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가스파르
* * *
“가스파르.”
에이든과의 대화는 끝났다.
다른 이들은 모두 물러나고, 집무실엔 가스파르와 리오나만이 남았다. 방금까진 집무실이 좁게 느껴졌는데, 둘만 남은 지금은 휑하기만 하다.
“…리오나.”
모두가 납득할만한 결과는 아니었다.
“어차피 이럴 거였으면 왜 굳이 대화를 한 거야?”
“하고 싶은 말은 알아, 리오나…. 하지만 이게 내 문제인가? 에이든이 또 그렇게 달려들 줄은 몰랐지.”
말도 안 된다.
당연한 거 아닌가?
제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넘기겠다는데, 가만있을 남자가 세상 어디에 있나. 가스파르가 숨기지도 않고 그런 말을 할 땐, 리오나도, 마르크도 놀랐다.
그를 만 년 동안 보아온 아일라만이 냉정히 둘 사이를 갈라놓았을 뿐.
기가 찬다.
그런 말을 하면 사달이 날 거란 생각도 못 하나? 아니, 상식적으로 말이야.
덕분에 마르크와 리오나의 노력도 다 물거품이다.
게다가 가스파르가 그렇게 격노한 에이든에게 더한 말이 놀랍다.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군. 어차피 자네 혼자서 그녀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자네 대신 그녀를 구해주겠다는 거네. 실력이 없다면 잠자코 따르면 될 일을.’
불에 기름은커녕 흑색화약을 들이붓는 수준이다. 에이든이 다시 가스파르에게 달려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시 몸을 묶고 입을 틀어막아도 지랄발광을 하길래 결국 강제로 잠들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가스파르는 태연히 자기 잘못이 뭐냐며 항변하고 있다.
“그게, 그…. 하아, 됐어.”
리오나는 가끔 가스파르에게서 위화감을 느꼈다. 그녀에겐 정말 완벽한 남자지만, 남에게는 놀랍도록 차갑고 매몰찼다.
리오나가 그에게 하는 사랑과 자신이 리오나에게 하는 사랑은 지고로 알면서, 남과 남이 그런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못한다.
관계와 명분을 이용하면서, 정작 그것들에 어떠한 감정이 담겼는지 떠올리지 못한다.
그건 결여이자 몰이해였다.
이종족보다 아득히 우월한 용이다. 가스파르는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용이었으니, 평생 남을 아래로 보고 살았어도 이상하지 않다.
거기에 더해 선왕에게 그런 자존심을 구겨지기까지 했다. 이제 와 남을 이해하라는 것이 무리한 부탁일지도 모르지.
그가 마음을 썼다면 그나마 메이드들 정도다. 확실한 주종관계 안에서나 성립하는, 그런 관계.
오히려 리오나가 특별한 경우였다.
그녀의 목에서 제 역할을 잃은 분홍색 보석이 빛난다. 아랫배의 문장도 마력을 공급하고 그릇의 육체를 유지하는 기능만 남았을 뿐, 더는 정신적으로 그녀를 얽매지 못한다.
그건 가스파르가 남에게 보내는 최고의 존중이자 경의였다. 둘은 서로를 허물없이 대하며, 성에서 리오나의 말은 가스파르의 말과 동급으로 취급된다.
그녀는 이제 생각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그래도 그가 아닌 그녀요, 레온하르트가 아닌 리오나지만, 이제 와 아무도 그것을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미 한번 비틀어졌다 해도, 리오나는 온전히 리오나이지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욱더 가스파르가 사랑스럽다.
아직 그는 행복하지 않다. 사랑을 속삭이고 서로의 살냄새를 맡을 때에도, 이따금 슬픈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닫아버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달이 나고 애가 타는 건 리오나였다.
처음 핀을 부관으로 불렀을 때와도 같다. 우정과 사랑의 차이는 있지만, 뭐.
