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학교 생활 (6)
* * *
“가스파르…. 어디까지 알고 온 건가…?”
닐스의 안색이 납빛으로 변한다. 이쯤 되니 놀리는 게 재밌을 정도다. 용치고는 참 솔직하다.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안타깝네. 자네에게도 수천 년간 쌓아온 연구와 계획이 있었을 텐데.
리오나의 어리광만 아니었어도 이럴 일은 없었다. 닐스를 그저 닥치게 만들 방법이야 얼마든지 더 있다. 그래서 그가 처음 엿듣는 것도 가만 내려두었다.
그러나 핀을 써먹지 못하게 된 지금은 다르다. 내게는 크라우스에게 직접 가닿을 수 있는 수단이 달리 없었다. 그 녀석이 나와 내 주변 인물을 꺼리는 건 명백하다. 나, 에이든, 핀, 크라우스로 이어지는 관계가 리오나에 의해 단절된 이상, 그 녀석에게 닿을 다른 줄이 절실했다.
나는 그날 바로 마르크에게 닐스의 뒷조사를 부탁했다. 큰일이 있고 난 후라 힘들었을 텐데도, 마르크는 씩씩하게 제 역할을 다했다.
분명 계속 학교에 있었는데 이따금 몇 시간 동안 안 보이더라. 불려간 방에서 이상한 도마뱀을 봤었는데, 키우시는 거냐고 물어보니 무슨 말이냐며 시치미를 떼더라. 용치고는 쪼끄만 게, 속은 완전 늙은이라 존나 귀엽지 않냐. 등등….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쉽게 휘발되는 학생들의 사소한 말들. 새나 나비의 모습으로 분장한 마르크는 하루 반절 만에 닐스에 관한 흥미로운 정보를 모을 수 있었다.
물증은 없어도 심증은 있다. 게다가 나는 닐스가 어떤 남자인지도 알고 있다. 오늘의 방문은 그리 못할 도박도 아니었다.
처음엔 비웃음을 당했어도, 그 무엇보다도 합리적이고 당연한 결론. 사실 다들 알고 있었으면서, 남의 시선 때문에 쉽게 입에 담지 못한 해결책.
수컷 용을 암컷으로 바꾼다.
닐스도 용이다. 뼈와 살 대신 자존심과 고집으로만 이루어졌다고까지 하는 그 용.
가장 처음 그 의견을 꺼내 망신을 당한 닐스가 당시의 일을 마음에 담아 놓지 않았을 리 없었다. 자신이 옳았다는 것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는 지금은 일종의 우월감까지도 느낄지 모른다.
“자네가 계속 이런 한직에 머물렀던 것도 다 자유롭게 마법 연구를 하기 위한 일 아니었나? 흔히 등잔 밑이 제일 어둡다고들 하지. 왕궁 바로 옆, 주기적으로 왕이 찾아오는 이곳에서 그런 금법을 연구한다고 누가 의심이나 하겠나?”
“…언제 그렇게 망상벽이 늘었나.”
“여길 손님으로 오는 귀족이나 다른 교사에게선 아무것도 얻을 게 없었네. 자네, 용은 확실히 경계했더군. 하지만…. 자네가 갑자기 공간에서 사라지거나, 이상한 뿔이 달린 도마뱀을 키우는 걸 보았다는 학생들이 있었어. 아무리 무해한 아이들이라 해도 조심했어야지. 하긴, 어떤 미친놈이 그릇 보고 용에 대해 상세히 묻겠냐마는….”
“그, 그래도 아직 확증은….”
“이미 끝났네. 포기가 늦어.”
쿵. 나는 앉은 자세 그대로 발을 들어 크게 땅을 굴렀다. 그 충격에 실린 마력이 파동처럼 아스라이 번지며 닐스가 만든 환상을 부수어 나간다.
군불에 눈송이를 가져다 대 듯, 탁한 차에 설탕이 퍼지듯. 주위의 사물이 가루처럼 으스러지다 이내 녹아 사라진다.
