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계획 (5)
* * *
용이 종족의 번영을 누렸던 하늘 대륙보다도 더 높은 곳.
하늘에서 태양과 달 다음으로 가장 높은 그곳에, 왕궁과 그 왕이 세운 학교가 있다.
그 까마득한 창공을 마법도 쓰지 않고 직접 날아온 크라우스는 울다 지쳐 잠든 핀을 안은 채 학교 구석 착륙장에 발을 디딘다.
언제 그 기척을 느낀 건지, 벌써 교사 하나가 나와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말도 없이 찾았는데, 그럴 필요까지 없어. 여기서 나는 왕이 아니라 학장이니.”
“아닙니다. 크라우스 학장님. 오늘은 또 무슨 일로.”
그렇다고 정말 마중하지 않으면 다음에 올 때 꼭 한마디를 더 하면서. 왕립 아카데미 마법교사 닐스는 고개를 숙인 채 몰래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 문제와 사건만 일으키는 망나니 왕 크라우스. 사납고 지엄했지만, 유능하고 공명정대했던 선왕과는 천지 차이다.
그 육체와 마력만은 선왕보다도 더 강대해 보이지만…. 하는 짓과 태도가 그래서야 호부견자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터.
이 또한 가스파르가 남긴 그 금법의 폐해인 것일까. 인성과 천성마저도 그렇게 닳고 퇴화하는 것 중 하나였단 말인가. 마법 연구에 일생을 쏟은 닐스는 이미 희게 샌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그러한 잡념에 빠졌다.
“사실 내가 길을 가다 여자를 하나 주웠거든. 그래서 그 여자를 여기 학생으로 입교시키고 싶은데. 학장의 특권을 써서 말이야. ”
“네?”
왕은 그렇게 말하며 용의 형상을 풀고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돌아왔다…? 그 형상이 본디 모습이어야 할 용에겐 이상한 표현이지만, 크라우스와 같은 신세대에게는 그리 틀린 말도 아닐터. 하여간 닐스는 그제서야 그 옆구리에 낀 한 여체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피범벅이 된 낡고 헌 거죽을 입고 있다. 상태가 위중한가 싶었지만, 거죽 사이로 보이는 희고 맑은 피부에 상처는 없었다.
몸매도, 얼굴도 몹시 가지런하고 고르다. 늙은 닐스도 욕정이 생길만한 상급의 여자다. 이렇게 곱고 예쁜 여자를 그냥 길을 가다 주울 수 있다니, 그런 거리가 있다면 당장 발정 난 용들로 가득 차 이종족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터인데.
깊게 파인 눈물 자국과 잠들었음에도 보이는 얼굴의 그림자를 차치한다면 말이다.
상황은 대충 예상이 갔다. 어디서 남의 것을 빼앗기라도 했나.
“하, 하지만 지금은 학기 중이고 모든 클래스에 정원이 가득한 상황인데….”
“그러니까 내 특권이라고 하지 않았나.”
“…….”
또 억지. 대관절 그런 특권이 세상 어디에 있다고.
명문화는커녕 속설로도 듣지 못했다. 닐스가 이 학교의 교사로서 부임한 건 엘프가 멸망한 이래 거의 만 년이 다 되어 간다. 이 시설의 설립도, 그의 부임도, 모두 그가 아닌 아버지 선왕의 뜻이었다.
오래전, 용과 용 사이에는 어떠한 계급도, 격차도 없었다. 태어날 때의 힘의 차이는 분명히 있었고, 보석과 황금으로 그 차이를 과시하려는 이도 있었지만, 일단 모든 용이 평등하다는 그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관계의 진리였다.
그러나 용의 사회가 분열되고, 종국에 종의 위기를 맞으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거의 개인 단위까지 쪼개진 용들은 종의 위기에 효율적으로 대비하지 못했다. 그 누구의 합리적이고 타당한 의견도 다른 멍청한 이의 의견 앞에 설 수가 없었으니, 서로가 서로의 말만 내세우며 갈라지고 싸우기 바빴다.
그때 홀연히 나타난 자가 선왕이요, 급박했던 종의 위기를 해결한 것도 선왕이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던 용 하나가 갑자기 힘으로 모두를 꺾어 누르며 이야기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허례허식과 용들 사이의 묵은 정을 끊어냈으며, 가장 강인하고 부유한 용으로 알려져 있던 용을 죄인으로 몰아 본보기로서 이름을 빼앗고 연구에 전념시켰다.
엘프나 드워프와 같은 강인한 종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분열된 용의 사회를 자신의 발밑으로 통합시켰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이름마저 버리고 그저 왕이라 불리기를 택한 한 무명용의 공적이었다.
괜히 개인과 평등을 으뜸으로 삼던 용들이 모두 그를 떠받들고 모신 게 아니다. 졸지에 죄인이 된 데다 선택권도 없이 이름을 빼앗긴 가스파르 한 명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당시 시대와 사회에 필요한 일이었다. 오래전 일이긴 해도 충격이 꽤 커 보였는데…. 뭐, 지금은 자기가 만든 마법으로 제법 잘 놀고 있는 거 같으니 큰 문제는 아니겠지.
닐스는 그러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저 왕가와 그 가신들이 쓸 여체를 양육하기 위한 기관, 왕립 아카데미.
늙은 마법 연구가가 그러한 기관의 교사 자리를 떠맡은 건 모두 다 그 선왕의 의지와 위엄과 뜻을 같이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치세를 도우며,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보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세상일은 누구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대답이 늦군. 닐스.”
“……네. 그 아가씨를 위한 자리를 당장 내겠습니다.”
설마 그렇게 강인하고 굳셌던 이가 이렇게 자신보다 빨리 생을 달리할 줄은 몰랐다. 그가 빠른 것도 있고, 자신이 너무 느린 것도 있다.
