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의 화원-55화 (55/62)

〈 55화 〉 계획 (9)

* * *

하.

라는 짧은 한숨 이후로 말이 더 나오지 않았다.

가스파르와 도덕이라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에 에이든의 표정이 썩어들어간다.

하는 말은 대강 알겠다. 핀을 엘프로 만들어줄 테니, 나와 그녀보고 가스파르 세력의 간판이 되라는 이야기인가.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도저히 못 할 일은 아니다.

체면이고, 배알이고, 그리하여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비하면 전부 사소한 것이다.

그래. 그 정도 일쯤이야.

어차피 용의 사회에 관해 잘 모르는 에이든으로서는 할 수 있는 말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크라우스의 주력 부대는 물론, 1군단, 2군단 모두 대양 너머 거인족의 대륙에 있다네. 들리는 말로는 전황이 그리 좋지 않다고 하더군. 아직 죽은 이는 없다 해도 마력 등 다른 소모가 크다고. 거인 특유의 높은 마법 저항과 억센 육체를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지.”

“거인이라니…. 자네들은 정말 정도를 모르는군. 대체 그 거구와 교접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설마 용의 형상을 유지한 채로…. 그렇고 그러겠다는 건 아니겠지.”

“크라우스는 그럴 생각인 것 같던데. 뭐, 내 아는 녀석 중엔 젊어서 코끼리와 하려다 밟혀 죽을 뻔한 이도 있네.”

“…….”

농담으로 한 소리였는데, 훨씬 더 농담 같은 현실이 되돌아온다. 괜히 물어봤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야. 소모된 그들에 반해 내 3군단은 인간을 쉽게 정복한 후 그 힘을 온존하고 있지. 게다가 그들은 거리까지 머니 고변이 터진다 해도 바로 오지는 못해.”

“그래서 그 틈을 타, 자네와 자네 휘하의 3군단이 크라우스의 목을 친다는 건가.”

가스파르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래. 나와 마르크가 앞으로 한 달 동안, 자네가 핀 모리츠가 있다는 왕립 아카데미에 잠입할 수 있도록 정보를 모으고 채비를 정돈하겠네. 그녀를 구하는 건 자네인 게 그녀에게도, 자네에게도 좋겠지. 그래야 그림도 제법 날 테고. 자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내 3군단과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이 이미 저 창공에 준비되어있을 거야.”

“흐음….”

그와 반대로 에이든은 살짝 고개를 젓는다.

특별히 잘못된 부분은 없지만, 왕의 목을 치기에는 조금 부족한 계획 아닌가?

그리고 정작 중요한 세부사항은 차차 알려주겠다는 건가. 지금도 핀이 고통받고 있을 텐데, 한 달이나 기다리겠다는 여유는 또 뭔가.

“계획이 그럴듯하긴 해도 아직 완벽하지는 않은 거 같은데. 그 크라우스라는 붉은 용은 자네보다 강해. 그것도 확연히. 둘 모두에게 당한 이가 이런 말을 하면 가소롭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바로 그녀의 이름을 올리지 않고 딴죽을 걸어본다.

“아니, 자네 말이 맞네. 힘만으로 따지면 크라우스는 나는 물론이고 그 선왕보다도 강하지. 나를 포함한 휘하 모두가 달려든다고 하더라도 승리를 장담하진 못해.”

자존심을 굽히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가스파르는 의외로 순순히 에이든의 말을 긍정했다.

다소 과장이 있긴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는 그 정도로 강하다. 앞서 말한 수많은 문제점을 안고도 그의 치세가 유지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어떠한 생명이든 제 삶을 다하면, 그 일생 축적한 마나를 하늘로, 땅으로 환원한다. 그건 한낱 벌레부터 용까지, 결코 피할 수 없는 유구한 자연의 순환이자 섭리였다.

하지만 선왕은 스스로 그 궤에서 벗어났다. 그는 죽기 직전, 평생을 살며 쌓은 마나를 아들 용 크라우스에게 전부 물려주었다.

가족 관념이 약한 용으로서는 굉장히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결국, 크라우스는 아비와 저 자신, 다른 용 모두를 압도할 힘을 얻었다.

다른 용들이 바보라 그런 짓을 안 한 게 아니다. 모든 마나가 환원되지 않고 영원히 생명의 몸 안에 갇힌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땅은 갈라지고 강은 마른다. 하늘은 어두워지고 바람은 멎는다. 새로운 생명이 자라날 자리가 사라지고 순환이 멎는다.

