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계획 (3)
* * *
“케흑, 켁. 크윽…. 그래, 그 더러운 입으로도 의지를 말할 수 있다면 해보시지. 그 어떤 말로도 결의에 찬 내 가슴을 어지럽힐 순 없을터이니.”
죽다 살아난 에이든이 여전한 허세를 내뱉는다. 가스파르의 눈빛이 더욱더 험악해지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자신도 늙으면 이렇게 허세만 가득 찬 어른이 되는 걸까. 마르크는 조금 복잡한 기분으로 아비와 자신이 구해온 엘프를 바라봤다.
일단 지금 이 집무실의 분위기를 장악한 건 리오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단숨에 이 험악한 분위기를 뚫고 대화를 제압했다.
그녀는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점점 에이든에게 다가선다. 모두가 기이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아무 말 없이 의자에 묶인 에이든의 바로 앞까지 이르러서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지, 지금 뭐 하는 건가!”
“에이든 씨는…. 제 친우, 핀을 구해주신 거죠? 정말 감사드려요. 항상, 항상 그 아이가 마음에 밟혀서….”
“아니…….”
리오나의 돌발적인 행동에 에이든은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다시 나온 핀의 이름에 또 표정이 일그러진다.
“하! 핀이 지금 자네를 본다면 무어라 할까? 한때 친우였을 지도 모르나, 그대의 전락한 모습을 혐오하고 부정하겠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국가와 종족을 모독한 그 원흉에게 안겨 알랑거리는 꼴이라니!”
에이든은 한 번 정한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 그가 노리는 건 눈앞의 리오나가 아니다. 그 뒤에 가스파르의 심사를 뒤트는 게 그의 목적이었다.
“……말씀하는 걸 들으면 꽤 핀을 아끼셨나 보네요. 그가 정말 누구고.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시면서.”
리오나의 눈빛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깔린다. 역시 화가 난 걸까? 아니, 오히려 에이든이 조금 흥미롭다는 투다.
“잠시 길을 가다 스친 인연일 뿐이다. 깊은 정은 없어. 그녀를 구한 것도 그저 내 성정이 그리 이끈 것에 지나지 않지. 너 같은 암캐에게 감사받을 일이 아니다.”
“흐응…. 입만 열면 핀의 이야기만 하시면서…. 당신은 그가 남자였을 때를 모르고, 저는 그의 여자 모습을 모르죠. 겨우 한 달 만에 그렇게 푹 빠지신 거 보니, 핀은 꽤 매력적인 여성이 되었나 보죠? 핀이 지금 어떤 모습인지 친구로서 궁금하네요.”
“아무 생각 없대도! 그녀가 가진 무인으로서의 마음가짐과 절개에 잠시 감동했을 뿐, 난 그녀에게 그 어떤 불결한 마음도 품지 않았네. 반평생을 함께한 친우라더니, 그녀를 여자로서만 보는 건 오히려 자네 아닌가! 마음마저 용에게 타락해 썩고 뒤틀렸군.”
리오나의 입꼬리가 아주 약간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면 핀이 ‘여자로서’ 무슨 일을 당해도 좋으신 거죠? 그래요. 평생 거기서 그러고 있어요. 당신이 없어도 가스파르 혼자서 핀을 얼마든지 구해낼 수 있으니까.”
“그럴 테면 그러라지. 내 하늘이 무너져도 용과 손을 잡을 일은 없으니.”
마르크는 어이가 없었다. 에이든은 정말 끝까지 허세였다.
그가 이 한 달간 핀에게 보인 태도를 본다면 설령 어린아이라도 그 마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그냥 이가 썩을 정도로 달고 깨가 쏟아졌으니까.
마르크가 그를 진짜 엘프 암살자로 생각하지 못한 것도 그 이유가 컸다. 뭔 놈의 암살자가 이종족 여자에 빠져 동료와 사명을 내팽개친단 말인가. 한때 마르크는 그를 크라우스가 분장한 모습이라 생각까지 했었다.