끝이 닳은 원목 가구와 반쯤 쓴 양초, 녹슨 펜촉과 눌린 잉크. 낡고 허름한 방의 정경은 사그라들고, 대신 수없이 많은 유리관과 크고 반듯한 기계장치가 들어찬 살풍경한 연구실이 나타난다.
닐스는 작게 입을 벌린 채 기가 막힌 표정으로 자신의 마법이 무너지는 것을 본다. 그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자신만이 매일 보아온 현실이자 진실이거늘, 이렇게 남에게 까발려지면 새삼 새롭고 낯설게 느껴지겠지.
“공을 참 많이 들였구만. 내가 환상 하나 깨는 데 이리 시간이 오래 걸리다니.”
“…….”
닐스의 대답은 없다. 연구실 곳곳에서 익숙한 초록 마나가 보인다. 나도 며칠 전까지 다루는 데 애를 먹었던 그 순수한 고대의 마나다. 그 옆, 철창 안 도마뱀이 멍청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본다.
“자네가 무슨 생각으로 연구를 계속해왔는지 묻진 않겠네. 어쩌면 정말 학자의 호기심일 수도 있지. 결국 자신의 말이 맞았다는 에고의 발로일 수도 있고. 이해하네. 하지만 이 사실이 밖에 알려진다면 어찌 되겠나? 크라우스는 반역이라 생각할 테고, 다른 용들도 자네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겠지. 자네와 같은 뜻을 가진 이라 하더라도 쉽사리 자네를 변호할 순 없을걸세. 솔직히, 자네가 어떤 기반이나 부를 가진 것도 아니지 않나.”
누구와는 다르게 말이야…. 굳이 붙일 필요가 없는 말은 하지도 않았다.
닐스도 바보가 아닐 것이다. 송신자가 나, 가스파르라는 것을 감추고 이 사실을 알릴 방법은 차고 넘친다.
설령 크라우스에게서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한 번 번진 말은 멈출 수 없다. 나와 그는 낸 결론도, 이루어낸 마법도 모두 같다. 시간이 지나 내가 거사를 일으키면 그는 곧 나의 사람인 양 소문이 돌 것이다. 운신의 폭이 너무나도 좁다.
하. 리오나나 핀 같은 인간 그릇들 때문에 용의 일생이 뒤엉키고 있다. 눈앞의 닐스는 아무것도 모른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인데….
결국 원인은 그녀의 애교 하나에 계획에도 없던 짓을 하는 나에게 있지만.
잠시 침묵하던 그가 천연히 얼굴색을 바꾸고 한 바퀴 자신의 연구실을 바라본다. 이내 결심을 굳혔다는 듯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응시한다. 마주한 눈동자에 그늘은 없었으나,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숨기지는 못했다.
“대가는.”
“뭐?”
“자네 혼자선 왕에게 접근할 수 없으니, 나와 같이 왕을 암컷으로 만들자는 이야기 아닌가. 그렇다고 자네의 수하가 될 생각은 없네. 언제나 일에는 그 대가가 있어야 하지.”
“하아.”
의외로 당돌하다. 여기서 자기 몫을 찾는다고? 이야기가 빨라서 오히려 좋다.
“왕, 크라우스를 주게. 자네는 어차피 자리가 중요한 게 아닌가.”
그런데 선을 넘는다.
기분 탓일까, 그의 눈이 욕망으로 불타오르는 게 느껴진다.
“말도 안 되네. 그가 얼마나 중요한 상징인지…. 아니, 아니. 진짜 안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말야…. 자네 혹시 처음부터…?”
“…? 무슨 얘긴가?”
“아, 아니네.”
처음부터 크라우스나 선왕의 뒤를 노렸나 했는데 아니었나…. 이게 만년 어치의 집착인가, 하고 소름이 돋을 뻔했다.
