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의 화원-60화 (60/62)

〈 60화 〉 학교 생활 (4)

* * *

“흡…!”

끼이익.

카리나의 기합에, 얇은 철문이 불쾌한 소리를 내며 열린다. 그녀는 이미 익숙한 듯 학교 옥상에 발을 디딘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뒤를 따르자, 탁 트인 하늘이 한눈에 들어온다.

넓지만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다. 보이는 건 유난히 가까운 하늘과 저 멀리 지나가는 구름뿐.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울적한 마음을 씻어준다.

“난 꿍한 일이 있으면 항상 여기로 와. 여기 있으면 전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거든. 생전 처음 보는 구름의 옆 모습.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땅…. 예전에는 생각도 못 했을 세계와 자신의 모습…. 이런 곳에 혼자 걱정거리를 쌓아봤자 나만 바보 같잖아?”

“…….”

확실히. 건물 옥상에 오르는 건 비열한 살수들이나 하는 짓인 줄로만 알았는데, 푸른 하늘이 한 아름 달려오는 건 그리 나쁜 기분만은 아니었다.

“그러니 너도 풀어. 오늘이 처음이라 도시락도 못 챙겼지? 같이 먹자.”

카리나는 그러면서 들고 온 도시락통을 흔든다. 분홍색 보자기에 그려진 작은 꽃무늬가 귀엽다. 그러고 보니 눈을 뜬 뒤로 아무것도 못 먹었다. 꼬르륵. 의식하니 갑자기 배가 고파온다.

"고, 고맙네."

카리나를 피해 돌아가봤자, 어차피 또 그 학생들에게 시달릴 게 뻔하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당장은 이 호의를 받아들이자.

도시락 속은 풍부하고 훌륭했다. 신선한 채소와 햄이 잔뜩 들어간 샌드위치와 딱 알맞게 구워진 연어. 아담하게 담긴 밀면과 처음 보는 품종의 알록달록한 과일들까지.

기헨에 살며 먹던 것들보다도 훨씬 호화로운 음식뿐이다. 당시 그래도 귀족 끄나풀은 됐는데도 말이다. 일단 그 색채부터가 압도적이다. 항상 먹던 검고 칙칙한 귀리 빵은 이젠 생각도 나지 않는다.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자 뇌물이었다. 이 녀석 사실 좋은 녀석 아니야?

“자, 아앙~.”

“…그렇지 않아도 혼자 먹을 수 있네.”

“에이, 재미없게.”

과일 조각을 달고 입 주변에 다가온 그녀의 포크를 살며시 치워낸다. 호의는 고맙지만, 대체 왜 이렇게 들러붙는지 모르겠다. 원래 이 학교 학생들은 다 그런가? 자신은 그녀에게 달리 줄 수 있는 것도 없는데 말이다.

나는 그대로 혼자 카리나의 도시락을 음미했다.

“흐흥~? 어때?”

“마, 맛있어….”

극상의 맛이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또 없다.

모양뿐만 아니라 맛도 완벽하다.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다. 싱그러워야 할 것은 아삭아삭하고, 두터워야 할 것은 그윽하다. 눈, 귀, 입 모두가 즐거운 아름다운 한상차림이었다.

안 그래도 배가 고팠던 나는 허겁지겁 도시락통을 비워 나갔다. 원래 키리나가 먹을 식사인데, 염치도 체통도 없는 행동이었다.

“참 복스럽게도 먹네~.”

다행히 키리나는 나의 그런 만행을 제지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누구라도 같은 상황이라면 나와 같이 행동했을 거다. 얕은 변명으로 자신을 정당화해 본다.

"푸후…. 하아.”

위에 음식이 들어서자 마음에도 조금이나마 안정이 찾아온다. 지금은 모든 게 낯설고 두려워도….그래도 이게 삶이지. 이게 인생이지. 나는 혀끝으로 다시금 내가 살아 있음을 느꼈다.

꽤 많이 먹은 것 같아도 아직 한참 남아있다. 처음부터 혼자 먹기엔 많은 도시락이다.

"흠, 흠. 정말 들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 자네?

마지막 양심을 짜내 그렇게 권해본다. 이게 원래 카리나의 도시락이란 걸 생각하면 우리 둘 꼴이 꽤 우습다.

"아냐. 나 사실 살 빼는 중이거든. 정말 괜찮아."

아니, 양이 이런데 다이어트? 게다가 그 몸에 뺄 데가 어디 있다고…. 역시 여자는 미스터리한 생물이다. 예전엔 귀족 영애들의 기벽에 고생도 참 많이 했었지.

"흐흥~. 첫 소개 이후로 계속 표정이 어두워서 걱정했는데, 조금이나마 풀린 것 같아서 좋네. 핀이라고 불러도 되지?…응! 핀, 계속 그렇게 웃어 줘. 그렇게 웃으니까 얼마나 예쁘고 귀여워. 그렇게 예쁜데 구겨지면 얼마나 손해야. 아! 앞으로 얼굴 찌푸리기 금지! 금지!"

"됐네. 사내에게 그런 게 무슨 칭찬이라고….

