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의 화원-57화 (57/62)

〈 57화 〉 학교 생활 (1)

* * *

“으, 으윽.”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지독한 악몽을 종일 꾼 기분이다. 속이 메스껍다.

이런 경험, 한 달 전에도 했었는데….

“오, 이제야 눈을 떴군.”

이런 소리도 어디서 들었던 거 같고.

그래도 그때와 다르게 잠자리는 푹신하고 포근했다. 차고 딱딱한 돌바닥이 아닌, 부드러운 침대와 이불이 몸을 감싼다.

마음이 혼잡하고 머리가 아픈데도, 몸은 묵은 체증을 씻어낸 것처럼 상쾌하다. 한동안 핀을 괴롭혔던 발목의 통증도 이젠 없다.

상반된 감각이 혼란을 가중한다.

“그래, 핀 모리츠. 정신이 좀 드나?”

침대 옆, 한 중년 남성이 낡은 나무 의자 위에 앉아 있다.

몸집은 작아도 선이 굵은 강골이다. 눈 밑이 어둡고, 인상이 퍽 진한 것이 젊어서는 꽤 미남이었을 것 같다.

어딘가 이국의 향신료 같은 알싸한 냄새가 난다. 늘어진 로브의 밑단에 검은 얼룩이 군데군데 묻어있다. 그곳에서 짙은 마력의 잔향이 느껴진다. 문외한인 핀도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다.

평생을 마법 연구에 몰두한 학자… 인 걸까. 그 아린 체취는 본디 났던 것이 아니라, 지속된 마력 오염이 딱지나 터럭처럼 몸에 들러붙어 생긴 것이리라.

세로로 갈라진 노오란 동공이 핀을 핥듯이 내려다본다. 섬찟 소름이 돋는다. 인간은 포식자 앞에 서면 쉽사리 제 몸을 가누지 못한다.

말투나 행색은 그리 위험해 보이지 않지만, 그 또한 용이다. 인간은 두려워 오금이 저리는 것이 정상. 그러나.

“아, 아아….”

용. 그 증오스러운 존재를 의식하자마자, 몽롱했던 기억들이 하나둘 되살아난다.

겨우 한나절 만에 나라를 빼앗긴 치욕스러운 기억,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고 돼지나 닭처럼 늘어선 여체들.

끔찍한 기억이야 수없이 많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너, 너! 에이든, 에이든은 어디 있어!”

깨닫듯 정신을 차린 핀이 몹시도 거친 기세로 용에게 달려든다.

에이든, 에이든. 피투성이가 되어서까지 두 용의 틈바구니에서 나를 지켜내려 했던 그 에이든.

나를 살려주고, 안아주고, 위해주었던 유일한 타인.

그에 대한 핀의 마음이 유전자에 각인 된 공포를 이겼다.

당장 저 목을 비틀어서라도 그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리라.

“…잠깐 진정하게.”

그러나 핀의 손은 그 두꺼운 목에 닿지 못했다. 용의 작은 손짓 한 번에, 핀의 몸은 허공에 박제된 것처럼 턱 하니 그 움직임을 봉인 당한다.

“아악…. 으윽….”

자신은 또, 무력하다.

감정이 정리되지 않는다. 언제부터 흘렸는지도 모를 눈물이 뺨을 타는게 느껴졌다. 에이든의 얼굴, 상처, 풍채와 체온. 그와 그의 것을 떠올릴 때마다 머리와 가슴이 아득하니 뜨거워진다.

턱 끝까지 흘러 방바닥에 떨어지는 눈물. 양 어금니를 으깰 기세로 앙다문 입.

눈앞의 노란 눈동자는 그 모든 걸 천연히 관찰하고 있었다.

“으, 으으……?”

기분 탓일까? 세로로 갈라진 그 동공에 슬픔과 괴로움의 빛이 비친다. 참담한 연민의 그림자가 눈 아래에 걸린다.

도마뱀 녀석들에게도 그러한 감정이 있었나. 애초에 이 녀석은 누구지? 언뜻 드러난 의외의 감정이, 핀은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이 용은 대체….

몸이 멈추자 마음이 조금 진정된다. 어차피 이 가녀린 팔로는 남의 목을 비틀지 못한다. 힘의 차이는 이미 명백하다. 핀은 그저 그의 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후우……. 그래. 자네가 가장 괴롭고 힘들겠지. 하지만 어쩌겠나. 자네나 나나 힘이 없는걸.”

잠깐의 침묵 끝에 터져 나온 것은 그런 한숨 섞인 푸념이었다.

닐스는 핀에게 이곳이 어디며, 무슨 목적으로 세워진 곳인지, 자신은 누구고, 누가 그녀를 데려왔는지 모두 말했다.

확 가스파르의 흉계까지 말해버릴까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녀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힘든 진실일 것 같아 관두었다. 안 그래도 이미 그녀는 정보 포화 상태다.

