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계획 (4)
* * *
“후우…….”
마르크가 크게 한숨을 내쉰다. 아무래도 어제 살린 엘프가 바로 오늘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그를 구하다 날개가 찢어지고 살이 패일 땐, 그냥 무시하고 크라우스가 날뛰는 대로 둘 걸 그랬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게다가 괜히 나대다 아버지의 계획을 망치는 게 아닐까 두렵기도 했다.
그래도 그 둘을 그렇게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한 달 동안 바라보면서 이상한 정이라도 생긴 걸까. 에이든이 말한 남을 구하고 보는 성정이라는 게 자신에게도 있는 걸까.
아니, 그게 아니다. 마르크는 선왕과 크라우스로 대표되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용의 지배방식에 언제나 의문을 품고 있었다.
마야의 성격과 과거. 다른 용의 가정과는 다른 이 성의 특이한 분위기 등. 그가 다른 용들과는 다른 생각과 성정을 가지게 된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는 자신이 누리는 풍요가 언제나 불편하고 꺼림칙했다.
아버지가 언뜻언뜻 보이는 이율배반적인 모습도 어색하고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건 역시 어머니 마야일까. 항상 상냥하고 나긋나긋한 어머니를 왜 다들 거리를 두고 어려워하는지, 어린 마르크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가 그녀의 과거와 용과 엘프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된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한때 어미에게 의지했던 그가 이제는 그녀를 지키고 싶어한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용에 의해 끔찍이 변형되고 망가진 모습이지만…. 그래도 그 부드럽고 포근한 그녀가 좋았다. 어딘가 멍하지만 자애롭고, 짓궂으면서도 마음 따스한 어머니.
그런 그녀가 있기에 그가 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현재를 행복해하는 그녀를 부정할 수 있는 권리도 그에겐 없다. 크라우스던, 가스파르던, 그 누구에게도 그런 권리는 없을 터였다.
단지 그녀에게 일어난 일이 다른 누구에게도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
마르크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아버지의 계획에 동참했다.
어제처럼 목숨을 거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계획이라….”
가스파르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에이든의 참가 의사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자네, 그 핀 모리츠라는 인간과 관계는 가졌나?”
그러다 갑자기, 무척이나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응? 관계는 무슨 관계.”
“성관계 말이네.”
잠깐의 침묵이 집무실을 감쌌다.
“…대체 또 이 무슨 해괴한….”
굳은 결의에 찼었던 에이든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진다. 매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가스파르를 바라본다.
“자네는 지금까지 이야기를 듣기나 한 건가, 가스파르. 다시 말하지만 난 그녀를 그런 불결한 마음으로 본 적이 없어…. 당연히 그런 상스러운 행위도.”
“아니, 했냐고, 안 했냐고.”
“…….”
가스파르와 에이든. 두 원수가 서로를 빤히 노려본다. 하지만 둘의 묵은 원한에 비하면, 그 이유가 정말이지 괴이하기 짝이 없다.
세상에 난지 삼십 년도 안 된 인간과의 성관계 여부가 팔천 년의 원한보다 더 앞에 설 수 있단 말인가.
에이든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투고, 가스파르는 빨리 본론으로 넘어가고 싶다는 투다. 둘이 서로 말은 나누고 있는데, 대화를 하고 있지는 않다.
“나는 관계의 여부를 묻고 있네. 계획에 필요한 내용이니 대답만 하게.”
“에휴, 진짜….”
대체 언제까지 이런 말의 닷지 볼을 할 속셈이지. 보고 있는 사람이 더 애가 탄다.
“……한 적 없네.”
조금 전의 기세는 어디 간 건지, 갑자기 에이든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딱히 부끄러운 내용이 아닌데도 그런다. 역시 핀과 관련된 일을 남들 앞에 꺼내는 것을 꺼리는 걸까.
“뭐라고?”
“한 적 없다고.”
“으음…. 그거 아쉽구만.”
가스파르가 짐짓 안타깝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고 턱에 손을 댄다. 정말 이야기의 흐름이 묘하다. 듣는 사람 고개가 절로 갸웃거리게 만드는 말의 진행이다.
아니, 아버지. 용인 저야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알지만, 맥락도 없이 그러시면 듣는 엘프….
