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의 화원-61화 (61/62)

〈 61화 〉 학교 생활 (5)

* * *

팔랑팔랑. 방안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자료들에 나는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정오. 높은 태양과 열린 창문을 등지고 선 가스파르가 제 굵은 회색 머리를 긁으며 나를 내려다본다.

“어떻게 여기를….”

얼빠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정면으로 그를 보는 게 얼마 만인가.

“뭐, 굳이 대답이 필요한가, 닐스?”

자신이 내뱉었지만 정말 무가치한 질문이었다. 그 가스파르다. 나도 그의 성에 갈 수 있는데, 그가 내 방에 오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내 인식 저해 마법은 완벽했을 텐데?”

그래도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 마치 제 방인 양 태연자약한 가스파르와 다르게, 나는 의미 없는 질문을 반복했다.

톡톡. 가스파르가 자신의 옷소매를 손가락으로 친다. 나도 무심코 자신의 소매를 바라보았다.

로브의 소매에는 여러 마법 시험의 흔적이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땅에 끌리는 로브의 밑단도 같았다.

“뭐, 자네의 마법이야 언제나 훌륭하지만…. 그래도 조심했어야지. 이종족 학생들만 보다 보니 우리 용의 후각을 잊어버린 건가? 자기 체취는 자기가 못 맡는다고, 세상에 그렇게 마나 찌꺼기 냄새에 쩐 참새가 어디 있나?”

“…….”

지운 기척에는 물론 체취도 포함되어 있다. 다만 가스파르의 신경이 나의 마법보다 나았을 뿐이겠지.

킁킁…. 진짜 그렇게 냄새가 나나? 학생들에게 물어봐야 할까.

“자네야 말로 괜찮나. 반군의 우두머리가 이렇게 쉽게 그 몸을 드러내다니.”

“자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우린 아직 뜻을 같이하지도 않았네.”

가스파르는 그렇게 뇌까리며 나풀나풀 바람에 나부끼는 문서 하나를 ‘척’ 하고 낚아챘다.

가스파르가 세운 계획에 관한 내용이다. 몇 시간 후, 크라우스에게 보고하려고 했던 바로 그.

“정말 쓸데없는 짓만 골라서 하는군. 사실 예전의 난 꽤 자네를 존경했었는데 말이야. 늙어서 노망이라도 났나?”

“늙어서 노망이 난 건 내가 아니라 자네겠지. 이제 와 뭘 하려는 건가? 쿠데타? 전쟁? 가스파르, 자네는 졌네. 혼돈의 시대는 만 년 전에 끝났어. 선왕께 짓밟혀 황망한 표정을 짓던 자네가 아직도 기억나는군. 지금이라도 그때 못다 한 한풀이를 하고 싶은가?”

“그 옆에 있던 네 놈도 같은 표정이었을 텐데, 말은 아주….”

가스파르의 미간이 좁아진다. 나를 칭하는 말도 자네에서 놈으로 변한다. 조금 뻔한 도발이었지만 효과는 탁월했다.

물론 그 황망한 마음이야 지금도 이따금 기억이 난다. 하지만 당시의 감정보다 중요한 건 나중에 그 일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가스파르는 아직도 그날의 사건에 얽매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손에 든 문서를 염동으로 구긴다. 꽤 신경질적인 모습이다.

“하아…. 이런 일을 한다고 해서 크라우스가 기뻐할 것 같나? 어디 뭐 좋은 직위나 그릇이라도 던져 줄 것 같아? 꿈 깨게. 그럴 놈이 아니라는 건 자네가 훨씬 잘 알지 않나. 설령 네 보고 덕에 내 계획이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녀석은 전부 자기 실력 덕분에 그리된 줄로만 알겠지.”

“무슨 개인적 영달을 원해서 이러는 것이 아닐세. 다 선왕과 나눈 약조 때문이지. 언제, 어디서라도 용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겠노라 한 그와의 약조 말이야.”

