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계획 (7)
* * *
“하, 하지만. 그, 그건….”
에이든은 눈에 보이게 당황하고 있다.
그 맹렬했던 적의는 어디로 갔는지, 눈을 굴리고 말을 고르며 가스파르의 진의를 살피고 있다.
가스파르의 말은 그 정도로 인지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한 생명의 성별뿐만이 아니라 그 종족마저 바꿀 수 있다니.
저 녀석은 대체 우릴 무어라고 생각하는 거지.
신이라도 된 기분인가.
“빨리 대답 먼저 해주게, 에이든. 아직 내 계획의 본론조차 들어가지 못했어.”
가스파르가 답을 재촉한다. 에이든의 고민은 더욱더 깊어진다.
가스파르의 말이 끝나고, 작은 침묵이 집무실을 지배한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갓 터져 나온 참이지만, 에이든을 제외한 모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평하다.
일이 뭐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
아까까지 의기양양하게 나를 내려보던 리오나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가스파르에게 뜨거운 선망의 눈빛을 보내고 있고, 마야의 아들이라는 녀석도 그런 건 당연히 가능한 일이라는 양 제 아비처럼 내 답만 기다리고 있다.
같은 엘프로서 적잖이 충격을 받아야 했을 아일렌(아니, 지금은 아일라인가)도 여전히 안쓰럽다는 듯, 나를 바라볼 뿐이다.
“잠깐, 잠깐 생각 좀 하게 해주게….”
당장은 그렇게 손사래를 칠 수밖에 없었다.
핀. 핀 모리츠.
그녀를 엘프로 만들어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온몸이 그 모양 그대로 얼어붙은 최악의 기억을 끝으로, 나는 무려 팔천 년을 잠들어 있었다.
다른 엘프가 모두 죽거나 용의 노예가 되어버린 그 시간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종족, 동료, 결의. 무엇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그 지하감옥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미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지상에는 수없이 많은 용과 그릇의 마나가 넘실거리고 있었고, 동료 엘프나 내가 알던 다른 종족들의 마나는 아무리 집중해도 찾을 수 없었다.
정확한 사실관계와 시기는 모르더라도, 내가 처한 현실을 추론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신은 영겁의 시간을 지나 용에 의한 세상의 종말에 다다랐다는 그 현실을.
나는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 보관된 거였다.
그렇게 얼려진 이유나, 이렇게 다시 깨어난 이유는 모른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감옥 바닥이 찼다. 사고와 사고가 이어지지 않고 어딘가 결여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분하고 원통하여, 자신을 책망해야 할 텐데.
용과 세상을 증오하며,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어야 옳을 텐데.
신기하게도 그런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마치 그러한 감각을 잃어버린 것처럼, 아주 조금도.
붙잡힌 그때부터 기대라는 감정을 버렸기 때문일까, 이미 끔찍한 일을 수없이 겪었기 때문일까.
아니, 그저….
그때는 그저 이름 모를 여인의 잠든 얼굴이 예뻐서 그랬던 것 같다.
머루보다도 짙은 어둠 속, 고운 별빛이 간신히 창문 틈을 빠져나온다.
머리카락과 피부는 눈꽃보다도 희고, 이목구비는 조각된 대리석보다도 고르다. 잠긴 눈 아래로 보이는 길고 가지런한 속눈썹이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미인으로 유명한 엘프의 여식들보다도 훨씬 아름답다. 처음 봤을 땐 잠시 숨이 멎었을 정도다.
처연한 별빛과 흰 머리카락, 무척이나 곱고 투명한 얼굴.
그것뿐만이 아니다. 체격이 월등히 큰 엘프보다도 볼륨 있고 매력적인 몸매였다.
분명 순수하고 성스러운 여자였으나, 그렇다고 성적매력이 없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사나운 잠자리에 몸을 뒤척일 때마다 헤진 천 옷 사이로 여체의 곡선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무방비한 처녀에게 옳지 못한 행동인 걸 알면서도 눈길이 절로 향하고 만다.
무구함과 색기가 뒤엉킨다. 그 상반된 조화로움이 그녀만의 매력을 만들어낸다.