지금도 핀에 이야기에만 크게 반응할 뿐, 아일라에게 눈길을 주거나, 마야의 안부를 묻지 않는다. 수천 년을 지나 만난 동료 엘프일 텐데, 통렬한 회한조차 없는 걸까.
그런 얼빠진 놈이 어떻게 그렇게 당당히 여자의 절개와 복수를 말하지.
아니, 어쩌면….
어쩌면 그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엘프의 세계와 암살단은 이미 멸망했고, 용에게 거역할 수단은 이제 남지 않았다는 것을.
감옥에서 눈을 뜨고, 핀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부터일까? 아니면 크라우스의 붉은 자태와 마주쳤을 때?
시기는 중요하지 않다. 확신은 아니어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겠지.
그가 눈을 뜨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를 무표정으로 처리하는 가스파르의 얼굴과 검은 실험실일 것이고,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제 몸이 얼어붙는 숨 막히는 감각이었을 터다.
엘프가 멸망한 것은 그가 얼어붙기 이천 년 전이다. 엘프 암살단과 그 뜻이 남았다 하더라도, 마음이 꺾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게다가 실험실에서 정말 볼꼴 못 볼 꼴 다 보았겠지, 드워프나 고블린 같은 다른 이종족 실험체가 죽는 것을 봤다 해도 놀랍지 않다. 그가 알던 지상은 거의 모두 용의 손아귀에 떨어진 시기였으니까.
그는 가스파르의 실험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마음을 닫았을 것이다.
그렇게 한 번 마음이 꺾인 그가 다시 눈을 떴다.
무려 팔천 년간 감겨있던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이 그녀, 핀이라면?
만약 그가 깨어난 처음부터 대의와 동료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녀와 자신의 생존만을 생각했다면?
에이든의 이상한 행동들이 이제 납득이 간다. 목적이 처음부터 그녀였으니, 그녀에게 무한정 헌신하는 게 당연하겠지.
그 오두막에서 잠시 몸을 요양하고, 종국에는 핀과 둘이서 용의 손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이나 숲속으로 들어가 여생을 보낼 계획이었을 거다.
어떻게든 그녀를 말로 구슬려, 용과 종족 따윈 모두 잊고 둘만의 행복을 찾으려 했겠지. 크라우스 때문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됐지만.
용에게 미래를 도둑맞은 자들 둘이서 함께 행복을 누리고 싶었을 텐데…. 다시 또 용에게 그녀마저 빼앗기게 됐다니.
그렇다면 그가 하는 말은 역시 말도 안 되는 허세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는 그녀, 핀밖에 없다.
암살자로서의 패기도, 엘프의 긍지도, 용에 대한 복수심마저 껍데기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야말로 그가 아직 살아있는 이유이자, 행동 원리일 터.
설마 리오나도 그걸 알고…?
“핀을 왕에게서 되찾으면…. 가스파르는 저에게 그랬던 것처럼 용의 문장을 그려 넣고, 미약과 세뇌에 절여서, 그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죠. 분명 핀도 저처럼 행복해질 거예요. 그 망나니나 당신같이 여자를 여자로 보지 않는 목석보다는 백배 낫겠죠.”
“으, 으음….”
에이든의 반응이 이전과는 다르다. 다리를 떨고 신음을 내지르며 눈에 보이게 당황한다. 리오나는 그와는 반대로, 천천히 부드럽게 말하면서 에이든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도록 이끈다.
그 말투와 몸짓이 은근하면서도 상스럽다. 리오나의 명백한 노림수지만 그가 피할 방법은 없다,
“핀이랑 함께라면 저도 좋아요. 원판이 워낙 좋으니, 분명 그 녀석도 무척 아름다운 여성이 되었겠죠. 핀도 처음에는 저항하겠지만 결국 가스파르의 여자가 될 거예요. 인간보다 훨씬 지혜롭고 강인한 당신 동료들도 전부 그랬는걸요. 한동안 욕지거리를 내뱉다가도, 주인님, 주인님, 하면서 가스파르의 발밑에 고개를 조아릴 게 뻔해요.”