“대단한 충신 나셨네. 이 허름한 골방에 대체 누가 알아준다고.”

그의 말에 가시가 담긴다. 그리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기에 아프지는 않았다.

“가스파르, 정말 이제 와 왜 이러나? 물론 나도 크라우스의 통치에 불만이 많네. 지금의 그를 옹호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어. 그렇다고 당장 용의 사회에 큰 액운이 닥친 것도 아니지 않나. 굳이 또 같은 용끼리 피를 볼 이유가 없다고.”

그랬다. 크라우스는 대한 원성은 높더라도, 하나씩 따져보면 작고 사소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애초에 용을 위협할만한 위기나 외적은 이제 없다. 선왕이 이미 다 끝을 보았으니까.

젊은 왕의 망나니짓 따위로 망할 만큼 용의 사회는 무르지 않다.

오히려 내분을 조장하는 가스파르야 말로 용의 적이다. 내가 고심 끝에 크라우스의 손을 든 이유도 거기에 있다.

“무능한 왕은 존재 자체가 국가의 불운이지…. 안심하게, 닐스. 결코 피는 흐르지 않아.”

“뭐?”

“혁명은 순식간에 끝날걸세. 크라우스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내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거고…. 자네와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

“하아, 이 향을 맡는 것도 오랜만이군.”

어이없게도 가스파르는 그 충격 발언에 이어 차와 의자를 요구해 왔다. 손님맞이가 왜 형편없다는 말은 덤이다.

나는 그 분홍 액체, 생명의 원천과 여분의 의자를 가져왔다. 나도 그를 상대하느라 입이 바싹 말라서, 그 제안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내 방과 그 앞 복도에 인식 저해 마법을 추가로 전개했다. 이미 가스파르가 이중, 삼중으로 깔아 놓은 게 보였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내 작은 담력의 발로였다.

이 학교의 보안은 그리 삼엄하지 않다. 현재의 그릇이 곧 과거의 보석과 같다는 걸 생각하면 제법 의아한 부분이나…. 뭐, 가까운 왕궁과 크라우스라는 존재 자체가 이곳의 경비나 다름없으니.

곧 그 크라우스가 온다. 신중에 신중을 더해 나쁠 건 없겠지.

“하던 말이나 계속하지 그래.”

“아까 잠깐 자네 수업을 봤네. 참 이상한 교육이더군. 자네, 핀 모리츠에게서 에이든이란 존재를 지우려 하던데. 대체 무슨 생각인가?”

계획에 대한 얘기를 하나 싶었는데, 가스파르는 갑자기 말을 돌렸다. 기본적으로 제멋대로인 녀석이니 놀랍지도 않다.

“자네의 흉계에서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지.”

“하, 자네의 그 아집은 역겹고도 무의미해. 크라우스가 왜 그녀에게 집착하는지는 아나?”

“그녀가 순수하고 가치 높은 영혼을 가져서 아닌가?”

“아니야.”

가스파르가 단답과 함께 잔을 내려놓는다. 분홍 액체의 표면이 흔들리다가 이내 평행을 되찾는다. 요구와는 다르게 거의 마시지도 않았다.

“기억하나? 최후의 엘프로 불리었던 암살자 마야의 이야기를.”

또 말 돌리네. 예전부터 사람 질리게 하는데 도가 튼 놈이다.

…물론 기억한다. 선왕이 질서를 세운 이래, 그만한 사건은 둘 없다. 최후의 엘프란 건 에이든이 발견된 지금 생각하면 조금 웃기는 표현 같지만.