삶과 죽음은 하늘이 관장하는 것이며, 용도 그 예외가 될 수 없으니 불만을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방금 선왕과 그를 일컬어 호부견자라 했나? 취소하는 게 좋겠다. 개에게도 인격이 있다면 몹시 억울할 만한 말이다.
그는 머리가 굳자마자 선왕의 뜻을 버리고 자신의 이름을 만들었다. 크라우스. 의미도 없고 어감만 살린 어처구니 없는 이름이다.
효율을 위해 집중된 권력과 재화를 정말 제 것인 양 사용하기 시작했고, 마력과 노예가 충분한 데도 이종족과 전쟁을 일으켰다.
반발이 큰 정복 전쟁만을 고집했으며, 그렇게 남들을 전장으로 이끌면서 정작 자신은 술과 여자를 탐닉하기 일쑤였다.
그를 우두머리로 엘프와 싸웠다면 절대 승리는 장담하지 못했겠지. 설령 승리했다 해도 훨씬 더 많은 희생이 따랐을 거고.
용은 강인한 만큼 하나가 제 역할을 다하기까지 무수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예전 사회에서는 모든 비용을 그 용 자신 혼자서 치렀으나, 국가의 기틀을 잡은 현 상태에서 그런 방식은 합리적이지 않다.
지금도 거인족의 대륙을 향했던 정벌이 원활하지 않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당장이라도 제도를 정비하고 국기를 바로 세워 병사들을 북돋아야 할 왕의 시간이….
“워히.”
사욕을 위해 이렇게 낭비되고 있다니.
크라우스는 그 여체를 닐스에게 장난처럼 던졌다.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한 닐스가 간신히 그 몸을 받아든다. 왕의 체통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망동이었다.
“당장은 기숙사로 데려가 몸을 눕혀주게. 다친 거 같았으니까 자네가 치료도 좀 해주고. 아, 이름은 핀 모리츠라고 하더군. 나는 꽤 마음에 들었으니까 괜히 바꾸진 말아.”
닐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크라우스를 바라본다. 숨겨야하는데 전혀 숨겨지지 않는다. 크라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떠날 채비를 한다. 이번에는 왕궁으로 통하는 마법이었다.
“바로 가십니까? 이, 이 학생의 학년과 적성은 대체….”
“그런 건 네가 알아서 하고. 오랜만에 운동을 좀 해서 지쳤거든. 깨면 상황을 대충 설명해 주게. 나는 내일 저녁에 또 오지. 그럼.”
그런 말만 남기고 쌩하니 사라져버린다. 졸지에 헐벗은 여체를 떠안게 된 닐스는 멍하니 크라우스가 있던 허공을 바라볼 뿐이다.
뭐가 설명이냐고, 나도 상황을 아는 게 없는데.
머리에 피가 오른다. 정말 모든 게 제멋대로다. 그 선왕도 모두가 평등했던 과거를 생각해, 저렇게 안하무인이지 않았다.
최소한 남을 존중할 줄은 알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인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연차든 능력이든 내가 이곳에서 제일 높은데….
“하아…….”
왕궁 놈들은 비위도 좋지. 어떻게 저런 놈을 매일 보며 섬기는 거야.
닐스는 용언으로 인내라는 글자를 삼백 번 새기며 자신도 전송마법을 준비했다.
기숙사에 남는 방이 있었나. 없으면 학생한테 부탁이라도 해서 만들어야 하나.
그가 하기에는 너무 하찮은 고민이었다.
“으, 으응?”
확실히 핀이라는 여인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외모에 비해 외양이 추레하고 더러운 건 물론. 발목은 심하게 붓고, 뼈는 틀어져 있었다.
“허어…. 아니, 말이 안 되는데.”
한번 아문 상처와 붙은 뼈가 다시 갈라지고 제 위치를 잃었다. 밖에서 봤을 때 출혈은 없으나, 만약 내버려 두었다면 병신이 되거나 죽었겠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닐스라면 더 큰 상처라도 순식간에 고칠 수 있다. 실제로 조금 전에 시작한 치료는 이미 끝났고, 청결 마법까지 더해 핀은 깨끗하고 완전한 모습을 되찾았다.
그런 것보단 이 상처가 이미 한 번 아물었다는 게 중요하다. 용의 마법에 통달한 닐스도 전혀 처음 보는 치료 마법의 흔적이었다.
크라우스? 그의 마력이 아니다. 게다가 그라면 죽이든 살리든 이렇게 어정쩡한 모습은 아닐 터.
다른 미숙한 용이 손을 댄 걸까? 아니, 확실히 용의 마법은 아니었다.
분명 처음 보는 건 맞는데…. 그런데 어디서 또 본 것 같기도 하고…. 모순된 감상이 닐스의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친다.
고민만 해봐야 알 수 있는 건 없다. 오랜만에 연구자로서 흥이 돋은 닐스는 탐구를 위해 그녀가 입은 짐승 가죽을 벗겼다.
“아.”
그러자 확 끼쳐오는 풀과 숲, 자연의 냄새. 무엇보다도 깊게 기억을 건드리는 후각. 그 오랜 그리움에 닐스는 깨달았다.
그 치유 마법은 엘프의 것이라고.
이미 멸망해 다 죽거나 그릇이 된 엘프가 어떻게?
“이 마력이 가닿은 곳까지 뻗어 간다면….”
닐스가 허공에 손을 뻗어 핀의 마력을 쥐어 잡았다. 그는 온연히 호기심으로 그 치유 마법을 시전한 자의 위치를 찾았다.
곧이어 한 가닥 마력의 실이 핀의 가슴에서 흘러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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