왕은 권력을 위해 금기를 범했다. 형식을 중요시하는 늙은 용들에게는 용서받지 못할 행위였다.

…순환이니, 금기니, 가스파르에겐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혼자 그렇게 편법으로 힘을 얻으니 괜스레 배알이 뒤틀리는 것도 사실.

뭐, 이 또한 명분이라면 명분이 될 수 있겠지.

“그렇다면…….”

그 계획은 다 무가치한 것 아닌가.

결국, 원흉인 크라우스를 칠 수 없다면, 핀을 되찾을 수도, 엘프의 문명을 다시 건설할 수도 없다. 이 녀석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아니지. 아직 가장 중요한 부분이 남았네. 돌고 돌아 또 자네 친구 핀 모리츠네.”

“뭐?”

그녀는 무력하다. 아직 군인의 뜻을 저버리지 않은 그녀에게는 애석하지만, 도저히 이러한 싸움에 낄 수 있는 실력이 아니다.

그런 그녀가 왜…?

“에이든, 생명이 가장 취약해지는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나? 약한 동물일수록 그 시간은 짧고, 강한 동물일수록 길고 여유롭게 그 시간을 가지는 걸 특권으로 생각하지.”

“…또 그런 소릴.”

아니, 음담패설 하기 좋아하는 변태 아저씨도 아니고. 가스파르는 또 그런 이야기를 했다. 몸의 욕망이라면 옆에 메이드들에게 매일 풀고 있을 텐데.

생명이 가장 취약할 때, 그야….

그야…?

이 녀석은 왜 굳이 괜히 핀의 이름을…?

에이든은 자신도 모르게 가스파르의 멱살을 잡았다.

“후우….”

닐스는 조용히 학교로 돌아와 참새의 모습을 풀고, 제 분신의 모습을 지웠다.

핀 모리츠라는 인간 여성은 그가 떠났을 때와 변함없는 모습으로 침대 위에 잠들어 있었다.

자신의 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모르고, 아주 태평하게 말이다.

“너도 참 딱하구먼그래.”

가스파르는 역란을 일으킬 생각이다. 그것도 한때 용의 외적이었던 엘프와 인간을 사용해서.

이빨 빠진 호랑이라 해도 그의 이름은 아직 구세대의 용에게 큰 의미가 있다. 선왕 이전에 가장 강했던 용이 그였으며, 용이 이 구질구질한 명맥을 잇고 있는 것도 반은 그 덕분이다.

방금 들은 바로는 3군단은 이미 뜻을 같이하는 것 같고, 엘프를 얼굴로 내세운다면 사이가 좋지 않다는 아들들도 그의 뜻을 따를 터.

선왕의 기억을 간직한 이들과 크라우스 휘하의 망나니들, 더 먼 과거를 추억하는 이들과 가스파르의 명분에 이끌린 이들이 피할 수 없는 충돌을 일으키고.

곧 모든 용이 가스파르의 의지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하아….”

나도 예외는 되지 못하겠지.

크라우스의 망나니짓도 이제는 수천 년이 된다. 왕궁에 눌러사는 가신들 사이에서도 계속해서 불만이 터져 나오니.

가스파르가 한 번 뜻을 천명하면, 꼭 그의 뜻을 따르지 않더라도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

크라우스가 그 거센 불길을 걷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진 않는다.

가스파르의 부대를 제외한 다른 부대는 모두 거인과의 싸움에 여념이 없다. 상황이 호전 될 거라 낙관하는 이도 왕 말고는 없다. 여기서 한 달이 더 지난들 달라지는 건 없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기막힌 시기를 잡았다. 그 3군단이 나약하고 마력도 적은 인간들과 나서서 싸운 건 처음부터 이 순간 노렸기 때문인가.

역시 가스파르다. 만 년이 더 지나도, 능구렁이같이 재화와 마력을 독식하던 그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도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여전히 있다.

크라우스, 왕의 힘 그 자체.

가스파르가 설령 왕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는다고 해도, 왕의 목숨을 완전히 끊지 않으면 선왕의 피와 이름이 계속해서 그를 괴롭힐 터였다.

“우웅, 으으응?”

거기서 등장한 게 저기 저 태연스럽게 잠꼬대를 하는 핀 모리츠란 인간.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크라우스는 지금 저 여인에게….

“닐스.”

“네, 네넷!”

허공에 울려 퍼진 목소리가 상념에 잠겨있던 닐스를 깨운다.

크라우스의 원감 마법이다. 전에 지정한 자와 의지와 육성을 통하는 마법.

한창 그에 대해 생각하던 닐스는 눈에 띄게 당황하고 만다.