수천 년 동안 용을 피해 몸을 숨겨온 엘프 암살자 마야. 그는 크라우스의 암살에 아깝게 실패하고 그에게 붙잡혀 그릇이 되었다. 당시엔 왕의 암살 사건보다도, 고결함을 넘어 거룩함까지 느껴지는 그 영혼의 순수성이 더 화제에 올랐었지. 정말 많은 용들이 그녀를 탐냈다고 한다. 왕의 자리보다도 그녀가 부럽다고 하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어리고 치기 넘쳤던 왕은 그녀의 조교에 끔찍이도 실패. 왕궁의 시녀들은 그녀가 정신이 붕괴하여 반응 없는 인형이 되었다고 재잘거렸고, 흥미를 잃은 왕이 쉽게 그녀를 버렸다는 이야기가 호사가들 사이에서 떠돌았다.

그 후의 일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그래서 그 마야가 왜?”

며칠 전 내가 들은 바가 확실하다면, 그녀는 지금 가스파르의 성에 있다.

역시 정보와 발이 빠른 수완가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역시 그런 사연 있는 그릇에 환장하는 상변태라고 해야 하나.

“크라우스는 내게 마야를 빼앗았겼다고 생각하고 있네. 요전에도 그녀의 이름을 꺼내며 나를 모욕했지.”

“설마.”

적반하장에 몰염치도 정도가 지나치다. 그녀를 더럽히고 떠나보낸 건 다른 누가 아닌 왕이다.

평소에 왕이 괜히 가스파르를 의식하길래 왜 그러나 생각했는데. 그런 이유였나. 참, 그답다면 그다운 일이다.

“중요한 건 그 생각의 당위성이 아니야. 크라우스가 왜 핀에게 집착하느냐지. 호승심인지, 복수심인지, 그는 몇 번이고 나에게서 여자를 빼앗으려 했네. 그 마야는 물론이고, 일전엔 리오나까지 빼앗으려 하더군. 다 실패한 그가 마지막으로 찾은 게 그녀, 핀 모리츠네. 부끄러움도 모르고 혼자서 부대 창고까지 털어서.”

“하.”

차를 사이에 두니 마음이 트이고 그의 말이 흥미롭다. 실상 내용물은 다 늙은 수컷 용 둘이서 하기엔 조금 안타까운 가십이다. 요즘 어린 것은 진짜….

“하지만 그녀와 나 사이엔 어떠한 감정도 없어. 아직 서로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니 말야. 거기서 크라우스가 생각해 낸 게 그 옆에 동면 된 엘프 에이든이네. 나에게서 안 된다면 남에게서라도 그 빼앗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걸까? 남의 아무 그릇이나 빼앗으면 될 일을…. 나야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지. 혹시 아나? 나에게서 반, 에이든에게서 반 빼앗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마르크에게 듣기로는, 녀석은 둘을 위한 사랑의 무대를 만드는데 제법 수고를 들였다던데.”

“…….”

그래도 내가 섬기는 왕인데, 들어주기 참 어렵다. 아이고…. 그만한 마력과 권력을 가지고….

가스파르가 빙빙 돌려 하려는 말도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래서 핀에게서 에이든을 지우는 행위가 쓸모없다고 한 건가.”

“그렇지 그게 그가 핀에게 집착하는 이유니까. 왕이 뭐라 귀띔하지 않았나? ‘필요 이상으로 건들지 마라’던가.”

분명 그런 이야기를 하기는 했다. 그릇이야 흔하니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았고, 정확히 이런 이야기인 줄도 몰랐지만.

“놔두면 곧 핀과 왕은 이어질 테고, 그녀 정신의 균열을 발견한 왕은 내게 상응하는 문책을 하겠군.”

“그렇지.”

아무리 사소한 간섭이라도, 몸을 이을 정도로 깊게 관계하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진짜 에이든을 지우지도 못했거늘, 크라우스는 바로 나의 간섭을 알아차리겠지.

원래 그 정도 조작은 교사 재량인데…. 다른 평범한 학생들을 교육하던 나의 감각으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해올지 벌써 어지럽다.

뭐, 이 정도 부조리야 익숙하지.

“내가 그런 일 때문에 자네에게 협력할 거라고 생각하나?”