“뭐가 아쉽다는 건가, 뭐가! 자네들 용의 생각은 하여간 이해를 할래야 할 수가 없어! 나는 분명 계획에 관해 물었을 텐데! 핀을 구할 계획이 있느냐고! 없느냐고! 그렇게 실없는 소리만 할 거면….”
결국, 모욕을 당한 거라 여긴 에이든이 크게 역정을 낸다. 아니, 방금 손을 잡기로 했는데, 사소한 말 하나 때문에 이게 뭔가. 보다 못한 마르크가 재빨리 그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버지! 에이든은 핀에게 치유 마법을 시전한 적이 있어요. 꽤 큰 상처였으니 분명 마력의 흔적이 남았을 겁니다. 꼭 성관계가 아니어도 상관없잖아요?”
“하, 마르크. 진작 말하지 그랬나.”
“그건 또 무슨…! 윽, 으윽!”
에이든의 몸이 다시 자유를 빼앗긴다. 가스파르가 허공에 손을 뻗어 공기를 움켜쥐듯 그 끝을 일그러트린다.
물리적 고통은 없지만, 심한 압박감이 에이든을 몰아세운다. 마나가 마나를 짜내고 있다. 마치 몸이 갓 빤 걸레가 되어 한계까지 쥐어짜이는 기분이다.
“가, 가스파르. 이 개샠…. 으으윽!”
몇십 초나 그러고 있었을까, 에이든의 체감으로는 거의 십 분은 지났다. 언제부터였을까, 자주색의 반투명한 실이 에이든의 가슴팍에서 한 가닥 흘러나왔다.
“허억, 흐어어.”
그제야 가스파르의 손이 멈추고, 풀려난 에이든이 간신히 열띤 숨을 내뱉는다.
그의 마나로 이루어진 그 무형의 실은 집무실 창문을 넘어 저 멀리 상공으로 사라져간다. 리오나와 같은 문외한은 그 그림자를 쫓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그 색과 모양은 공기 중에 옅게 흩어져 금세 제빛을 잃었지만, 가스파르와 마르크는 그 마나의 흐름을 확실히 읽을 수 있었다.
에이든과 이어진 핀이 지금 어디 있는지를.
“왕립 아카데미…?! 왕궁이 아니라니 의외네요.”
“그 녀석은 언제나 제멋대로지. 그쪽이 경계가 약하니 오히려 우리로선 잘 됐어.”
“잘 되긴 뭐가, 잘 돼.”
용 둘의 한가로운 감상에, 노기 낀 엘프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이제야 에이든도 지신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 깨달았나 보다.
“가스파르, 자네는 내게 지켜야 할 것과 싸워야 할 것에 대해 이야기했지. 그렇다면 그건 같이 함께 적과 싸우고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나? 그런데 이게 대체 지금 무슨 짓인가! 마음대로 몸의 자유를 빼앗고 길앞잡이처럼 이용만하다니!”
그의 역정을 들은 가스파르가 오히려 더 어이없다는 듯이 성을 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군. 어찌 되었든 이렇게 핀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게 되었으니 자네에게도 좋은 일 아닌가.”
“하아……. 가스파르. 동맹이니, 맹세니 하는 건 어디까지나 둘이 대등한 관계에서나 맺을 수 있는 약조에 지나지 않네. 자네가 계속 그런 태도라면 나는 나 혼자서라도 핀을 찾으러 가겠네.”
“허, 정말이지 기가 차는군. 언제부터 우리가 대등한 관계가 되었지, 에이든? 자네에겐 그 핀이라는 인간이 목적이자 지상 과제이겠지만, 우리에겐 그저 크라우스에게 가닿을 수 있는 한 가지 수단에 불과해. 자네 혼자서 그녀를 되찾겠다고? 할 수 있다면 해보시지. 이미 한 번 죽은 엘프의 힘으로 그 수많은 용의 발톱과 감시를 피할 수 있다면 말이야.”
다시 둘 사이에서 불꽃이 튄다. 정작 처음 화두에 올랐던 계획에 관한 이야기는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올라오는 현기증에 마르크가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누른다. 리오나는 가스파르를, 아일라는 에이든을 마치 물가에 내놓은 제 자식새끼처럼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이번엔 또 어떻게 중재를 해야 하지. 정말 오늘 안에 아버지의 계획을 다 들을 수 있는 걸까.
