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의 화원-59화 (59/62)

〈 59화 〉 학교 생활 (3)

* * *

결국, 뭐였던 걸까.

수업을 빙자한 정신 능욕은 오전 시간을 모두 낭비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핀도 몇 번이고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그래도 일선만은 넘지 않았다…. 고 그녀 자신은 생각한다.

에이든. 정신이 맑아지자 그의 이름과 얼굴이 또렷이 기억난다. 그래, 괜찮아. 그가 있다면 자신은 언제까지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 그라면 어떠한 고난이나 역경이라도 이겨내어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다.

그를 남겨두고 먼저 무너져서는 안 된다. 이 슬픔과 고통 모두, 그의 앞에서 왜 이제야 왔느냐며 웃어넘길 때가 분명 올 테니까.

하지만….

“푸핫…. 하아….”

“으, 으응….”

하지만 악몽은 수업이 끝나도 끝나지 않았다. 오전 수업이 종료되고 점심을 먹기 전까지의 짧은 휴식 시간. 닐스가 물러나도, 교실은 여전히 비정상적인 정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고, 혀와 혀가 섞이는 음란한 물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린다. 수업의 후유증일까, 학생들은 동성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입을 맞대고 서로의 가슴과 성기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예부터 금기시되는 동성 관계는커녕, 아직 이성 관계에도 눈을 뜨지 못한 핀에게는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자극적인 광경이었다. 애써 눈을 다른 곳에 돌려도, 같은 학생에게 매달린 학생들의 단 한숨과 젖은 신음이 귀를 타고 오르는 것은 막아지지 않았다.

첫날부터 머리가 아프다. 당장 멈추라며 소리라도 꽥 지르고 싶을 정도다.

다른 학생들도 크게 음란한 행위를 하지 않을 뿐,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아, 땀 때문에 벌써 번졌어!"

누구는 생전 처음 보는 소도구와 작은 거울을 꺼내 저 얼굴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칠하고 덧댄다. 핀이 보기에는 이미 한치의 터럭도 없이 아름다운 얼굴인데, 정작 그 소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불만인 듯 토라진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그때 윌리암 선생님이랑…."

"꺄아~! 그 선생님 완전 숙맥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그래서!?"

용과의 성교를 무용담처럼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학생도 있다. 남자로서도, 숙녀로서도 크게 빗나간 행동에 말문이 절로 막힌다. 부끄러움이란 감정이 없는 걸까? 쓸데없이 끈적하고 자세한 묘사에 괜스레 핀의 얼굴까지 붉어진다.

인간은 지금 어디까지 온 걸까. 밖에서 본 가축들까지 생각하면, 인류의 미래는 절망적이기 그지없다.

레온하르트와 용에게서 도망치던 지난 일 년이 차라리 나았다. 그래도 그때는 믿음이 있었다. 자신들 말고도 도망치는 이들이 있겠지, 끌려간 이들도 저마다의 고통과 싸우며 용들에게 저항하고 있겠지…. 하는 믿음.

현실은 처참하고도 어이없는 것. 이 학생들이 왜 그렇게 자신의 말에 웃음을 참지 못했는지 이제는 알겠다. 얼마나 멍청하고 한심해 보였을까.

핀이 손을 제 얼굴을 감싼다. 그런 그녀의 주변으로 하나둘 학생이 모인다. 이 재미있는 장난감을 가만둘 그녀들이 아니었다. 한 소녀가 푹 숙인 핀의 얼굴과 그림자가 든 책상 사이로 고개를 집어넣는다.

“안녕? 분명 핀 모리츠라고 했지? 난 카리나라고 해.”

싫어도 그 맑고 투명한 눈과 마주치고 만다. 고운 흑발과 깊은 적안. 짙고 강렬한 색을 가진 소녀였으나, 동글동글한 눈망울과 뺨이 어리고 귀여운 느낌을 준다.

상반된 매력을 가진, 무척이나 아름다운 소녀였다. 이대로 무시하기도 어렵다. 핀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 자네가 생각하는 그 핀 모리츠…. 맞네.”

핀의 눈이 카리나와 닿았다가 떨어지고, 말이 이어지다가 끊어진다.

그녀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녀들의 전락에 핀도 작게나마 책임이 있었다.

핀은 군인이었다. 그것도 다른 군인들을 이끄는.

이 학생들의 정확한 과거와 이력은 몰라도, 그녀가 지켰어야 할 기헨의 신민이라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을 터. 이 터무니없는 상황을 곱씹을수록 검고 어두운 감정만이 그녀의 목구멍에 걸렸다.

영문을 모르는 카리나가 작게 고개를 기울인다. 참지 못한 들러리들이 질문을 쏟아 낸다.

지, 진짜 크라우스 님이랑 만난 거야?

얼굴은 봤어? 어떤 분이셔?

레온하르트 님은 어떻게 되셨어? 그분도 여자가 되신 거 맞아?

지금 닐스 선생님 방에서 지내고 있는 거 맞지?

크라우스 님이랑 정확히 무슨 관계야?

사방에서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핀이 크게 몸을 움츠러트린다. 안 그래도 초라한 어깨가 떨리기까지 한다. 그녀 평생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우선 무슨 질문부터 대답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정작 궁금한 게 산더미인 건 핀 자신인데.

응? 응?

응? 응?

“잠깐, 잠깐만…. 자네들, 일단 진정 좀 하게.”

딩동댕동. 동동동띵.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려도 핀을 둘러싼 인의 장막은 꺼지지 않았다.

“흐응….”

