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의 화원-58화 (58/62)

〈 58화 〉 학교 생활 (2)

* * *

“그만, 그만!”

닐스의 높고 단호한 목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운 웃음소리를 갈랐다.

정신을 못 차리며 웃어젖히던 소녀들도 그의 호통에 소리를 죽이고 자세를 바로잡는다.

후훗. 흐흥.

그렇다고 푸른 새 소리가 다 멎은 건 또 아니다. 저마다 얼굴 한가득 피운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다들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오랜만에 새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와도 같은 반응이다.

“읏…….”

핀은 잠시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짓더니, 입술을 깨물며 몸을 크게 움츠러트렸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고, 여린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다. 딱히 왜소하거나 마른 체형도 아닌데, 오늘은 왠지 그녀가 작고 아련하게만 보인다.

어떠한 방식이든 진심을 비웃음당하면 마상이 깊다. 자신이 먼저 진지하게 다가갔는데, 그런 반응이 돌아오면 그야 수치스럽고 황당하겠지.

딱히 그녀가 부끄럽거나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다. 단지 저 소녀들의 마음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뒤틀린 것일 뿐.

그녀도 이제 알았겠지. 그녀가 말한 고고한 신념과 절개 따위, 이곳에선 질 낮고 한심한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핀, 어서 저 뒤 빈자리로 가 앉게.”

“…….”

그녀는 대꾸도 없이 저벅저벅 학생들의 책상 사이를 건너간다. 그녀의 얼굴과 몸에 어린 소녀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집중된다. 핀은 그런 관심을 애써 무시하며 지정된 자리에 앉는다.

“자자, 집중! 신입생이랑 말도 좀 나누고, 분위기도 풀어주려고 했는데, 너희들 태도 보니까 안 되겠어. 바로 수업 들어간다.”

““에에~?””

닐스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소녀들은 계속 서로 알 수 없는 말을 속삭이거나, 핀에게 추파를 보낸다.

핀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굳은 표정으로 정면만 바라보지만, 상기된 얼굴과 어색하고 딱딱한 동작이 그녀의 심정을 모두 대변하고 있었다.

이 첫 만남이 그녀에게 준 충격은 상당했다.

처음 용에게 붙잡혀 여자가 되었을 때, 그녀는 가스파르가 추가로 건 마법에 의해 깊고 깊은 잠에 빠졌다.

리오나가 가스파르 성에서 메이드로 일하며 그가 주는 온갖 쾌락과 행복에 타락할 때에도, 그녀의 의식은 부대 창고에 갇혀 텅 빈 허공을 유영했다.

그러다 처음 눈을 뜬 곳이 그 지하 감옥이요, 처음 본 타인이 바로 그 에이든이었다.

그는 어딘가 엉뚱하기는 해도, 성정이 바르고 상냥한 엘프였다. 그는 몸과 마음을 다친 그녀를 항상 헌신적으로 돌보고 보듬어주었다.

당시 핀을 둘러싼 상황은 결코 희망적인 것이 아니었으나, 그와 함께한 한 달간의 생활은 그녀의 인생 중 그 어느 때보다 따사롭고 여유로운 행복의 시간이었다.

레온하르트가 준 믿음과 우정보다도 그의 너른 등과 두꺼운 팔이 더 그리웠다. 그가 준 체온은 아직도 핀에 가슴 깊은 곳에 남아있다.

그래서 잠시 잊고 있었다. 용이라는 게 얼마나 사악하고 무도한 녀석들인지, 영락한 우리 인간들의 삶이란 어떠한 것인지.

수도에서 본 인간 목장도 가히 충격적이었지만, 그땐 오히려 너무 비현실적이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실 그녀들이 같은 인간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쫓아오는 용과 에이든의 재촉에 제대로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소녀들은 크게 자유를 제한받거나 존엄을 침해당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눈빛에는 생기가 가득하다. 여성의 말투, 여성의 몸짓, 능숙하고 자연스러운 화장까지…. 사소한 행동 하나에서도 여자로서의 자신감과 당돌함이 묻어나온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구두를 신었는데, 핀과는 여자의 몸을 다루는 방식부터가 다르다. 아주 잠깐만 봐도 차이가 확연하다. 그녀들에게 자신의 여체와 그 여체가 주는 기쁨은 이미 당연한 것이었다.