도저히, 도저히 가만둘 수가 없는 거다. 이미 내 사람이라고 생각한 이가 불행하고 우울해하는 걸 참을 수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
그녀의 삶엔 결여도 몰이해도 없었다. 불행도, 우울도. 아니, 그 어떤 부정적인 사고나 감정 하나 없었다.
부모와 환경이 남긴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각만 가득했을 뿐.
그가 전쟁놀이의 선봉에 서면, 동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골목골목을 감싸 안았다. 그가 애교를 부리면 부모님께서 온갖 달고 포근한 것을 한아름 안겨주셨다.
그가 손을 잡으면 모든 귀족 영애가 얼굴을 붉혔으며, 그가 춤을 추면 병사들은 환호하며 격식 없이 즐겼다.
어차피 모두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 아니겠는가. 술집에 들어가면 응당 취하고 춤춰야 하는 것처럼, 삶과 사람을 즐기지 않는다면 죄악이나 다름없다.
그건 바뀌지도 않고, 버릴 수도 없는, 리오나 고유의 성정이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가스파르. 이미 내가 있는데. 나로는 부족한 거야?
그의 잠들었던 욕망을 부추긴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그 마음에 찌든 어둠을 지우면, 자신이 빛으로서 그의 전부를 비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일이 끝나면 가스파르는 왕으로서, 리오나는 왕비로서 결혼식을 올리고, 새로운 왕자의 탄생까지 모두에게 축복받을 생각이었는데.
“하아….”
“가스파르….”
가스파르가 관자놀이를 집으며 한숨을 내쉰다. 리오나는 그런 그를 등 뒤에서부터 껴안는다.
자연스럽게 리오나의 가슴이 가스파르의 등에 닿는다. 가스파르는 살며시 고개를 돌리고, 둘은 누구랄 것도 없이 입술을 맞댄다.
당장 나눈 대화나 분위기 따위 상관없다. 마치 그러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양, 둘은 한동안 서로의 혀와 입술을 탐한다.
맞닿은 체온에서, 리오나는 가스파르의 떨림을 느낀다.
그 계획이 이제 눈앞에 보이는데, 손에 잡힐 것만 같은데, 가스파르는 여전히 마음의 구멍을 메우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스파르가 누군가의 위에 서도 되는 걸까.
리오나의 마음속에서 한 가지 결심이 선다.
천천히 두 입술이 멀어지고, 한 가닥 하얀 실이 그사이에 걸린다. 아쉬움과 짜릿함은 옅어졌지만, 그윽함과 단맛은 진해졌다. 용과는 다르게, 인간의 성숙은 이토록 빠르다.
리오나가 아닌 달밤에 춤을 추던 그다음 날, 마르크를 보낸 가스파르는 바로 리오나를 깨웠다.
그리고 그녀에게 모든 진실을 말했다. 그가 그녀에게 저지른 세뇌와 조작. 감춘 사실과 꾸며 둘러댄 말까지 전부. 그는 평생 처음으로 남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가스파르도, 리오나도, 그 모든 걸 덮고 서로를 사랑한다고 한 것이다.
단, 조건이 있었다.
“가스파르.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리오나가 회색 머리에 코를 박으며 가스파르를 간지럽힌다. 그도 미소지으며 목을 움츠러트릴 뿐, 고개를 빼진 않는다.
둘은 마치 어린 연인처럼 코끝과 뺨으로 서로를 느끼고, 달리 듣는이도 없거늘 서로의 귓전에 마음을 속삭인다.
아직도 미칠 듯이 서로가 좋다. 서로가 서로의 삶의 이유이자 행복인 건 변함이 없다.
“리오나, 그건….”
하지만 지금 나누는 속삭임은 연인의 그것처럼 온연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강요는 안 해. 이 계획은 전부 가스파르가 생각한 거니까.”
“리오나….”
리오나는 욕심쟁이였다. 자신을 되찾은 그녀는 가스파르를 번하고 올바른 길로 이끌고 싶어 했다.
그 길이 자신과 가스파르를 행복으로 이끄리라 믿었다.
