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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화원-54화 (54/62)

〈 54화 〉 계획 (8)

* * *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지껄인 게 아니다.

허세나 흰소리도 아니다.

실현할 자신이 있었다. 인간 수컷을 암컷으로 만들고, 다시 그 인간 암컷을 엘프의 암컷으로 만드는 기예를.

아는가? 말과 당나귀 사이에서 난 버새와 노새는 자식을 가질 수 없지만, 개와 늑대 사이에서 난 늑대개는 자식을 낳고 종을 유지할 수 있다.

정확한 곡절은 알 수 없지만, 말과 당나귀 사이보다 개와 늑대 사이가 더 근연하고 친하다는 이야기겠지.

가스파르가 보기엔 인간과 엘프도 그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만물의 영장인 용에게 인간은 그저 귀 짧고 빨리 죽는 엘프였으며, 엘프는 좀 더 희고 가진 마나가 많은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당장 실험만 안 해보았지, 인간과 엘프 사이라면 번식능력이 있는 자식이 태어나도 놀랍지 않다. 도마뱀을 용으로 바꾸는 일과 크게 다를 게 없다.

게다가 견본이 될 암컷 엘프도 있다. 마야든, 아일라든, 누구라도 좋다.

가장 중요한 성기와 번식능력은 참고할 수 없겠지만, 그건 나름의 임기응변으로 대처 가능하다.

정말 완벽한 엘프 암컷을 구현하겠다는 게 아니다. 엘프와 거의 유사한 외관, 못지않은 수명, 종을 이을 번식능력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엘프가 사실상 멸종한 지 벌써 수천 년이다. 저 에이든만 불만 없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핀과 자식을 엘프라 불러도 무어라 할 이 하나 없다.

만 년 전의 가스파르라면, 이런 생명을 모독하는 행위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겠지. 지레 겁을 먹고 제대로 연구조차 하지 못했을 거다.

이 용의 그릇이라는 어정쩡한 결과물도 실력도 지식도 미천했던 과거의 실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선왕에게서 해방된 직후, 그는 좌절하고 부침을 겪었으나, 향상심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에이든과 같은 실험체를 괴롭히며 마력과 생명에 대한 지식을 끊임없이 쌓아 올렸다. 연구자이자 학자로서 생명과 마력의 근원을 탐구했다.

그건 멈추고 싶다고 멈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과거의 명성과 부 모두 그런 지난하고 착실한 노력 끝에 쌓아 올린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복수라는 검은 미명은 젊은 가스파르의 마음에 불을 지피기 충분했다.

그러나….

그러나 선왕은 그를 남겨두고 어이없게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의 자식은 아직 어렸고 어리석었다. 불타던 마음도 시간이라는 파도 앞에 흐릿해져 버렸다. 목적 잃은 복수심만큼이나 볼썽사납고 허전한 것은 없다. 노력은 멀고 포기는 가까웠다.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계획을 가다듬고 마법 이론을 정비하는 데에 쏟아부었을까. 그리운 추억이라기에는, 가슴 깊은 곳에 남은 연구실의 풍경이 너무나도 살풍경했다.

그래,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과거는 과거로. 잊을 건 잊고 살자.

이제는 어여쁜 메이드들과 함께 행복만 누리자.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녀가, 리오나가 모든 걸 바꾸어 버렸다.

이만 년을 넘게 살았는데, 남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방법도,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방법도, 이 몇 달간 그녀에게서 처음 배웠다.

그녀를 껴안고 희롱하던 크라우스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다.

그와 그 아비가 한 그 어떤 폭정보다 괘씸하고 화가 났다. 단순히 자신의 물건에 손을 댄 것에 지나지 않는데도.

리오나가 가스파르의 마음속에 들어간 건, 벌써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그는 잠들어있던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당하고만 사는 건 원래 그의 성정이 아니었다.

용과 이종족들을 있어야 할 모습으로 되돌리고, 크라우스의 지배를 무너트려 자신이 그 정점에 선다.

그녀와 그녀 배 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거두었던 계획을 다시 실행할 때가 왔다.

시기와 여건은 이미 완벽하다. 깔린 길을 그저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이제야 마음이 섰나. 그래, 확실히 약속하고 축복해주지. 자네와 그녀의 행복한 미래를 말이야.”

“…….”

에이든은 못내 미심쩍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뜬다. 일단 고개를 세로로 흔들었을 뿐, 말과 일에 행방에 따라 얼마든지 태도를 바꿀 수 있다는 암시다.

그래도 괜찮다. 가스파르도 그를 그렇게 순순히 놓칠 마음은 없었다.

앞으로 펼쳐질 전쟁이나 혁명에, 그와 같은 미약하고 같잖은 이종족은 일견 무의미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계획이나 말하게. 상세한 내용은 아직 하나도 듣지 못했으니.”

“그래, 계획. 계획 좋지.”

하지만 가스파르는 그 어떤 세력이나 병사보다 그가 필요했다.

주로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용의 통치는 그것을 주도한 용이 생각해도 무척이나 강압적이고 무자비한 것이었다.

