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계획 (6)
* * *
화사한 햇살이 가스파르의 정원을 덮었다.
정갈하고 단아한 정원 너머로 순백의 대리석으로 치장된 아름다운 성이 제 자태를 뽐낸다.
아주 작디작은 참새 하나가 하늘을 날아 그 성의 창가에 선다. 뭉툭한 게 포르르 떠는 꼴이 꽤 귀엽지만, 그 속은 만 살도 넘게 먹은 간사한 용이다.
닐스는 의문을 한가득 품고 가스파르의 둥지를 찾았다.
그가 이곳을 방문한 건 오늘이 처음이다. 가스파르와는 전부터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고, 왕립 아카데미 교사로 부임하고부터는 외부와 교류할 일도 거의 없었다.
그가 처음 보는 양식의 하얀 성은 그 위엄을 뽐내며, 주인의 부와 권력을 넌지시 내비치고 있다.
호사로움과 화려함은 왕궁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은연하게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그보다 뛰어났다.
닐스도 늙어서일까. 크라우스의 유치함보단 가스파르의 고상한 감각이 더 마음에 들었다.
‘녀석, 생각보다 더 잘살고 있었네.’
가스파르. 제도 안에 속하고 있으면서도 반왕당파의 상징 같은 인물. 한때 가장 실력 있는 용으로 통했던 은둔자.
하지만 지금은 그저 여자 놀이에 심취한 뒷방 늙은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감각과 재력만은 시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았나 보다.
닐스는 자신을 감싼 인식 저해 마법의 강도를 더욱 올리며, 가스파르와 엘프의 모습을 찾았다.
핀 모리츠에게 남아있던 엘프의 마력은 분명히 이 둥지를 가리켰다.
전쟁 당시 유명했던 엘프의 선봉장 아일라와 크라우스의 목을 따려던 엘프 암살자 마야가 이 둥지에 있다는 건 풍문으로 들어 알았지만, 핀 모리츠에게 남아 있던 그 마력은 용의 마력이 닿지 않은 순수한 엘프의 마력이었다.
한 생명을 이성으로 바꾸는 마법은 필연적으로 그 영혼과 체내 마력에 변질을 일으킨다. 설령 기억과 의식을 유지한다 해도, 마력에 민감한 닐스는 그것을 전과 같은 존재라 부르기에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서 금법이다. 처음부터 남에게, 이종족에게 써서는 안 될 것이었다. 용의 위기는 용과 용 사이에서 끝냈어야 했다.
“…….”
선왕에게 부역한 자신이 할 말은 아닌가. 하지만 당시를 살았던 용이라면 모두 이러한 모순된 감정을 가지고 있을 터.
당사자 중의 당사자인 가스파르는 더 심하겠지. 도저히 생존과 이상을 같이 할 수 없던 시대였다.
처음에는 단지 엘프에 대한 호기심이었는데. 이렇게 가스파르를 찾다 보니 그에 대한 물음이 계속 떠오른다.
갑자기 왕이 던져준 여자에게서 엘프의 마력 흔적이 나왔고, 그 흔적을 따라가니 가스파르의 둥지가 나왔다.
크라우스, 가스파르. 이름 모를 엘프와 핀 모리츠…. 넷 사이에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아, 핀 모리츠는 하루 더 그 상태 그대로 재워두기로 했다. 그편이 그녀에게도 좋을 것 같았다.
육체는 다 나았다고 해도, 정신적 소모가 무척이나 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당장은 안정을 취해야 했다.
그녀는 좋은 구실이기도 했다. 닐스는 그녀를 돌본다는 명목으로 학교에서 하루의 말미를 얻었다.
그는 그녀 옆에 대역 허수아비를 세워 놓은 뒤, 이렇게 몰래 아카데미를 빠져나왔다.
‘흐음…. 손도 녹슬지 않았네.”
가스파르는 실력도 여전했다.