댕글한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며 자신과 에이든의 안위를 재고 있다.

“그래서, 자네보고 왕께서 하신 말씀인데….”

크라우스. 왕의 이름과 그가 닐스에게 남긴 말을 전해주자 핀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정말, 웃기지도 않네. 남의 마음이나 의사는 신경도 쓰지 않고 제멋대로…! 용 따위 전부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괜한 다른 용까지 같은 취급 말았으면 한다. 뭐, 왕이 죽어 마땅한 놈이란 건 동의하지만.

“단지 왕과 귀족에게 여자를 공급하기 위한 학교라니….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런 곳에 교사로 있는 자신이 한심하지도 않은가? 나라면 당장 혀를 깨물고 정신의 순수성을 되찾았을 텐데.”

순식간에 정체성을 부정당했다. 닐스도 요즘 따라 자주 한 생각이니 새삼스럽지는 않다.

“흐음….”

닐스가 생각한 것과 실제 핀 모리츠의 모습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가스파르의 성에서 듣기로는 가련한 비련의 여주인공이 연상되었는데, 진짜 핀 모리츠는 당찬 독설가였다.

침대 끝에 걸쳐 앉아있을 뿐인데, 허리가 곧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 똑바른 목소리와 태도에서 그녀가 한때 군인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래, 정말 그랬어야 했는지도 모르겠군.”

“뭐…?”

하지만, 딱히 그녀를 곡진히 대할 이유도 없다.

그래봤자 전부 허세다. 그릇에게 남자였던 과거 따위 무슨 의미가 있나, 실상 그녀는 팔려 온 창부나 다름없다.

그녀가 모르는 가스파르의 흉계와 그렇게 애타게 찾던 에이든의 현재까지 생각하면 그저 안쓰럽고안타깝다.

“말했지만 나도 왕의 명령을 거역하진 못하네. 자네의 사정이 제법 딱하기는 해도, 정해진 의무를 저버릴 수는 없지. 내일, 자네는 전학생으로서 내 클래스에 합류하게 될 거야. 엄한 일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내 학생들은 모두 착한 아이뿐이니, 괜한 걱정은 말고.”

“내, 내가 왜 그런 얼토당토않은 수업을…!”

“설령 내가 당장 자네를 놓아준다 한들, 혼자 도망칠 수나 있겠나? 여기가 어딘지는 이미 말했지. 아득한 상공에 몸을 던질 생각이라면 그만두게. 그땐 내 마법으로도 고칠 수 없을 테니.”

용 이외에는 아무도 도달하지 못하는 까마득한 창공. 땅보다 구름이 가까운 용의 둥지는 그 자체가 다른 이종족을 가두는 우리다.

냉정한 현실에 그 당찬 자세도 무너진다. 칼 치는 시선은 그대로 인 것이, 가지런한 눈썹만 파르르 떨려 애처롭기가 짝이 없다.

다시 망가진 몸을 고친 것이 나란 것도 깨달았나, 태도가 조금 누그러진 것도 같다. 그런 마음으로 한 말은 아닌데, 뭐.

닐스도 늙었다. 남의 운명에 휘둘리는 꼴에 괜한 동질감까지 느껴진다. 가스파르와 크라우스에 비하면 닐스도 무력하긴 마찬가지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자의 만용은 허물도 아니다. 되려 귀엽고 측은하다.

“좋게 생각하게. 심하게 다친 흔적이 한두 군데가 아니던데, 목숨이 붙어있는 것만으로 다행이지 않나. 일단 살아야 그 에이든이란 엘프도 볼 수 있을 것이고.”

“너 따위가…. 걔 이름을 함부로 말하지 마….”

에이든이란 말에 핀의 눈이 패기를 되찾는다. 얼씨구? 엘프 암살자 따위가 뭐라고.

올곧은 데다 한 남자만 생각하는 모습이 역시 남자 무인이라기보다는 절벽에 핀 패랭이꽃만 같다.

어휴…. 정말이지….

펑. 닐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두 권의 책이 허공에 나타난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핀은 멀뚱멀뚱 고개를 기울인다.

“아무튼, 내일 수업에 늦지나 말게. 시간이 되면 내 마법으로 기별을 보내지. 치유 마법의 후유증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그렇고, 잠이라도 푹 자놓는 걸 추천한다만…. 이미 한참 자서 졸리지 않으면 이거나 읽고 있게. 용과 인간의 역사에 대한 책이니 앞으로의 삶에 도움이 될 거야.”

“그, 그러니까 내가 왜….”

“우리 학교는 체벌 허용일세. 그 몸과 마음을 강제로 조종하는 것도 어렵지 않아. 좋게좋게 가자고, 좋게좋게. 부디 현명한 선택을 바라지. 그럼 이만.”