진실을 안 그날, 리오나는 인간과 다른 생명을 원료로 하는 분홍 액체들을 모두 버렸다.
가스파르에게 일러, 성의 메이드와 학교의 학생들에게도 진실과 선택권을 주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가스파르의 곁에 남기를 택했지만…. 그렇게 의미 없는 짓은 아니었다.
가스파르가 저지른 일과 그들을 둘러싼 과거는 변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그들의 의지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일은 꼭 필요한 행위였으니까.
그러면서 가스파르의 마음도 조금은 넓어졌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그가 에이든에게 던진 말과 행동은 꽤 실망스러웠다.
핀은 아직도 리오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다. 여자가 된 모습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그런 그녀가 아끼고 사랑하는 이라면 리오나도 믿을 수 있다.
무엇보다 에이든의 삶과 처지는 제삼자가 보아도 딱하기 그지없다. 지금까지 그렇게 고통받았다면 이제 행복을 주어도 좋지 않을까.
제 손으로 핀을 다른 남자에게 넘기라니…. 그것도 자신을 믿는 핀의 마음을 이용해서….
그건 너무 가혹한 처사다.
게다가 그 망나니 크라우스다. 그의 거친 팔뚝과 사나운 마법을 떠올리면 아직도 몸이 떨리고 머리칼이 송연하다.
가스파르도, 핀도, 에이든도.
모두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없을까.
“그래도, 응? 가스파르….”
리오나의 무르익은 손길이 가스파르의 어깨부터 가슴팍을 타고 흐른다.
등에 닿은 가슴은 꾸욱꾸욱 눌리며 부드러운 촉감을 그에게 전하고 있다.
하아. 리오나의 단 향기가 가득 담긴 한숨이 그의 뺨에 닿는다.
크고 너른 가스파르의 몸이, 작고 여린 리오나의 품 안에 쏘옥 안긴다. 그 회색 머리는 리오나에게 거의 둘러싸인 거나 다름없다.
임신하고부터서일까, 리오나의 손짓, 발짓이 부쩍 여성스러워졌다. 행위뿐만이 아니다. 사고와 의식까지 전부 맹랑한 아녀자와 다름없게 되었다.
아름다운 여성의 삶은 쉽다.
그녀가 그런 세상 편한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없다면, 가스파르가 그런 생각을 할 마음이 들게 만들면 된다.
분홍 액체를 다 버리거나, 모두에게 진실을 알리는 일.
결국, 가스파르가 리오나에게 동의하지 않았다면 다 하지 못했을 일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나 정체성보다 지금의 리오나를 택했다.
결여된 그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건 그녀밖에 없다.
“다시 한번 생각해 주면 안 돼?”
가스파르는 그 사실을 모르면서도 그녀를 택했다.
하지만 리오나는 안다.
“…….”
후우. 리오나가 일으킨 산들바람이 가스파르의 목과 귀를 간지럽힌다.
“으응~? 가스파르~?”
하웁, 앙.
이제는 귓불까지 입술로 깨물며 한껏 높고 간드러진 소리를 흘려 넣는다.
가스파르는 그녀가 자신에게 아양과 애교를 떠는 줄로만 알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리오나는 언제나 이렇게 착하고 말 잘 듣는 가스파르를 만든다. 가스파르와 처음 진심을 통한 날부터 지금까지, 이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 알았어. 생각해 볼게….”
“하앙…. 가스파르, 사랑해....”
리오나가 전보다 조금 부푼 양 가슴 사이로 가스파르의 뒤통수를 끼워 넣는다. 팔에 힘을 주어 한껏 그를 껴안아, 계속해서 자신의 향기와 체온을 흘려 넣는다.
가스파르도 정말 행복하다는 듯이 자애롭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어리광을 받아든다.
전부 리오나가 바란 대로였다.
곧 그녀만의 착한 가스파르가 그녀가 원하는 답을 내어주겠지.
그녀가 모두가 행복한 왕국의 왕비가 되는 날도 그리 멀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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