남자였던 과거 따위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녀들은 자신이 가진 여자로서의 매력과 그 매력이 가져올 미래의 행복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들은 주인이 될 용들에게 인정받은 여자니까. 외모와 성품부터 남들보다 뛰어난 고급품이니까.

이미 완성된 그녀들은 용의 왕과 귀족들의 선택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러나 그릇이 된 인간을 사실상 처음 본 핀으로서는 무엇하나 당연하게 없었다. 핀이 자리에 앉자, 그녀에게 추파를 보내던 소녀들도 하나둘 닐스에게 관심을 돌린다.

놀랍도록 호의적이고 유순한 시선이다. 이제는 닐스의 일거수일투족에 그녀들의 시선이 쏠린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 기쁜 듯, 단 한숨을 흘리는 이도 있다.

다들 제멋대로 구는 것 같으면서도, 그 기저에는 지배자 용에 대한 절대적인 숭배와 복종이 깔려 있다. 어설프게나마 남을 통제해 본 핀은 바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들 모두 용의, 용에 의한, 용을 위한 노리개에 지나지 않는다.

왕국을 짓밟고, 평온했던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은 침략자 용에게 대체 왜? 핀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하아…. 저번에 어디까지 했었지.”

“소극적인 주인님을 사랑의 노예로 만들 위험한 세뇌 마법이요!!!”

“내가 그걸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은 없는 거 같은데…. 뭐, 좋아.”

두렵다.

자신 또한 언제라도 그녀들처럼 될 수 있으니.

이곳은 외눈박이의 세상이다. 두 눈을 멀쩡히 가진 사람이 비정상이 되는 그런 세상이란 말이다.

의지를 잊고 타성에 젖는다면 자신을 잃는 건 순식간이다.

“마법의 기본 원리에 대해선 이미 다들 알고 있겠지. 마력을 사용해 사물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곧 마법이며…. ”

핀은 수업 내용 따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흐트러진 마음을 다시 바로잡는 데 집중했다.

두 눈을 감은 채, 마음을 비운다.

“…그리고 생명의 사고나 감정 따위도 그렇게 변화시킬 수 있는 사물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아서….”

어둠 속에서 떠올리는 건 단 한 사람.

에이든.

에이든…. 에이든, 에이든!

그래, 난 괜찮아. 그가 있으니까.

그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그의 얼굴과 이름만을 떠올린다. 나아가 그의 존재로 자신의 마음이 무너지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합리와 이성과는 거리가 먼 맹신이다. 이 교실의 소녀들이라고 과거 다른 소중한 사람이 없었을까?

그녀는 그녀 자신 또한 여체에 정신을 잠식당하고 있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왜 반평생을 함께한 친우 레온하르트보다 한 달 남짓 만난 에이든의 얼굴이 먼저 떠오르는가.

왜 진짜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자신을 따스하게 맞아준 하츠펠트 가의 온기보다, 에이든이 쥐여준 채소 국물의 온기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가.

그들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핀을 구해주었는데?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신뢰와 진심을 그에게 보내 주었는데?

혹여….

레온하르트와는 동성으로 만났고, 에이든과는 이성으로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도 모르는 새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미 그녀를 바꿔놓은 것이 아닐까?

“…이제 실전으로 들어가지. 다들 잠시 이 손끝을 바라봐 주게. 핀, 자네도 이제 좀 수업에 집중하고.”

닐스의 주의에 핀도 어쩔 수 없이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본다.

그의 손끝에서 분홍색 광채가 하늘거린다. 뭐지? 저건….

핀은 알지 못한다.

사랑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어두운 감정인지.

또 얼마나 쉽게 만들어지고 사그라드는 감정인지.

일순, 교실의 공기가 멈춘다.

닐스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이 더 음란하고 노골적인 것으로 바뀐다.

하아, 하아. 숨이 가빠지는 이도 있다. 자세가 무너져서 책상과 의자를 붙잡고 간신히 몸을 지탱하는 이도 있다.

잠시 분홍빛 광채를 바라봤을 뿐인데, 모두 닐스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작은 호의 따위가 아닌, 질척하고 무거운 육욕이 담긴 갈망. 그가 부린 마법은 그런 것이었다.

물론 핀도 예외가 아니었다.

“흐읏…!”

저 녀석, 원래 저렇게 잘생겼었나?