바라지 않은 칭찬이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카리나의 곱고 가지런한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걸린다. 그 티 없는 순수함에 보고 있는 나도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강렬한 첫인상에 그녀들을 나쁘게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생각을 고쳐야겠다. 남을 쉽게 예단하는 건 좋은 버릇이 아니니까.

다른 학생들도 처음엔 날 비웃었지만, 어떠한 악의가 있어서 한 행동은 아닐 것이다. 그 후 쏟아진 질문들도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 것들이 많았다. 오히려 내가 그들에게 벽을 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절대 도시락이라는 단 뇌물에 굴복한 게 아니다. 절대 아니지. 이 근위부대장님을 뭘로 보고. 군인이 제일 신조로 세워야 할 것은 바로 대쪽 같은 규율과 규칙. 레온하르트의 밑에서, 나는 단 한 번도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린 적이 없다. 지금의 이 결론도 내가 스스로 생각해서 얻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맞아, 그렇지.

"하아…. 정말 달고 맛있네. 어떻게 이런 맛이….”

"헤헤."

아, 절대 아니라고…!

“으! 읍읍!”

“어? 물 줘?”

바쁘게 입에 음식을 갖다 대다 보니, 아주 당연한 사달이 났다. 갑자기 목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어 가슴을 쳤다. 키리나는 바로 도시락통 옆에 있던 물병을 건네주었다.

“고, 고맙네.”

나는 허둥대며 그 물병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 물병에는 달고 쓴 냄새가 나는 분홍색 액체가….

“으!!! 으읍!!!!!”

나는 가까스로 그 물병을 쳐내었다. 손을 떠난 물병이 옥상 바닥을 구른다. 흰 바탕에 진한 분홍 얼룩이 퍼져나간다.

“어…. 핀? 왜 그래?”

쾅쾅. 막힌 음식물을 어찌저찌 위로 집어넣는다. 휴우, 하마터면 마실 뻔했다.

“아, 아닐세. 갑자기 크게 숨이 막혀 놀라서….”

인간의 생명력을 원료로 하는 그 역겨운 액체를.

잊을 수도 없는 그 인간 목장. 가축의 척수와 젖에 물린 수없이 많은 관.

병에선 분명 그 냄새가 났다.

마음이 차게 식는 게 느껴진다. 생각을 다시 세운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녀는 조금도 나쁘지 않다. 그녀는 나쁘지 않지만.

"으, 으응….”

세상은 여전히 나에게 짓궂기만 했다.

왕립 아카데미의 점심시간은 길었다. 식사는 진즉에 끝났거늘, 카리나의 말로는 수업까지 아직 한참 남았다고 한다. 나 혼자 너무 허겁지겁 먹었나?

“그…. 이 음식 모두 자네가 만든 건가?”

내가 그 물병을 쳐낸 일로, 나와 그녀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아직 받기만 했는데 이대로는 좋지 않다. 괜스레 말을 붙여본다.

“그럼. 요리도 용에게 봉사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인걸.”

결국, 또 용인가. 카리나나 다른 학생들의 행동 원리는 모두 용에게 맞춰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방금 반응을 생각한다면, 자신이 마시는 그 액체가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르겠지. 설령 여기서 진실을 말한다 해도 믿어주지도 않을 테고.

“카리나 자네는 이전까지 어떤 삶을 살았나?”

그렇기에 더 궁금했다. 그녀가 누구고 원래 무슨 삶을 살았는지

“자기가 받은 질문은 아무것도 대답 안 했으면서 먼저 그러기야?”

“나는 자랑스러운 통일 왕국 기헨의 근위부대장 핀 모리츠네.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한 소개가 되지 않나? 자네도 기헨의 신민일 테니.”

“와. 그거 되게 거만한 말이다….”

대장인 레온하르트 님도 아니고.

카리나가 작게 무어라 속삭였지만 애써 무시한다.

“응. 그것도 그렇네. 나만 핀의 과거를 알고 있으면 불공평하겠지. 예전의 난 카리나가 아니라 카린이었어. 원래부터 여자 같은 이름이지? 혹시 몰라, 원래 부모님은 여자아이를 원하셨을지도.”

원래 부모님…? 마치 부모가 없거나 여럿이라도 된다는 듯한 말투다. 그래, 마치 자신처럼.

“그거 알아? 이곳에 귀족이 온 건 핀 네가 처음이야. 이곳에 있는 건 부모에게 버려진 고아거나, 수년간 왕국 밖 우범지대를 전전한 뜨내기이거나, 이제는 주인도 없는 노예들뿐.”

“자네 설마….”

“나는 거의 태어나자마자 수도원에 버려졌어. 부모님 얼굴도 몰라. 그리고 기헨이 용에게 멸망할 때까지 거기에 살았지. 세상이 뒤집어지고, 내 성별도 뒤집어졌지만…. 사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 원래 세상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걸.”

“…….”

정확히 같지는 않아도, 꽤 비슷한 과거에 마음이 흔들린다. 나는 원래 귀족 나부랭이가 아니다. 그렇게 몰락한 귀족은 귀족이라고도 부를 수 없으니까. 이미 그 몰락한 귀족에게 버려지기까지 한 몸이니까.