“으, 으으…. 그건 그떄 가 봐야….”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에이든의 양손이 새하얗게 질린다.
“결국 몸도 마음도 가스파르의 것이 된 핀을, 저는 선배로서 기껍게 맞이하며 여자로서의 몸가짐과 남성을 유혹하는 법을 알려줄 거에요. 그의 마지막 날, 그날이 오면…. 저와 그녀 각자 한 손씩, 가스파르의 손을 이끌고 셋이서 침실로…. 둘이서 같이 몸의 가운데를 활짝 열고, 사랑하는 주인님의 손길을 기다리다 보면 당신과 보낸 쓸데없는 옛 추억따윈.”
“가스파르!!!!! 핀에게 손끝 하나만 대어 봐라! 내 너의 발톱을 뽑고, 사지를 한 땀 한 땀 찢어발길 것이다!!!”
“아니, 난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는데.”
“…….”
참다못한 에이든이 다시 고성을 지른다. 그 언성에는 첫 폭발보다 더 깊고 짙은 증오의 감정이 담겨있었으나, 가스파르의 싱거운 답변에 그의 말문이 막힌다.
“크, 크흠!”
그의 얼굴이 화악 붉어진다. 마음이 활짝 벗겨져 꽤 당황스럽고 부끄러운가 보다.
“허, 이것 참….”
“후훗.”
가스파르와 리오나가 동시에 헛웃음을 흘린다.
그는 이미 다 마음으로 정해놓고 있었으면서, 솔직하지 못한 거다.
자기가 뭘 위해 행동하고, 사고하는지도 모르면서 계속 자신을 속여왔던 거겠지. 그가 처음 보인 과격한 반응도 이미 무너져 내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였을지 모르는 일이다.
몇 달 전까지 똑같았던 누군가가 생각났다.
“지금 제가 한 말은 다 가정이지만…. 핀이 계속 크라우스의 손아귀에 있다면 그건 가정으로는 끝나지 않을지 몰라요.”
리오나가 이미 기진맥진한 에이든에게 추가타를 가한다. 그와 가스파르의 꼬인 인연을 무르고, 핀을 위해 협력할 때라고 이른다.
“크라우스…. 붉은 용 말인가? 그 강인하고, 무도한 용….”
“그래. 당신도 봤잖아? 그 녀석이 얼마나 막무가내에 여자에 미쳤는지. 당장이라도 구하지 않으면 당신네 아가씨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고.”
한참을 듣고만 있던 마르크가 거든다. 에이든이 그 말을 듣고 붉은 용의 모습을 떠올리자, 어제의 기억이 플래시백 된다.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의 보금자리를 부숴버린 그 붉은 용.
아픈 몸으로 자신을 들고 뛰었던 핀, 그런 그녀의 외침을 듣고 다시 일어난 자신.
살과 뼈를 꿰뚫었던 붉은 용의 발톱과 나를 살리려고 발악하는 하얀 용의 날갯짓.
붙잡혀 가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핀의 목소리까지.
어지럽고 아득하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만….
'하.'
자신이 하려는 행동과 말이 믿기지 않는다. 용에게 내 전부를 잃었는데, 이제는 그 용과 손을 잡으려 한다.
모든 게, 이 모든 게 그 인간 여자 하나 때문이라니.
운명의 여신이 있다면 바로 죽통을 갈겨주고 싶을 정도다. 그 어이없는 사실에 오히려 웃음이 나고 용기가 솟구친다.
그래, 어차피 지금의 나에게는 뜻을 함께한 동료도, 돌아갈 조직도 없다.
무슨 짓을 하든 내 마음이다.
“계획은.”
“응?”
“계획은 있는 거겠지, 가스파르.”
세계수께서 잠시 눈감아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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