 주재하던 선왕도 짧은 손짓으로 그 의견을 일축했다. 의견을 낸 그 용은 잠시 당황하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쭈구리처럼 고개를 숙였다.

당연하다. 당장 우리 중의 누가 암컷이 되고, 누가 수컷으로 남는단 말인가.

안 그래도 자존심 높은 용들이 순순히 따를 리 없었다. 선왕도 그렇다. 정말 어렵게 모두를 회의에 장으로 이끌었는데, 그 안건이 통과되면 판이 어찌 되겠는가.

공포심이고 자시고, 서로 목숨을 걸고 불과 발톱을 겨룰 것이 뻔했다.

수천, 수만 년 동안 수컷으로 살아온 녀석들보고 하루아침에 암컷이 되라니. 누구라도 종족의 위기보다 개인의 명예를 우선시하지 않을까?

우리가 처한 상황도 상황이었다. 남은 평생 씨받이가 되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용이란 종속은 겉으로는 실실 웃거나 굴종해도, 속으로는 서로를 깔보고 다 자기 아래라 생각하는 놈들이다. 이성끼리의 성관계가 점차 줄어든 건 그 영향도 컸다.

그런데 이제 그 역겨운 놈한테 박고 박히라니, 그것도 아름다운 이성도 아니라 하루 전까지 보석과 금화로 자존심 싸움을 하던 그 개새끼들하고.

그 회의장에 있던 나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그 말에 찬동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옳았다. 틀린 건 나와 나머지 머저리들이다.

용들의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뒤틀려버렸을까.

아예 멸종당한 종이 셀 수없이 많다. 단순한 종의 멸종을 논하는 게 아니다. 그들이 쌓은 시와 노래, 문화재와 업적들은 모조리 용에게 파괴당하거나 흡수당했다.

사실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데도, 저 자신을 남기거나 보전할 의지가 없으니…. 그들의 문화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 외에도 더 심각한 문제가 또 있다.

자신의 영생뿐이 아니라, 그릇의 영생도 이루어야만 했던 용들은 지상의 생명력을 닥치는 대로 착취해 하늘로 가져가길 반복했다.

땅은 메마르고, 나무는 시들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땅에 살 수 있는 지적생명체는 없었다.

용은 점령지에 죽음을 뿌렸다. 그게 결국 자멸로 향하는 길이란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요즘은 조금 자제하고 있지만, 크라우스의 성격을 생각하면 언제 다시 착취가 시작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지금 용의 사회에서 정제된 마나는 곧 금이자 보석이니까.

‘그 멍청이….’

나는 어딘가 의미심장한 그 붉은 도마뱀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머리에 자그마한 뿔이 자라고, 발톱도 날카로워졌다.

나도 믿기지 않지만, 이게 용의 선조 님이다. 이론상으로는 그렇다.

앞으로 몇 개의 자극을 겪고, 몇 번의 진화를 거쳐야 하는지는 모른다. 그런 건 아무 상관 없다. 나의 몸을 흐르는 마나와 이 도마뱀의 몸을 흐르는 마나는 근본적으로 같으니까.

진화. 그건 생명체가 피할 수도 없고, 조작할 수도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나에겐 여전한 의문이 있다. 크라우스와 같은 지금의 용들은 정말 용일까.

마나의 근본은 같다. 내 아들들은 내 정액에서 나온 게 맞다. 그들의 첫 형태가 어떻든, 일단 용의 형상을 취할 수도 있다. 그 녀석들도 자기 자신을 용이라 부르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그래도 왠지 거부감이 든다. 나는 이 도마뱀을 용이라 부를 수 없다.

이건 용이지만 용이 아닌 그 무언가다. 그들도 그렇다.

종족 보전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용들은 생식의 활로가 보이자마자 마구잡이로 이종족을 붙잡고 그릇으로 만들었다.

말 그대로 용의 바겐 세일이자 대량 생산 체제였다.

그릇은 쑴풍쑴풍 알을 낳아 제 역할을 다했고, 구세대의 용은 흐뭇하게 제 자식을 바라봤다. 내가 만든 프로그램에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수 천 년이 지나고 일이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태어나는 용들의 평균적인 지능과 마력이 낮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크라우스와 같이 씨와 토양이 좋은 용은 여전히 강대한 육체와 무한한 마나를 가지고 태어났으나, 그렇지 못한 용의 상태는 심각했다.

수컷 용도 결국은 늙는다. 마력도 정자도 쇠한다.

그릇의 자궁도 결국 용이 만드는 것이다. 완벽했던 내 프로그램은 시간이라는 파도 앞에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모든 용이 나나 크라우스처럼 강하진 않다. 게다가 아직도 생각 없이 계속 애를 싸지르고 있으니, 종족의 쇠락은 불 보듯 뻔하다.