엘프도, 그도, 이 성에 있는 게 확실한데 기척을 읽을 수 없다. 저쪽도 고도의 인식 저해 마법을 쓰고 있는 것일까? 굳이 남몰래 할 중요한 이야기라도 있나?
참새 닐스는 짹짹거리며 마력이 일그러진 공간을 찾았다. 꽁꽁 감춰진 것일수록 오히려 더 호기심을 자극하는 법.
그렇게 한참을 허공을 맴돌다.
‘삼층 중앙, 정원과 둥지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닐스도 가스파르 못지않은 마법의 달인이다. 흐릿하고 미세한 틈을 마법으로 또 교묘히 감춰놓았지만, 결국 찾아낼 수 있었다.
닐스는 가스파르가 펼쳐둔 그 마법에 슬며시 구멍을 뚫고 쏙 하니 안으로 들어갔다.
창틀에 새 발을 딛고, 조용히 안을 들여다본다.
그렇게 감춰진 기척은 한둘이 아니었다. 가스파르와 임부…. 어린 용과 메이드….
“정말 내가 그런 일에 동조할 거라 생각하나, 가스파르?”
무엇보다도 수천 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수컷 엘프 하나가 닐스의 이목을 끌었다.
가스파르의 계획은 에이든의 상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것이었다.
“혁명…. 아니, 그렇게 포장할 것도 없지. 내가 하려는 건 일종의 쿠데타야.”
용의 유구한 과거와 갑작스레 닥쳐온 위기. 엘프로서는 어렴풋이 상상만 하던 진실과 역사.
그 모든 사실이 경이롭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역시 가장 놀라웠던 건 가스파르의 사상 그 자체였다.
“나는 이 마법으로 더럽혀진 용의 피를 복원하고, 너희 이종족을 해방할 것이네. 너는 용의 첫 번째 희생자인 엘프의 대표이자, 처음으로 회생하는 종족의 대표로서 나의 옆에 서게 될 거고.”
가스파르는 그러면서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작은 도마뱀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흉한 뿔과 발톱을 가진 이상한 도마뱀이었으나, 에이든은 그가 뜻하는 바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건 용이었다. 생김새나 모습은 몰라도, 느껴지는 마력은 정말 그랬다.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그냥 용이 아니다. 바로 옆 아일라나 리오나와 같은, 변형되고 뒤틀린 마력이 느껴졌다. 분명 저 도마뱀도 그들과 같이 가스파르의 손에 의해 성별이 바뀌었을 것이다.
가스파르가 말하는 마법이 무엇이고,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에이든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
무슨 미친 소리를 하나 싶었다. 모든 일의 원흉이나 다름없는 녀석이 만 년도 더 지난 이제 와서 대체….
“물론 내가 염치도 없이 이런 말을 하면 자네야 참 어이없고 복장 터지겠지. 이해하네. 하지만 나도 하고 싶어서 그런 연구를 한 게 아니야. 종족의 위기와 선왕의 강요. 당시의 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네.”
“……겨우 그런 헛소리로 네 죄를 씻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에이든은 목격자이자 당사자였다. 실제로 가스파르는 그 연구가 끝나고도 그저 본인의 흥취를 위해 여러 생체실험을 단행했다.
영문도 모른 채 눈이 파여 피눈물을 흘리고, 장이 끊겨 고통에 신음하던 그 날.
신열을 견디다 못해 정신을 잃은 적이 대체 몇 번이나 될까. 게다가 다시 눈을 뜨면 그 모든 상처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감쪽같이 치유되어 있었는데, 그 사실이 더욱더 소름 돋고 메스꺼웠다.
연구실의 다른 이름 모를 종족들도 에이든과 같은 처지였다. 그들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는 쉽게 상상이 갔다.
설령 그 일을 차치한다 해도, 가스파르의 여죄는 너무나도 크다. 얼마나 많은 영혼이 그로 인해 고통받았는지 셀 수조차 없다.
