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의 화원-48화 (48/62)

〈 48화 〉 계획 (2)

* * *

“내 연구실엔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일라.”

“하, 하지만 주인님!”

가스파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아일라의 말을 잘랐다. 그 충격적인 소식도 마치 자신의 예상 안이라는 양.

아일라는 안절부절못하며 리오나와 가스파르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다. 그때.

“어? 분명 그…. 마야 선배 아들?”

리오나가 아일라의 등 뒤를 가리켰다. 기척을 느낀 아일라도 뒤를 돌아보고는 깜짝 놀란다.

“도, 도련님! 분명 메이드들에게 치유를 받으시라고…!”

“하, 아무리 그래도 아들이 다쳤다는데 너무 하신 거 아닌가요, 아버지. 으, 으윽….”

그곳에는 피칠갑을 한 마르크와 똑같이 피투성이인 수컷 엘프 한 명이 있었다.

온몸이 만신창이인데, 마르크는 발을 질질 끌며 그 엘프를 부축한다. 엘프는 이미 의식이 없는지 눈을 감고 축 늘어져 있다.

발톱에 할퀸 상처는 물론이고, 데이고, 베이고…. 정말이지 끔찍한 몰골이었다. 떨어진 살점에 군데군데 하얀 뼈까지 보인다.

연구소의 비릿한 냄새에 쇠의 스산한 냄새가 섞인다. 리오나와 아일라 모두 놀란 표정이지만, 가스파르는 조금 미간을 찌푸릴 뿐이다

“마르크, 난 너의 출입도 허가한 적이 없다.”

“하여간, 그 개똥 같은 허세 좀….”

털썩.

마침내 정신을 잃고 쓰러진 마르크를 가스파르가, 같이 고꾸라진 엘프를 아일라가 간신히 떠안는다.

“에이든….”

무어라 회상할 것이라도 있는지, 아일라가 수컷 엘프를 끌어안고 괴로운 표정을 짓는다. 가스파르는 그녀를 시켜 그 에이든이라 불린 엘프를 자신에게 가져오게 했다.

“이렇게 금방 올 거면 기별은 왜 붙였나. 그리고…. 이것 참 그리운 얼굴이구만.”

가스파르가 한 손은 마르크의 어깨에, 다른 한 손은 에이든의 어깨에 얹는다.

곧 그의 손이 푸른 빛을 발하고, 가스파르의 마나가 둘에게 스며든다.

벌어진 상처가 아물고 피가 멎는다. 멍과 화상이 지워지고, 새살이 돋아난다.

아무리 뛰어난 술자라도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다. 체내의 마나가 곧 생명력이란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가스파르의 메이드 중에 죽어가는 엘프와 용을 치유할 수 있을 만큼 큰 마나 용적을 가진 이도 없었다. 만신창이인 몸을 이끌고 가스파르를 찾은 마르크의 판단은 옳았다.

가스파르가 정신을 집중한 것도 잠시, 그 끔찍한 상처들은 순식간에 아물었다. 마르크와 에이든은 잠든 채 고른 숨을 내쉰다.

“후우…. 몸의 상처만 고쳤지 소모된 기운은 나도 못 살려. 아일라. 일단 둘을 손님방에 재우고 깨면 연락해 주게.”

“네. 주인님.”

안정을 찾은 둘에 모습에 진정한 아일라가 다시 완벽한 수석 메이드의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리오나는 어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인다.

그 가스파르도 조금 지쳤는지. 안색이 어둡다.

“…마야는 마르크가 이런 꼴로 날 찾은 걸 아나?”

“아뇨, 미나 말로는 다행히 낮잠을 자고 있었다고.”

시킨 일을 땡땡이치고 말이지. 그녀답다.

“리오나. 너도 잠시 쉬고 있어. 저 녀석들, 밤이 다되어야 깰 것 같으니.”

“으, 응? 나도? 난 왜?”

리오나가 의아하다는 듯 자신을 가리키자 가스파르는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 친우, 핀 이야길 하는데 네가 없으면 안 되지.”

“으읍! 으으! 으으으윽!!!”

의자에 사지가 묶이고, 입이 투명의 실로 꿰매진 에이든이 말로 엮이지 않는 기성을 내지른다.

에이든, 리오나, 가스파르, 마르크, 아일라.

용과 인간과 엘프가 뒤섞인 기묘한 5인이 가스파르의 집무실에 모였다.

“그러면 저 에이든이란 남자가 진짜 엘프 암살자라고….”

“맞아요, 도련님. 엘프가 멸망한 그 날, 마야와 함께 용과 그 지배를 끝내리라 결의한 이들 중 한 명이죠.”