에이든도 남자였다. 용의 침략이니, 종족의 멸망이니…. 당장 중하고 시급한 일만 좇다 보니 여체를 안은지 수백 년이 지났다. 잠든 시간을 제외해도 그랬다.
처지도, 입장도 잊고 그녀를 바라본다. 눈을 최대한 크게 뜨고, 잘디 잘은 별빛을 빌려, 계속해서 그녀를 바라본다.
“흐응…. 으응? ….응…….”
그나마 편한 자세를 찾았는지, 그녀는 옅게 미소지으며 태평한 잠에 더욱더 빠져든다.
자신이 처한 상황도 모른 채, 그저 눈앞의 잠이 달콤하고 평안하다는 듯이.
바보 같다. 그녀도, 나도, 이 상황도 모두.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나에게는 삶의 이유조차 남지 않았다.
그리운 고향도, 몸담던 종족도 이미 없다.
피로 맺은 맹약도, 마음을 같이한 동료도 이제 없다.
가족도 연인도 이제는 아득하기만하다.
…….
….
그래서 뭐?
없으면 없는 거지.
지금 내가 그런 헛된 형식에 구속될 필요가 있나?
그 가증스러운 가스파르와 그의 고문도 이젠 없다.
이 낡은 쇠창살 따위, 나를 가두지 못한다. 나는 더는 묶이지도, 얽매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 기구하고 기이한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미 고통은 넘칠 만큼 받았다. 아주 그냥 배불리 먹어 속이 메스꺼울 정도다.
이제 와 책임을 벗어 던지고 자기 행복을 찾는다 한들, 누가 나를 책망하고 비난하겠는가?
사고가 과거로 돌아간다. 암살자가 되기도 전, 용이 엘프에게 발톱을 드러내기도 전으로.
평범한 엘프 청년으로서.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예쁘고 착한 여성과 만나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꿈을 꾸던 그때로.
복수고 나발이고 이젠 지겹다. 그 끝은 무한한 고통뿐이다.
고통과 비일상에 물린 그가 보통의 행복을 갈구한다.
그녀는 용에게 당장 성별만 바뀌었을 뿐, 정신이나 육체를 더 오염당한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원래 누구인지, 대체 무슨 사연으로 나와 같이 여기 갇혔는지는 모른다. …그야 용이 관련된 일이니 분명 기구한 까닭이 있겠지. 천천히 알면 될 일이다.
그녀라면.
나라면.
남은 힘과 지혜를 모두 쥐어짜면 어떻게 도망은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용이라 해도 모든 땅과 생명을 제 발밑에 둘 순 없겠지. 이 넓은 세상에 자신과 그녀를 위한 방 한 칸 없겠는가.
생각을 조금 달리하니 세계관과 자기관에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뭐가 종말이냐. 세상도, 나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 우웅….? 여기…. 어디야?”
미안해, 마야. 나는 처음부터 이럴 놈이었나 봐.
가스파르, 너는 아직도 과거에 빠져있겠지. 아니면 또 무고한 이를 괴롭히고 있을지도.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의 미래를 찾으러 간다. 너희와는 다르게 말이야.
“이제야 눈을 떴나?”
나는 새로운 삶과 행복에 가슴을 불태우며 이제야 잠에서 깬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이런 상황에 태평하기는.”
“…? 당신 누구야. 어…? 어?”
그건 정말이지 얼굴처럼 맑고 투명한 목소리였다.
다시 생각해보니 나도 참 미친놈이다.
아직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사랑의 도피는 물론이고, 그녀의 평생을 함께할 계획까지 세웠었다.
그녀가 누군지, 그녀의 의사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면서. 나이에 맞지 않은, 사춘기 소년 같은 주책이다.
다른 이에게 그런 마음을 고백한다면…. 당장 뺨을 맞아도 돌려줄 말이 없다.
자신은 그때 명백히 정상이 아니었다. 그동안 얼마나 고프고 외로웠는지. 이 한 달 동안 치유된 건 그녀가 아니라 자신일지도 모른다.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 경이로운 첫인상보다도 더 완벽하고 고귀한 여자였다.
자신의 출생과 과거에 대한 깊은 혐오감 때문일까, 그녀는 언제나 당당하고 떳떳한 인간이 되고 싶어 했다.