“당연히 아니지. 하지만 생각해 보게. 애초에 핀을 자네에게 떠넘긴 것부터가 월권 아닌가? 그 성격에, 상세하게 해선 안 될 일을 알려준 것도 아닐 테고.”

“더 해보게.”

“말했듯이, 나는 자네를 제법 고평가하고 있어. 마법의 깊이 만큼은 따라올 용이 없다고까지 생각하지. 자네는 타고난 학자이자 마법사 아닌가. 평생을 마법 연구에 바쳤는데, 이런 한직에서 학생들 뒤치다꺼리나 하다니.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미 선왕께서 정한 일이네.”

마음에도 없는 소리다. 내가 아는 가스파르는 절대 남을 존중하거나 떠받드는 용이 아니다.

그래도 나쁜 기분만은 아니었다. 용의 사회가 재편되기 전에는, 이런 말 참 자주 들었었는데.

“그게 문제라는 거야 그게. 나도 선왕의 안목은 인정하는 바가 있네. 그런데도 왜 자네를 이런 곳에 처박아두었냐 이거지. 혹여…. 자네가 그 첫 회의에서 꺼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닐까?”

“가스파르, 잠깐.”

이 새끼, 쓸데없이 기억력은 좋아서….

“자네는 그때 분명 수컷 용을 암컷 용으로 바꾸면 쉽게 일이 해결된다고 했지. 하, 이제 보니 내 생각과도 같지 않나.”

“이제 와 그런 일을 왜…. 됐네. 마음 바뀔 일 없으니 가게.”

몰랐다는 듯 태연한 척이 역겹다.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서…. 설마.

“회의에선 비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았지만…. 자네가 맞았지, 자네가 맞았어. 사실 그때도 그랬네. 내 연구가 지지부진하고, 선왕도 통치에 서툴렀던 초기, 왕보다 자네가 맞았다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지. 모든 것이 안정을 되찾고서도, 이종족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에 회의를 느낀 몇몇 용들은 자네의 의견이 옳았다며 한탄하고는 했고.”

“…….”

“혹여, 선왕은 그 일 때문에 자네를 이런 한직에 유배시킨 것이 아닐까? 공명정대하고 강단 있던 녀석이지만, 어딘가 꿍한 부분도 있는 놈이었으니 말이야……. 그리고 내 연구의 부작용이 조금씩 튀어나오는 지금, 그 아들놈도 혹시? 에이,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 이건 그냥 만약, 만약의 이야기일세.”

“근거도 없는 추측은 거기까지 하게. 이제 정말 시간이 없으니….”

빨리 말을 끝내야 한다. 더 들을 가치도 없다.

“아니, 하나만 더하지.”

그러나 가스파르는 날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왔다는 투다.

“자네, 행색을 보니 아직도 마법 연구에 몰두 중인 것 같은데…. 지금 무슨 연구를 하고 있나? 잠깐 거인족에게 침략전쟁이 지체되었을 뿐, 용의 사회는 평화롭고 여자나 물자나 부족할 것 하나 없는데.”

“…이 세상의 원리에 대한 규명이지 또 무엇이 있나. 나는 학자의 호기심을 버린 적이 없네.”

“그것도 하나 이유가 될 수 있겠지. 근데 내가 요즘 말이네, 자네가 나와 같은 연구로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까 궁금해 밤을 지새울 수가 없어. 나에게도 그 학자로서의 호기심이란 게 있는가 보지? 나도 깨나 마법 공부를 했으니 말이야. 어떤가? 부디 그 마법에 대해 같이 의견을 나누고 싶은데.”

“글쎄, 나는 무슨 말인지 도통….”

“아니, 자네도 이미 완성했지 않은가.”

어울리지도 않게 익살을 부리나 싶더니, 그의 목소리가 다시 크고 분명해진다. 또박또박. 느리게. 다분히 의도적이다. 나는 그 말과 말 사이가 거의 영원처럼 느껴졌다.

“수컷 용을 암컷 용으로 만드는 마법을.”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