게다가 이제 곧 신세대의 용들이 그릇과의 유희를 넘어서 아이를 가지려 할 것이다. 만약 평균 이하의 용이 자식을 가지면 어찌 될까. 또 그 자식의 자식은…. 머리가 어지럽다.

저열한 용들은 지금도 지상에서 인간 목장이나 관리하고 있겠지. 나는 그런 걸 나와 같은 용이라 인정하기 싫다.

자연스럽게 용의 사회에도 균열이 일어났다. 왕 이외에는 명목상으로 평등했던 용들이, 지금은 계급과 혈통으로 세세히 나누어졌다. 마나와 그릇의 관리를 위해 천한 일과 귀한 일이 만들어졌다.

분열과 고립은 우리가 이미 걸었던 길이다. 나의 의식도 이미 이상해져 버렸다.

은둔과 자멸을 택한 늙은 암컷들이 옳았단 말인가. 아니야. 난 이 이야기를 그렇게 끝낼 마음이 없다.

“…….”

나는 그 변형된 도마뱀에 나의 마나를 주입하고 마법 술식을 새겼다.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수컷 도마뱀은 암컷 도마뱀이 되었다. 만져지는 성기의 형태가 다르다.

역시 나의 이론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용들이 오냐 하며 나의 마법을 받아들일 리 없다. 처음부터 중요한 건 마법 이론 따위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힘이다.

크라우스의 아래로 정렬된 사회 구조를 뒤엎어야 한다.

내 마음속에 들끓는 수많은 명분과 죄책감. 모든 게 나로 인해 시작된 일이니 내가 끝을 내야 한다.

용의 순수성이 더럽혀지는 꼴을 더는 볼 수 없다. 이 이상 고통받는 이를 늘려서는 안 된다. 내가….

“내가 책임지고 끝을 내야….”

“거짓말.”

리오나의 청아한 목소리가 연구실에 울려 퍼졌다.

그녀에게는 나의 진심과 계획을 모두 말했다.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았다.

“리오나?”

그녀는 부푼 배를 이끌고 나에게 다가온다. 내게 질렸다는 듯, 어딘가 능글맞은 미소를 짓는다.

“가스파르 넌 책임이니 뭐니 하는 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잖아. 그렇다고 나를 위한 것도 아니고.”

“아니, 그야….”

그녀의 말이 옳다.

나는 언제나 나를 속였다. 내가 솔직해지는 건 그녀의 앞에 섰을 때뿐이다.

제 입술이 일그러지는 게 나에게도 느껴졌다.

명분이니, 염치니, 전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용의 순수성? 미래? 나한테 피해만 안 온다면 별 상관없다.

다 구실일 뿐이다. 부하들과 새로운 세상의 백성들을 설득하기 위한.

노쇠한 용은 그런 일로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이 계획을 구상만 하다 폐기한 이유가 있다.

원하는 건 잊고 있었던 복수.

이미 죽은 선왕과 그 아들을 위한 나의 처절한 복수.

그리고 내 사적인 욕망.

리오나가 방아쇠가 되었다. 나도 이게 그녀를 위한 거라고 착각했을 정도다.

그녀는 그게 나를 위한 일이라면 하라고 했다. 그녀는 나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말해주었다.

그거면 됐다. 크라우스가 핀에게 무슨 변덕을 부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준비는 얼추 끝났다.

그 정도로 열중이니, 결국 크라우스와 핀은 통할 것이다.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그래, 그렇게라도 웃는 게 좋아. 멋져, 가스파르….”

리오나가 아슬하게 미소지으며 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나의 알이 커짐에 따라 그녀의 매력도 한층 성장한 것 같다. 가끔 보이는 요염한 태도와 말씨는 숨이 멎을 정도다.

계획도 좋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그녀를 즐기지 않으면 손해다. 어차피 여기는 메이드들도 안 오니, 이대로….

“아, 맞다.”

내가 그대로 리오나의 입술을 훔치려 할 때, 리오나는 무언가 깨달은 듯 편지 한 장을 꺼냈다.

“가스파르 방에 이런 게 있던데?”

무안해진 나는 조금 헛기침을 하고 그 편지를 받아든다. 요즘 시대에 마법도 아니고 편지라니, 그 녀석 말곤 없다.

‘아버지, 가까운 시일 내에 찾아뵙겠습니다. 왕이 행동을’

마르크인가.

크라우스가 움직여? 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가까운 시일이라니. 녀석답지 않은 애매한 표현이다. 그래서 정확히 언제라는 거야.

글도 잘려있다. 분명히 쓰다만 편지다. 대체 뭐지.

“어? 아일라 선배님?”

나는 마르크가 말한 그 시일을.

“주, 주인님! 마르크 도련님이 피투성이가 되셔서 성에…!”

지금 바로 알게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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