나도 그녀도 칼로서 먹고산 형편이다. 신념과 규율, 형식과 확신으로 빚어낸 군인으로서의 에고를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죽음마저 초연하게 받아들이던 그 자세는, 그런 것에 이미 신물이 난 나에게까지 울림을 주었다.
하지만 그녀를 거기서 죽게 둘 수는 없었다. 그때까지 한 고생도 다 누구 때문인데.
엘프든 인간이든, 게나 소라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 단단하고 두꺼운 외피를 두르면 두를수록, 속은 연약하고 물렁물렁해지기 마련이다.
나도 내 전부를 다해 그런 그녀의 신념을 무시했다. 이 악물고 그녀의 목숨을 구하고 상처를 치유했다. 서로 틱틱대는 말속에 그녀를 향한 진심을 담았다.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낸다. 사실은 무엇보다도 남의 애정과 따스함을 갈구하는 그녀를, 누구보다도 어리광쟁이에 인정 욕구가 강한 그녀를 발굴한다.
내가 차린 음식을 맛보고 환하게 웃던 미소가, 매일 아침 배웅하며 틱틱대던 말투가 벌써 그립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원래 남자였기 때문일까. 그녀는 주먹과 주먹을 맞대거나, 손바닥으로 등을 치는 등 가벼운 스킨쉽이 잦았다.
입은 옷이 마땅치 않은데도 여자로서의 조심성이 하나도 없었다. 중요 부위를 그대로 목격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숫총각처럼 얼굴을 붉히기 바빴다.
지금껏 사랑을 해보지 못한 것도 아니다. 경험이라면 오히려 많은 편이다.
하지만 여자 엘프라는 게 워낙 고고하고 까다로운 자들뿐이라, 그녀와 같이 순수하고 무방비한 이는 처음이었다.
어떤 여자 엘프가 그날 처음 본 남정네 등에 젖꼭지를 생으로 비비겠는가?
하는 말과 태도를 보면, 남자일 때도 여자 경험이 일천해 보였다. 그런 때 없고 숫기 없는 모습이 나의 정복욕과 독점욕을 자극했다.
그녀의 매력은 정말 끝이 없었다.
꼭, 그녀를 나의 것으로 만들리라. 내가 없으면 살 수 없는 모습으로, 다른 남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나만의 것으로.
…끝이 있다면 그녀의 시간에 끝이 있겠지.
천 년이고, 만 년이고, 그녀와 함께라면 하루하루가 재밌을 것만 같다. 아직 보지 못한 그녀의 새로운 얼굴을 잔뜩 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장명종과 단명종 사이의 필연이 있다. 나의 찰나는 그녀의 영겁이고, 그녀의 찰나는 나는 느낄 수도 없는 탄지였다.
나는 알면서도 그녀와의 도피를 택한 거다.
용에게 멸망당한 세계에서, 나 혼자 그녀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며 여생을 보내기 위해.
이미 엉망이 되어버린 삶에 행복을 덧칠할 마지막 기회였으니까.
어차피 바꿀 수 없는 일, 자신에게 그러한 미련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흐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데. ”
“…….”
그렇게 내 삶을 엉망으로 만든 원수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해 왔다.
그 행복을 영원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그 영원엔 다른 어떤 불확실성도 없다.
다시 용에게 발각될까, 매일매일 두려움에 떨 필요도 없다.
탄지를 영겁으로, 그 미소를 나만의 것으로.
기대도 하지 않았던 행운에 또 묘한 독점욕과 승부욕이 불타오른다. 가장 중요한 그녀의 의사는 또 고려대상이 되지 못한다.
시간이 무한하다면, 언제라도 그녀의 마음을 다 녹이고 내 것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녀가 곁에 없으니, 나는 다시 이상해져 버린 걸까?
원수가 뱉은 헛소리를 듣고도 고개를 세로로 끄덕일 궁리만 하고 있다.
정상이 아니다. 나도, 이 녀석들도 전부.
그래도 되찾아야지.
그녀를, 나의 행복을.
“…하겠네. 가스파르.”
“드디어.”
“자네가 핀 모리츠를 구하고 엘프로 만들어준다면, 나는 무슨 일이라도 하겠네.”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