“…….”

“……하아….”

쾅. 닐스는 한동안 핀을 바라보다 한숨만을 남기고 방을 떠났다.

“에이든….”

이미 기숙사 밖은 어둡다.

휘영청 달이 창문과 몹시도 가깝다. 별들은 남의 마음도 모르고 제빛을 뽐낸다.

가을 날벌레만이 그녀를 위해 찌르르 쓸쓸한 소리를 낸다.

핀은 텅 빈 마음에 홀로 눈물을 담는다.

“어…. 이쪽이 오늘부로 자네들과 함께 공부하게 된 핀 모리츠네. 알아보니 전에는 인간 근위대의 부대장이었다고 하던데, 어쩌면 이미 이름을 아는 이도 있겠군. 핀, 인사하게. 짧은 기간이지만 함께 배움을 얻을 동료들이니.”

핀은 닐스의 재촉을 받아 쭈뼛쭈뼛 교단에 선다. 입기를 강요받은 제복의 감촉이 낯설다. 다 헤진 짐승 가죽을 입어도 부끄럽지 않았는데, 허벅지와 궁둥이가 다 보이는 이 짧은 치마는 영 적응 되지 않는다.

그 예전에 레온하르트 님이랑 함께 수도에서 도망쳤다는…?

왜? 왜? 걔가 왜 지금 전학생으로?

그게, 크라우스 님이 직접 데리고 오셨데!!!!!

와, 대박.

속닥속닥, 웅성웅성.

닐스는 그리 존중받는 선생이 아닌지, 어린 여성 특유의 새뜻한 목소리가 교실을 금세 가득 채운다.

모두 남자라면 눈이 돌아갈 미녀뿐이다. 맑은 피부, 곱고 하늘하늘한 머리카락, 짙고 긴 속눈썹과 귀여운 애교살.

핀과 같은 상아색 제복은 그녀들의 여성스러운 몸매를 더욱더 강조한다. 달콤한 향유와 분 냄새에 머리까지 어지럽다.

한 일 이년 전의 핀이라면 가슴이 뛰었겠지마는, 지금의 그녀에겐 두렵고 오싹한 광경일 뿐이다.

한창의 여자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아도, 저들 모두 한때 남자였던 이들이다.

개중에는 창칼을 들고 용과 맞서 싸웠던 이도 있을 테고, 부인과 자식이 있었던 이도 있었겠지. 신에게 몸을 바친 신앙인이었을 수도 있고, 일선에서 은퇴한 늙은 기사였을 수도 있다.

그런 이들이 모두…. 이토록 어린 아녀자의 모습으로….

하아…. 부들부들 떨고 있어, 귀여워….

진짜, 진짜 크라우스 님이?

맞다니까! 엊그제 에리가 봤대!

대~박.

아찔하다.

대체 지금 난 뭘 보고 있는 거지?

어쩌면 용의 형상보다 두려운 광경에 핀은 입술만 달싹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핀?”

보다 못한 닐스가 소개를 재촉한다. 예정된 수업이 있다. 언제까지고 그녀를 기다릴 수는 없다.

“아, 알았어.”

마음을 굳힌 핀이 한 발짝 더 앞에 선다. 도망칠 길은 없다. 에이든이 구하러 올 때까지 이들과 함께 그 웃기지도 않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

믿고 있으니까, 에이든….

아, 아. 핀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에이든에게만 보여준 자신의 본모습을 버린다.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 기헨의 신민이다.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을 꾸민다.

그래, 그 레온하르트처럼. 어둠 속에서 남을 이끄는 등대가 되자.

“기헨의 신민이라면 모두 알고 있겠지만…. 왕가의 창끝이자, 신민의 방패. 근위대 부대장 핀 모리츠네.”

오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다. 마치 어릿광대의 쇼라도 보는 양, 진기하고 새롭다는 표정이다.

“모두, 갑작스럽게 바뀐 몸과 용의 횡포에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겠지…. 그러나,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우리는 버텨야만 하네. 자네들도 한때 기헨의 남자였지 않나! 인류를 구원해내신 태조 님의 거룩한 정신을 기억하는가? 마음만 정복당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꼭 이 무도한 용의 지배를 끝낼 수 있을 걸세!”

정적.

무시무시한 정적이 모두를 감싼다.

핀의 머릿속은 새하얗고 커다란 물음표로 가득 찬다. 뭐지?

착. 하니 닐스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때리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푸, 푸훕….

흐, 흐흐흑….

작게 튀어나온 새소리를 시작으로, 푸하하, 꺄하하, 높은 웃음소리가 교실을 가득 메운다.

대~박, 흐흫…. 대~~~박….

아하하하하하!

웃음은 계속해서 전염된다. 곧 핀을 제외한 교실의 모든 학생이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 한바탕 자지러진다.

아.

그렿게 그녀의 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