선이 굵은 얼굴과 다부진 풍채. 로브 틈새로 보이는 목의 잔 근육.

자신의 몸과 마음이 서서히 바뀌는 것을 느낀다. 도저히 그에게서 눈을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그의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보여서….

두근두근.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정이 솟구친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린다. 그 고동이 그녀를 안에서부터 부수어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시전자의 의지가 담긴 강력하고 순수한 마력은 시신경을 통해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지. 이건 세뇌는 아니야. 잠시 마음을 동하게 할 뿐. 그리 어려운 마법도 아니지. 중요한 건 욕망. 타인을 지배하고, 갈취하는 이미지를 그릴 수 있는가.”

“하, 하앙!”

목소리가 귀에 닿았을 뿐인데, 신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 번 불이 붙은 마음은 멈출 줄을 모른다. 그와 관련된 것이라면 전부 아름답고 거룩하게만 느껴진다.

도화색 광채는 핀의 손끝에서 여전히 빛나며 모두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그 음탕한 색채가 망막을 꿰뚫고 뇌리에 꽂힌다.

그에게 기대고 싶다. 그가 날 껴안아 주었으면 한다. 서로를 껴안고, 입술을 탐하고, 나아가 몸과 몸을 겹쳐….

이성과 도덕이라는 제어장치는 이미 그녀에겐 없었다. 이젠 누구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고, 오직 닐스의 모습만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다.

기억과 주위 환경이 표백되고, 세상엔 그와 그녀만이 남는다.

찔걱찔걱. 천박한 물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진다.

참지 못한 몇몇 학생들이 닐스의 얼굴을 반찬으로 자위를 시작했다. 교실 전체가 마치 세상에서 똑떨어져 나온 것 같은 이질적인 분위기에 둘러싸인다.

하앙, 앙….

서, 선생님…. 힉!

하아, 하아….

뜨겁다. 얼굴과 가슴에 열이 오른다.

확인만 안 했지, 그녀의 치마 속도 분명….

“읏….”

똑같이 제 가랑이에 나아가던 그녀의 손이 멈춘다.

아, 안돼. 그런 천박한 짓만은….

무엇보다 그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 그와 아직 마음도 통하지 못했는데, 이런….

“……?”

그…?

그가 누군데…?

나는 뭔가 중요한 걸….

“자, 그만.”

힉!

닐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또다시 교실의 공기가 멈추었다 풀려난다. 방향은 아까와 정반대였다.

뭐, 뭐뭐뭐.

꺄아악!!! 선생님 뭐 하신 거예요!!!!!

하아…. 대박…. 이거, 쩔어….

약간의 한탄과 신음을 끝으로, 교실을 지배했던 뒤틀린 감정과 분위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교실은 순식간에 제 모습을 되찾는다.

“자자, 이제 다 정신 차려.”

“하아…. 하….”

뭐였냐고, 대체.

핀도 머리를 부여잡고 깨질듯한 통증을 견딘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폭력적인 감각이다.

몸과 마음을 강제로 조종한다는 게 이런 것이었나? 어쩌면 이 학생들의 마음도 이미 예전에 이렇게?

아니, 소녀들은 오히려 색다르고 신선하다는 반응이다. 이런 식의 강압적인 마법은 쓰지 않은 걸까. 다들 자기도 모르는 새에 천천히 몸과 마음을 지배당한 거란 말야?

금지된 마법의 편린을 본 핀이 오소소 몸을 떤다. 앞으로 무슨 치욕을 더 당할지 상상만 해도 두렵다.

그리고 또, 뭔가 중요한 걸 잊은 듯한….

“이게 바로 남의 마음을 헤집는 마법이고, 방금 너희가 느낀 감정이 그 결과다. 뭐, 너희야 보통 당하는 쪽이겠지만…. 세상엔 이상한 용도 많거든. 일부러 종에게 그 마법을 사용하게 해 색다른 쾌락을 즐기는 놈들도 있으니까, 배워서 나쁠 건 없지.”

어…? 끝난 게 아닌가?

“내가 호명하는 대로 한 명씩 나온다. 내 지시를 따라 정신을 집중해, 같은 마법을 시전해 보도록. 대상도 똑같이. 그럼, 첫번째로….리네아!”

그건 수없이 깨었다 빠져드는, 길고 긴 악몽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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