그런데도 가스파르는.
“아니, 애당초 죄를 씻고 싶다는 마음은 내게 없네. 그게 내가 씻고 싶다고 씻겨지는 것이 아니거니와. 어차피 내가 무슨 짓을 하던 자네들은 만족 못 할 것 아닌가?”
정말 기가 차는 놈이었다.
“뻔뻔하기 그지없기는…!”
“흥. 내 목을 치고 쇠꼬챙이로 꿰뚫어 저잣거리의 구경거리로 만들려면 만들게. 그렇게 해서라도 자네와 죽은 이들의 마음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할 테니. 이제 와 목숨 따위가 아깝겠나? 이건 터럭의 꾸밈도 없는 나의 진심일세. 자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말이야.”
“그냥, 그…. 좀 닥치게. 네 입에서 그런 이야기 나오는 것만으로 역하니까.”
듣다 못한 에이든이 눈두덩이를 누르며 욕지거릴 내뱉었다. 그러나 가스파르는 멈추지 않는다.
“모든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지. 안 그렇나? …알고 있네. 나의 죄는 목숨으로 갚기에는 너무나도 크다는 걸. 그걸 속죄하고 갚겠다는 소리야말로 기만이지. 내 죄를 부정하지는 않겠네. 그렇다고 죄책감에 눌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일종의 회피야.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그게 그 말도 안 되는 계획인가? 정말 내가 그런 일에 동조할 거라 생각하나, 가스파르?”
“동조하겠지. 동조할 수밖에 없을 거야.”
가스파르는 묘한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 당당한 태도가 정말이지 역겨웠으나, 그가 거짓을 말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머리가 아팠다. 지금 당장 저 잘난 모가지를 비튼다 한들, 죽은 이가 살아나거나 아일라나 마야가 정신을 차리는 것도 아니니.
그리고 철천지원수인 자신이 그에게 동조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건 도대체…?
“말했잖나. 자네들 엘프는 처음으로 회생하는 종족이 될 거라고. 남은 암컷이 없는데 수컷 혼자서 어떻게 다시 대를 이을 수 있겠나?”
잠시 또 정적.
이번엔 그 의도를 바로 알아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 그대로였다. 나의 목적은 처음부터 단 하나였으니.
이 선문답의 끝도 그녀인 것이 당연하다.
“……?! 너, 너…!”
“장명종과 단명종 사이의 사랑이 어떻게 끝나는지는 이미 유명한 옛이야기 아닌가? 자네도 쉽게 상상이 갈 거야. 누가 늙고 병들어 죽고, 누가 쓸쓸하게 혼자 남겨질지. 설령 한 번 용의 그릇이 되었다 해도, 막대한 마나를 계속 공급해 주지 않으면 영생을 누릴 수 없다네. 나는 그 결말을 바꿀 수 있어.”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애초에 그런 게 가능했다면 왜!”
“성별도 바꾸는데, 못할 것도 없지. 엘프나 인간을 용으로 바꾸겠다는 게 아니야. 나로서는 인간과 엘프가 도마뱀과 용보다도 가까운 존재처럼 보이네. 걱정 말게나. 원전이 될 아일라나 마야도 있으니.”
"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녀에게도 그녀의 의사라는 게…!"
"핀을 믿지 못하나? 자네들의 진심은 겨우 그 정도인가?"
"……."
돌려줄 말이 없었다.
그를 용서하거나 이해해서가 아니다. 전혀, 전혀 아니지. 그가 한짓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고, 그 목적이 무엇인지도 당최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내가, 이 가스파르가 핀 모리츠를 너와 같은 엘프로 만들어주지. 아이를 가지고, 끊어진 엘프의 명맥을 다시 잇게. 자네들은 새롭게 태어난 용의 가호 아래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걸세."
그건 에이든이 바라지도 않던 행운이자 필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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