아일라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답한다. 일견 평정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눈밑에 낮지만 분명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머님이랑 함께.”

“으으읍!!!”

에이든이 아일라를 비통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아일라는 그런 에이든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하지만 어머님과는 다르게 그는 어디에도 기록이 없었는데요.”

“거기서부터는 내가 설명하도록 하지. 엘프가 멸망하고 이천 년 후, 때를 기다린 그 엘프들은 나의 암살을 획책했어. 그럴 만도 해. 그들을 멸망시킨 모든 원인이 나에게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리오나가 짐짓 놀란 듯 에이든을 노려보지만, 다른 이들은 그리 놀란 기색도 없이 묵묵히 가스파르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때 가장 먼저 나선 것이 저기 앉은 엘프고, 물론 처절히 실패했지. 당시의 나는 아직 탐구심과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어. 얼마 남지 않은 순수한 엘프의 몸이 궁금하기도 했고, 아직 하고 싶은 연구도 많았지. 나는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내가 습격당했다는 사실과 그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웠네.”

에이든은 이제 불타는 증오를 숨기지 않는다. 사람을 찔러 죽일 듯한 눈빛으로 가스파르를 노려본다.

“몇백 년간 긴히 가지고 놀다가 흥미를 잃어 그대로 얼려두었다만…. 그걸 날름 가져갈 줄이야.”

“크라우스는 무얼 하고 싶은 걸까요? 핀 모리츠만 가져가 노리개로 삼으면 삼았지. 그를 대체 왜?”

“너도 네 어머니가 어떤 경위로 나의 종이 되었는지 알고 있겠지. 크라우스는…. 왕은 마야를 나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있네. 말도 안 되는 적반하장이지만.”

마르크가 정말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리오나와 에이든이 서로를 멀뚱히 바라본다.

“자신도 여자를 빼앗기 위해서 저 에이든이란 조연을 등장시킨 걸지도 몰라. 연이 깊은 엘프 암살자에 호기심이 동했을 수도 있고.”

“정말 그저 그런 이유로…?”

“그게 사소한 일인지 아닌지는 용마다 다르지. 지위상으로는 그가 위인데, 내가 그가 버린 식솔을 주웠으니 고깝게 볼 만도 해. 뭐….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핀 모리츠를 조교하는데 저 망나니의 존재를 써먹는다거나. 진실은 그 녀석만 알겠지”

“하아….”

마르크는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핀 모리츠라는 이름에 반응한 에이든이 다시 마르크와 가스파르를 번갈아 노려본다.

“으읍! 웁! 으으!!!!!”

“슬슬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됐지. 입을 풀어주게, 아일라.”

"네, 주인님."

아일라의 손이 잠시 허공을 가르고, 에이든의 입술에 꿰인 무형의 실이 한 땀 한 땀 풀려난다.

드디어 해방된 에이든은.

“이 개 쳐 죽일 육시럴 놈의 가스파르야! 내 너의 장을 끊고 눈깔을 파내어 필히!!!! 우, 우읍!!! 으으읍!!!!! 으으으으으!!!!!”

“하, 역시….”

필설로 하기 어려운 욕설이 좁은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놀란 아일라가 다시 에이든의 입을 꿰매었지만 이미 쏟아진 말을 다시 지우는 건 불가능했다.

“으으으!!! 으아아아아아!!!!!”

그가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자신이 피를 걸고 죽이려 했던 종족의 원수, 가스파르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지금은 손도 까딱할 수가 없고.

용과의 전쟁에서 가장 용맹하게 싸웠다고 알려진 수비대장 아일렌은 그 성별과 이름을 바꿔 여자 종의 복식으로 그 원수를 보좌하고 있다.

‘시발, 시발!!!!!’

무엇보다 마야가 자신과 같이 실패했다니.

자신이 가장 믿고 따르던 암살단 수장 마야가….

그 선왕의 자식에게 굴려지고 버려진 것은 물론, 결국 또 저 원수 가스파르 사이에서 난 아이가 저기 내 눈앞에 있다고?

피가 거꾸로 솟고 화가 복받친다. 이가 닳아 으스러질 정도로 갈리고, 시야는 붉게 타올라 사위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어떻게 세상이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용은 어디까지 잔인하고 무도한 것인가.

자신이 실패한 그 날, 붙잡혀 죽는 것 따위야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피가 뽑히고, 살이 불태워지는 일도 견딜 수 있었다. 몸과 마나를 그대로 얼려질 때는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이렇게나 늦게, 모든 게 끝났을 때 눈을 뜨게 되다니.

그것도 용들의 장난질 때문에.

“으아아아아!!!”

내 당장 저 개자식의 뼈를 끓이고 살을 씹어서, 묻힌 이들의 복수를 하리라.