그 소동에서 한 발짝 물러난 카리나는 잠시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조용히 분홍색 보자기에 싸인 자신의 도시락통을 들었다.

“에잇!”

그러고는 순식간에 인의 장막을 뚫고, 남은 손으로 핀의 팔을 낚아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핀은 당황해 몸을 굳히고, 나머지는 놀라 뒤로 물러선다.

두둥실. 붉은 마력이 핀과 카리나를 감싸 안는다. 카리나는 핀의 손을 잡고 교실 밖으로 냅다 달린다. 핀은 둘을 감싼 마나 때문에 털끝 하나 저항할 수 없다.

어, 어!?

카, 카리나?!

사태를 뒤늦게 파악한 소녀들이 달뜬 소리를 낸다. 핀을 품에 안은 카리나의 말이 황당하다.

“야! 오늘은 얘 내꺼다! 너희 따라오지 마!”

“후우…. 일단 이 정도면 됐나.”

핀 모리츠의 첫 수업이 끝났다. 다른 학생들이 좀 장난을 치긴 했어도, 이만하면 무난한 편이다.

닐스가 이 학교의 마법 교사라는 점, 그녀가 그의 담당 학생이라는 점은 그에게 있어 꽤 편리한 상황 설정이었다. 마법은 언제나 실행과 반복, 그는 수업을 지도하며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마법을 선보여왔다.

그 마법과 마법 사이에 실제 교육 목적이 아닌, 다른 수작을 섞어 넣어도 알아차리는 이 하나 없다. 닐스는 이 편리한 자리를 이용해 여러 학생의 마음을 수중에 넣어 왔다.

왕이나 귀족에게 갈 고급 소재들을 미리 맛볼 수 있다니…. 크라우스의 어리광이 짜증 나긴 해도, 역시 실보다는 득이 많은 자리다.

하지만 오늘 그가 핀에게 건 마법은 조금 달랐다. 사심(?心)은 사심이 되, 사심(?心)은 아니었다.

‘그렇다기엔 오늘 수업 내용 자체가 좀 그랬나? 뭐, 그건 미리 정해진 거니까….”

그는 핀이 과거를, 에이든을 잊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그녀가 슬픔을 잊고 잠시나마 행복을 누리기를 바랐다.

이제 곧 그녀를 찾아올 에이든은 그녀가 아는 에이든이 아닐 터였다. 한때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던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 엘프는 전과 같은 얼굴로 핀을 속여 가스파르의 사법을 핀에 몸에 심으려 하겠지.

설령 닐스가 그의 접근을 막는다고 해도, 그의 존재가 그녀의 마음속에 깊이 존재하는 한, 그녀는 행복해질 수 없다. 그건 다른 학생들처럼 대충 뭉개고 넘어갈 수 없는 과거다.

이제야 조금, 왕과 가스파르 두 거물이 그녀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닐스는 학생들이 펼치는 서툰 마법의 그림자에서, 핀의 마음을 헤집고 기억을 흔들었다. 한두 번 한 일도 아니다. 다른 학생들처럼 그녀의 기억도 곧 닐스의 의중대로 조작될 터였다.

‘한데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달랐다. 고결하며 고귀했다. 유달리 영혼이 맑고 청결하다는 이 학교의 학생 중에서도 특히.

뜨겁고 옅은 숨만 계속 내뱉을 뿐, 몸가짐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사랑하는 그이를 잊지도 않았다. 인간과 용의 마력 허용치를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그렇기에 더 갸륵하고 슬프다. 왜 저런 꽃다운 정신이 무도한 두 용에 의해 짓밟혀야만 한단 말인가.

‘아냐, 아냐….”

닐스는 그녀의 정신력도 놀라웠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더욱더 놀라웠다. 그녀를 본지 겨우 얼마나 된다고. 정말 노망이라도 난 걸까. 저항할 수 없는 운명에 휘둘리는 모습에 동질감이라도 느낀 것인가.

그녀도 자신도, 모든 걸 잊고 이 학교에서 행복을 찾으면 좋을 텐데….

닐스는 예전의 가스파르처럼, 자신이 가진 모순을 깨닫지 못한다. 그건 이 시대 용의 흔한 자위행위였다. 제멋대로 누군가의 마음을 헤집어 행복을 전해준다니, 오만하며 어리석기 그지없다. 그 모든 걸 그녀와 자신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는 점에서 더욱더.

닐스는 그렇게 가스파르의 흉계를 막고, 크라우스에게 그의 계획을 전할 계획이었다.

곧 크라우스가 학교에 온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이 학교의 이사장이자, 용의 왕이다.

해야 할 보고와 충언이 있다. 설혹 왕의 마음에 가닿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아무리 그가 망나니에 후안무치한 폭군이어도, 그 몸에 선왕의 피가 흐르는 한, 닐스는 가신의 의무를 저버릴 수 없다.

그리고 그편이 핀에게도 나을 것 같았다. 사랑하는 이에게 직접 배신당하는 것보다 그를 잊고 망각 속에서나마 기쁨을 찾는 게 낫겠지.

그의 손이 자신의 방 손잡이에 닿는다. 왕에게 전할 말과 정보를 추려야 한다.

스르르. 낡은 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고, 열린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바람에 방안을 가득 채운 문서들이 허공을 난다.

내가 창문을 열고 나왔었나? 그럴 리 없다. 오늘은 바람이 거센 날인데….

닐스의 의문은 곧 풀렸다. 크라우스보다 앞선 손님이 있었다.

“닐스.”

“가스파르…….”

사실, 닐스도 예상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을 했더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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