핀은…. 정작,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핀은 지금도 크라우스의 손아귀에서 고통받고 있을지 모르는데. 이 늙은이들 진짜….
시간을 아주 잠시 돌려, 크라우스가 핀과 에이든을 습격한 그 날로.
“놔! 이거 놓으라고! 놔아!!!!!”
“이거 또 엄청난 말괄량이 아가씨네. 좋아, 나도 그런 건 싫지 않거든.”
에이든과 마르크를 피떡으로 만든 크라우스는 미소를 지으며 핀을 납치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기분이 좋은지, 왕의 체통에도 맞지 않게 촐랑거리기까지 하며 폴짝폴짝 하늘을 난다.
지금도 뼈가 끊기고 살이 잘려 나가도 일어서던 그 무력한 버러지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괜히 가슴 한편이 기쁨으로 차오르고, 형언 못 할 우월감에 입꼬리가 절로 씰룩거린다.
그래, 그래! 이런 기분이었구나, 가스파르!
네놈이 이미 망가진 년까지 주워다 쓰며 나를 모욕하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더 우월한 수컷이 그렇지 못한 수컷에게서 암컷을 쟁취하는 게 무엇이 나쁜가? 모든 게 자연의 섭리이자 이긴 수컷의 특권일 뿐이지.
자신은 그 녀석과는 다르게, 더 나은 암컷을 더욱더 한심한 열등종에게서 빼앗았으니 기분이 훨씬 짜릿하고 아찔하다. 정말 중독이라도 될 지경이다.
애초에 이 년은 가스파르, 네 놈의 것이었지. 리오나를 안으며 무게를 잡던 짜증나는 얼굴이 이제는 우습기만 하다. 그가 더 깊은 도취로 빠져든다.
“으아아아아!!! 놔! 제발 놓으라고!!! 흑, 흐윽…! 너가, 너가 뭔데…. 왜 또 나한테…. 나한테서 또 빼앗아가는 건데….”
눈앞에서 그 엘프가 만신창이가 되는 걸 목격한 이 핀이란 여자는 거의 미쳐가고 있다.
“내가…. 내가 나를 처음부터 포기했으면…. 에이든이 나를 포기했으면….”
크라우스의 너른 등 위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계속해서 되뇐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내가 그녀가 목적이라 처음부터 밝혔으니, 전부 자신때문이라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아…. 이것 참.”
아아. 예전에는 가축에게 행복과 환상을 보여주는 게 주인으로서 도리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왜 지금, 이다지도 기분이 좋단 말인가.
그녀가 최상의 여자라는 건 등 비늘에 닿는 피부의 감촉과 무게만으로 알 수 있다.
그런 그녀가 더 괴로워했으면 좋겠다. 더 메마르고 다쳤으면 좋겠다.
그저 내가 더 우월하고, 그 엘프가 하등하다는 이유로.
썩고, 구더기가 슬고, 으깨져 문드러졌으면 좋겠다.
멍들고 헤진 마음일수록 비집고 들어가기 쉽다. 그가 수많은 이종족 여자를 써서 알아낸 사실이다.
내가, 내가 너를 만들고 완성해주마, 핀 모리츠.
나의 왕국의 아카데미는 최고의 시설과 교사진을 자랑하니까.
무엇보다도 학장인 내가, 매일 직접 너를 지도하고 이끌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그 엘프는 살아있을 테니.
똑같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해도 용이 옆에 있다. 마르크 녀석은 무사히 그놈을 가스파르에게 가져다주겠지. 그는 일부러 둘의 목숨을 끊지 않았다.
그건 경고다. 언제든지 네놈도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경고.
뭐, 마야의 앞에서 그 아들을 죽이는 것도 흥이 있겠지.
곧 대륙 정벌도 끝난다.
네 3군단은 인간 따위를 정벌하고 기세등등한 모양이지만, 내 전력이 되돌아오면 그런 놈들은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
명분은 마르크가 주었다. 이제 시기만 기다리면 된다.
곧 핀은 물론이고, 가스파르의 노예 모두가 자신에게 무릎 꿇을 날이 올 터이니.
그때 네놈의 얼굴이 기대되는구나. 가스파르.
"에이든…. 에이든…."
그렇게 둘은 높은 태양 빛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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