“진정하게. 그런다고 정해진 사실이 바뀌지는 않아.”

닥쳐, 닥치라고.

“…….”

아일렌은 아예 고개를 돌렸다. 그 입을 꾹 닫은 모습이 무엇보다도 가증스럽게 보였다.

“흐음…….”

마르크라 불린 마야의 아들은 기이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흰 머리와 피부, 녹색의 진한 눈동자 등, 그에게서 마야의 특징이 언뜻 보일 때마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진다.

그리고 저 부푼 배를 이끈 여인은…. 인간인가. 금발에 벽안. 체내 마나의 나이도 핀과 비슷하고, 설마.

“이대로 그를 묶어둘 바엔 그냥 뱉는 대로 말하도록 두죠. 그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당장 사랑하는 이를 빼앗긴 게 바로 어제인데, 그가 견딜 수 없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주었어요.”

마르크가 푼 팔짱을 풀고 담담히 말을 꺼냈다. 가스파르도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에이든,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 그래도 이건 알아두게. 지금은 모든 걸 잃은 것 같아도, 자네에게 남은 게 아직 있지 않나. 우리도 그걸 되찾고 싶네. 자네가 싸워야 할 대상은 그 붉은 용이지 우리가 아니야. 아일라, 풀어주게. 그가 뭐라 한들 우리의 관계는 변하지 않아. ”

“……네, 주인님.”

다시 아일라의 손이 허공을 가로젓는다. 에이든도 조금 진정한 건지 전과 달리 바로 욕설을 내뱉지는 않는다.

“…난 대체 얼마 만에 깨어난 거지.”

“엘프가 망한 게 만 년 전. 자네가 나를 찌른 게 그 후로 이천 년 후니까. 약 팔천 년만이겠군. 아니, 이미 말했지 않나.”

“흐흐, 시발 진짜….”

에이든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팔 천년이라니 장명종인 엘프도 아득해지는 긴 시간이다. 어마어마한 무력감이 그를 감싸 안았다.

에이든은 그렇게 웃다가.

“너 인간. 핀을 알지 않나?”

갑자기 말을 리오나에게 돌렸다.

“으, 응? 저요? 네. 핀이야 뭐….”

조용히 이야기의 시종을 듣던 리오나가 얼떨결에 대답한다. 에이든은 험악한 얼굴로 그런 리오나를 쏘아본다.

“핀은 평소 당신을 입이 마르게 칭찬하고, 마음속에서 깊이 의지했지. 레온하르트야말로 고결하고 의 높으며, 항상 주위를 행복하게 만들 줄 아는 이라더니. 그 꼴은 대체 뭔가? 그 일신의 평온을 위해 침략자 용에게 몸과 마음을 팔았나! 자네도 국가와 백성을 지키던 기사가 아니었는가! 자네 친우 핀은 지금도…. 으읍!”

“닥치게. 그대로 목뼈를 조각내기 전에.”

“으, 으윽….”

“뭐, 아일라나 마르크에게는 할 말이 없나 보지? 자네는 나에게 바로 붙잡혀 아일라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일 텐데? 자신의 수장 마야가 나와 애까지 낳은 건 관심도 없고?”

“흐, 흐그윽…. 흐, 흐흐흐….”

가스파르는 당장 에이든의 목을 으스러뜨릴 기세다. 에이든은 그렇게 죽어가면서도 웃음을 흘린다.

가스파르가 말하면서도 계속 그 인간을 신경 쓰는 게 보였다. 개새끼. 너에게도 가장 소중한 것이 있나 보지. 엿이나 먹어라. 직접적인 욕설이 안 듣는다면 이렇게라도 그 잘난 얼굴을 뭉개버리고 싶었다.

“아, 아버지 좀!”

“하, 너 같은 비열한 암살자의 생각이야 뻔하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가치를 잘못 평가한 것 같군. 너 따위가 뭐라고. 나는 이대로….”

가스파르는 격해진 감정을 그대로 표출한다. 점점 에이든의 목이 가늘어진다. 마르크도 다급하다. 자신이 어떻게 살려온 정보원인데.

“아니야, 가스파르. 풀어줘.”

“리오나?”

그런 가스파르를 리오나가 제지한다. 나아가 한 발짝 내디뎌 가스파르와 에이든 사이에 선다.

“나는 괜찮아. 에이든 씨…. 라고 했지? 내가 얘기해 볼게. 다들 가만 기다려 줘.”

"뭐…?"

"으, 으윽…. 으……?"

가스파르는 의아하게, 에이든은 어이없다는 듯이 리오나를 바라본다.

리오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옅게 미소지을 뿐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