“…? 왜 그리 호들갑인가. 나에게 한두 번 이렇게 불린 것도 아니면서.”

“아, 아무 일도 아닙니다. 크라우스 님”

“흥, 그래.”

크라우스도 잠시 의문을 품었지만, 닐스에겐 큰 흥미 없다는 듯 말을 돌렸다.

“그런 것보다 핀이네. 요전에 던져줬던 그 여자 말이야. 우리 아카데미의 첫 수업은 들었나?”

“아뇨, 아직은. 다친 육체는 제가 바로 고쳤지만, 무슨 일인지 정신적 소모가 극심해서…. 그래도 내일이면 깨서 다시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 겁니다.”

“으음…. 되도록 빨리 교육을 끝마쳐 주었으면 하는데. 환상이나 세뇌 등 정신을 안정시킬 방법은 많지 않았나?”

“제, 제가 어찌 크라우스 님의 숙녀분께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그래도 원하시는 게 있으시다면야….”

훗. 하니 허공 저 너머에서 크라우스가 작게 웃는 게 느껴졌다.

“역시 넌 좀 뭘 아는 놈이야. 감히 허튼짓을 했으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누구와는 다르게 예의를 아는군. 그년은 제정신을 유지한 채 따먹을 생각이니 그쪽으론 손도 대지 말게나. 정식 커리큘럼을 밟힐 필요도 없어. 여자의 몸과 용에 대해서만 일단 알려 줘. 나머지는 내가 직접 교육할 테니.”

“아, 예에….”

“모쪼록 잘 돌봐주게나. 괜한 잡놈이 그쪽으로 갈 수도 있는데, 그땐 내게 말하고. 그럼.”

용건이 끝나자 바로 뚝 하니 끊어버린다.

이 원감 마법을 이쪽에서 거부하거나 다시 이을 방법은 없다. 그런데도 연락은 무슨 연락.

애초에 나는 남의 여자 하나 간수하겠다고 선왕에게서 이 직을 하사받은 게 아니다. 해야 할 마법 연구도 있고, 이미 눈독 들여놓은 다른 학생도 많은데 내가 왜….

왕은 여전히 재수도 싸가지도 없었다.

그래, 크라우스는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이 여자에 푹 꽂혀있다. 바보같이. 그게 가스파르의 함정인지도 모르고.

가스파르는 이 핀 모리츠란 여자의 몸에 고독과 저주를 심어 크라우스와 교접시킬 생각이다.

그것도 그녀와 연인이나 다름없는 그 엘프, 에이든을 이용해서.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는지, 일이 그렇게 돌아가니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그의 성에서 들은 내용은 이렇다.

엘프를 먼저 이 학교에 잠입 시킨 다음, 그의 모습으로 그녀를 안심시킨다. 그리고 세뇌 방지니, 보호의 마법이니 해서 가스파르가 미리 준비한 용 암컷화의 저주를 그녀의 몸에 심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크라우스는 그대로 핀과 교접하고, 자기도 모르는 새에 점차 암컷이 된다

마력의 출력은 왕이 더 세지만 그 솜씨는 가스파르가 더 낫다. 그건 곁에서 봐도 확실했다. 그가 정말 공을 들이면 왕에게 들키지 않고 이루어낼 수 있겠지.

왕은 거사가 일어나기도 전에 가스파르의 노예가 된다.

가스파르가 왕궁에 발을 들일 때, 이미 그녀가 된 그는 무력하게 무릎을 꿇고.

곧 온 왕국이 가스파르의 것이 된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퓨후우, 퓨후우우….”

아무것도 모르는 핀 모리츠는 여전히 단 한숨을 내쉰다.

에이든이라 불린 엘프는 그녀를 그렇게 넘겨줄 수 없다며 길길이 날뛰었으나, 실력이 없는 그의 말은 가스파르를 설득하지 못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건, 제압당하고 다시 묶인 그의 머리에 가스파르가 어떠한 마법진을 새겨넣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봐도 멀쩡한 것은 아니었지. 모든 건 결국 그의 뜻대로 될 것이었다.

“…….”

하지만 아직 나, 닐스가 있다.

그러한 저주가 이미 있다는 걸 알면,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엘프가 그녀에게 들르고, 크라우스가 이 여자에게 손을 대기까지 사이에.

내가 그것을 지워 낸다면.

아니, 당장 내가 알아낸 사실을 바로 왕에게 전하러 간다면.

“일이 왜 또 이렇게….”

어느샌가 용의 운명은 이 여자와 나의 손끝에 달리게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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