힘으로 몸을 지배하고, 마법으로 정신을 제어한다. 용이 한 번 눈길을 들이면, 이종족은 전부 아이와 마력을 제공하는 노예가 되어버린다.

처음부터 용과 이종족관의 관계가 파탄 난 것은 아니었다. 과거 용의 문명이 멀쩡했을 적에는 하늘과 땅 사이, 물자와 문화의 교류가 활발했을 때도 있었다.

괜히 늙은 암컷 용들이 신물을 내며 잠적을 택한 게 아니다. 닥쳐온 위기와 선왕의 위압에 가려졌을 뿐, 당시 동족이 휘두르는 전에 없던 폭거에 회의를 느낀 용은 한둘이 아니었다.

화원을 남겼던 내 친우도 용의 멸절을 주장하며 스스로 눈을 감았었지. 용의 위기가 대두된 바로 그 날에….

“하, 그런 것치고는 아직도 새 종족을 정복하고 착취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던데.”

다분히 용 중심적인 회고에, 참다못한 에이든이 치고 들어온다. 감상이 깨진 가스파르가 미간을 찌푸린다.

“여기서 내가 말한 용은 나와 같이 옛 시절을 기억하는 늙은 용들이네. 태어날 때부터 다른 종족을 자신 밑으로 깔보는 요즘 용들과는 다르지. 좀 더 이야기를 듣게나, 에이든.”

“흥, 어차피 다 너희들 때문인데….”

“아, 아버지. 저랑 형들은 딱히 그런 마음은….”

가스파르의 사족에, 에이든과 마르크의 말이 겹친다. 셋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다가 마르크, 에이든 순으로 가스파르의 눈을 피했다.

“아무튼,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지금도 선왕과 그를 계승한 크라우스의 통치방식에 의문을 가진 용이 많을 것이다.

선왕이 워낙 유능하고 행동에 사사로움이 없었기에 지금까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그 아들 크라우스는 다르다.

그는 제 아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면서, 받은 권력으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급급했다. 그런 모습에 염증을 느낀 가신은 결코 적지 않겠지.

모두 용이 명목상으로 평등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다. 종족의 안위가 안정을 찾은 지금, 왕의 필요성에 의문을 가진다 한들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다 자네의 추측이자 바람 아닌가? 그리고 설령 그 말이 맞는다 하더라도 굳이 자네를 따를 이유는 그들에겐 없어.”

“용과 그 사회에 관한 일인데 자네보다 내가 모르겠나. 어쩌면 지금도 이야기를 엿듣으며 우리 계획에 끼어들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지.”

“……?”

“…….”

가스파르의 빙빙거리는 어투에 에이든은 고개를 기울이고, 닐스는 숨을 참는다.

닐스는 그가 이쪽을 떠보는가 싶었지만, 확신이 없었다.

그에겐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가스파르라지만 설마…?

에이, 아니지. 자신이 제도 안에서 쌓은 연구 성과가 얼만데.

닐스는 자신을 믿기로 선택했다. 계속해서 침묵을 관철한다.

“뭐, 후자는…. 그래서 자네가 필요하다는 거 아닌가.”

다행히 가스파르는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이는 참새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강인하고 조직적이었으나, 결국 용들에게 첫 번째로 멸망당한 종족, 엘프.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고향과 동지들을 그리워하며, 크라우스의 모가지에 칼을 꽂으려 한 자네들의 절개를 세상 모든 용이 기억하네.”

“하하, 참.”

에이든이나 아일라도 가만있는데, 웬걸 마르크가 부끄러운 듯 뒷머리를 긁는다. 자기 이야기도 아니고 자기 엄마의 과거 이야기인데도 그런다.

“그 암살을 시도했던 엘프도, 또 그 엘프의 마지막 생존자인 자네도 이미 모두 나에게 있지. 거기에 더해서 기적적인 종의 소생까지 이 내가 실현한다면?”

“하.”

“명분이란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보이다가도 가끔 무서울 정도의 힘을 보여주지. 자네와 내가 함께 손을 잡고 멸망당한 종족들의 소생과 예전 관계로의 복고를 말한다면, 크라우스에 비해 확실한 도덕적 우위를 가질 수 있을 거야. 몇몇 늙은 용들에겐 그런 게 정말 중요하거든.”

그리고 만약 일이 그렇게 된다면, 마르크 이외의 다른 아들들도 결국 내 뜻을 따르게 될 것이었다.

일단 일이 시작되면 용의 사회는 둘로 갈라질 수밖에 없다. 사회 각 곳에서 나름의 지위를 가진 그 녀석들도 결국 선택을 강요받게 될 터.

그렇다면 평소 자신들이 말하던 이상을 지키기 위해, 나의 명분에 붙을 수밖에 없게 되겠지. 내가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말이야.

…나도 그 녀석들이 싫지만, 그 능력만은 인정하고 있다. 애초에 누구 자식인데.

그리고 정말 수가 틀린다 해도…. 당장 그 녀석들의 어미가 나에게 있다. 나에게 합류는 안 해도 반항은 못 하겠지.

가스파르는 생각을 말로 바꾸며 곰곰이 제 구상을 되짚어 본다. 굳이 에이든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그 녀석들의 존재도 중요한 계획의 일부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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