대외에는 하츠펠트 가의 먼 친척으로 알려졌지만, 진짜 나는 그녀처럼….

“네가 본 다른 학생들도 다 그래. 다들 마음에 큰 상처를 가지고 있던 아이들이야. 아! 그렇다고 너무 나쁘게 보지는 말아 줘. 그래 보여도 다들 착해. 그렇게 힘들었어도 남에게 피해 한 번 안 주려 한 소심하고 상냥한 애들뿐인걸.”

…그녀들이 왜 고급 소재인지, 왜 용이 그녀들보고 영혼이 맑고 순수하다고 하는지 이제야 알겠다.

상층민이라고 모두 영악하지만은 않고, 하층민이라고 모두 선한 것만도 아니다. 당연하다. 그 레온하르트만 봐도 엘리트 중의 엘리트요, 귀족 중의 귀족이다. 크건 작건 범죄자의 대부분은 하층민 출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여 타고난 환경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날 때부터 간악한 성질을 가진 이라 하더라도, 좋은 것만을 보고, 좋은 것만을 듣고, 좋은 것만을 먹고 자라면 얼마든지 그 타고난 성정을 가릴 수 있다.

하지만 좆같은 꼴만 보고, 좆같은 소리만 듣고, 좆같은 구정물만 먹고 자란다면? 구도의 성자라면 그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겠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새에 똑같이 좆같은 인간이 되고 만다.

그건 벽촌 수도원에서 모험가의 은화나 훔치다가 일대 귀족의 후원을 받게 된 내가 몸소 느낀 인생의 진리였다. 예외는 거의 없다.

카리나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들이 그 몇 안 되는 예외라 할 수 있겠지. 기헨은 올곧고 찬란한 왕국이었으나, 그 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도 분명 있었다. 그런 좆같은 곳에서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살았다면 확실히 영혼이 곱고 순수하다고 할만하다.

“그래서, 어떤가. 지금 생활은.”

용도 오랜 세월 이종족을 지배하면서 나와 같은 진리에 도달한 것이리라. 그들도 한 생명의 본성을 정확히 잴 수 없어서, 좀 더 나은 확률에 기댄 것일 테지. 이를테면 같은 인간도 찾지 못한 진흙 속의 진주들이다.

“마지막까지 저항한 네가 듣기엔 아픈 말이겠지만…. 사실 너무나도 행복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정말.”

“…그런가.”

이미 예상한 말인데도 가슴이 저민다. 하늘에 사는 그녀들은 용의 실체를 모른다.

“원래 그 도시락도 닐스 선생님이랑 같이 먹으려고 준비한 거야. 아쉽게도 오늘은 날이 아니었네….”

갑자기 횅하니 돌풍이 불었다. 내 삐뚠 앞머리와 카리나의 가지런한 옆머리가 바람에 같이 하늘거린다.

“핀. 오해하지 말고 들어 줘. 여기 있는 아이들은 다 나와 같은 마음일 거야. 사실이 그런걸. 여기선 당장 내일의 잠자리와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오늘 밤 강도나 살인자를 만날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주인의 작은 변덕 때문에 지금껏 이룬 모든 걸 잃는 수모를 겪을 일도 없고.”

어디가 오해 안 할 부분인지 모르겠다. 지금 그녀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다. 용이 진실한 마음으로 그런 환경을 마련해 준 것이 아닐 뿐.

오늘 처음 보는 나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걸 보니, 최소한 카리나가 선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건 확실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용들은 우릴 인정해 주었어. 우리가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소중하다고. 존재만으로도 존중받고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태어나서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어. 다른 아이들도 그럴 거야. 남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나는 그때 처음 느꼈어.”

그만, 그만. 그 미친 수업 때보다도 머리가 아프다. 오해라면 카리나가 하고 있다. 적응 못 하는 신입생에 신경 써주는 건 고맙지만, 지금 그녀의 말은 나에게 고문관의 힐난이나 다름없다.

“교육이란 걸 여기서 처음 받은 아이들도 많아. 아…. 오늘 수업은 좀 그랬지? 원래라면 진짜 제대로 된 마법이나, 역사 같은 것도 잔뜩 배울 수 있어. 요리나 뜨개질, 숙녀로서 지켜야 할 예의범절까지도 말야. 놀랍지. 우린 배운다는 게 그렇게 가슴 뛰는 일인지도 몰랐어. 예전엔 아무도, 정말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거든.”

용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영악하고 치밀했으며.

“성별이 바뀐 것쯤, 그리 대수도 아니야. 원래 몸을 아끼지도 않았으니까. 그래, 지금 이 행복에 비하면….아, 하앙…. 오히려 더 많이 여자가 되면 더 잔뜩 행복하게 해주시는 걸…. 자신보다 훨씬 훌륭하고 거대한 존재에게 동등하게 존중받고 사랑받는 그 기분…. 다른 그 어떤 보물에도 비하지 못할 거야. 핀, 너무 걱정하지 마. 너도 곧….”

혹여 기적이 일어나 용의 치세가 끝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해결할 문제는 산더미처럼 남아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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