어찌 되었건 그에게 크라우스를 넘길 순 없다. 그와는 나도 풀어야 할 숙연이 있고, 암컷이 된 그의 모습은 용의 새 시대에 대한 상징이 될 터이니.
그리고 필요 없어진 그의 막대한 마나는 자연과 엘프, 인간들에게 환원되어….
어?
“아. 크라우스의 마나를 달라는 이야기였나.”
“그래, 처음부터 그 이야기였네.”
아니지 않았나? 조금 어지럽다. 요즈음 계획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해서 그런가.
“전부를 달라는 것도 아니야. 선왕 때부터 쌓아온 그 막대한 마력…. 그 편린을 조금이나마 보고 싶네. 선왕과 그의 불가사의한 힘은 아직 해명조차 되지 않았지. 자네 말대로 나는 용이기 이전에 마법사이자, 마법사이기 이전에 학자네. 그가 가진 마나를 충분히 연구 할 수 있을 만큼만 준다면 나도 자네의 뜻에 함께하겠네. ”
“그래. 그 정도쯤이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닐스의 손을 잡았다. 그도 나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작게 흔든다. 내 계획에 또 하나 동지가 늘었다.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나는 이만….”
“아니지. 곧 왕이 이 학교에 오네. 잠시만 기다리게.”
그래서 가겠다는 것인데.
닐스가 천천히 다시 환상을 써 내린다. 그의 연구실이 세계 이면에 감춰지고, 낡은 그의 방이 되돌아온다. 창문 밖으로 오후의 평범한 학교 정경이 펼쳐진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오늘부터 당장 일을 시작해야지.”
집중을 끝낸 닐스는 그 정경 너머, 주황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노려보았다.
“핀! 핀! 어서!”
오후 수업도 끝난 학교의 강당.
예전의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너른 건물인데, 전학생이 모여 발 디딜 곳 없이 빼곡하다.
그런데도 카리나는 나의 손을 붙잡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어깨와 어깨가 부딪히고, 이리저리 몸이 치인다.
“카, 카리나 잠깐…. 아!”
다른 학생들도 가만있진 않는다. 모두 조금씩 몸이 앞으로 쏠려 있다. 시선은 강당 앞, 빈 단상에 고정되어 있다.
“어? 핀? 핀!”
쏟아지는 인파에 잡은 손이 끊어지고 카리나와 멀어진다. 나는 하릴없이 그 인간의 너울에 몸을 맡겼다.
이 나이 여자아이 특유의 단 냄새로 사위가 가득 찬다. 청귤같이 상큼하고 향기롭다. 내가 아직 남자의 몸이었다면 정신이 아득해졌겠지.
카리나의 말대로 오후 수업은 깨나 정상적이었다.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숙녀다운 고상한 말씨나 예법도 배웠다.
그녀의 도움 덕에 다른 학생들과도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정말 다들 착한 아이들뿐이었다. 지금까지 몸이 바뀌고 얻은 인연이라고는 에이든말고 없었다. 물론 그와의 시간은 행복했지만, 어째서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되고 가슴이 콩닥거려 되려 당황스럽기도 했다.
근위대 병사들과도 이렇게 격 없이 말을 나눌 것을 그랬다. 오랜만에 동성 친우와 말을 나누니 즐겁고 마음이 가볍다.
저릿한 고통이 이따금 가슴에 달리는 것은 멈추지 않았만…. 나를 둘러싼 현실은 아직 변한게 없다.
아니, 것보다.
아 쫌! 저번에 나 맨 뒤였단 말야!
밀지마, 밀지마!
아아아!!! 다 비켜어!!!!!
얘들은 왜 이러는 걸까? 이미 수업도 다 끝났는데.
이러다 사달이라도 날까 두렵다. 원래 착하고 얌전한 애들이란 걸 알게 된 후라 상황이 더 이상하게 보인다. 뭐냐고, 대체.
어디로, 왜 가느냐 물어봐도 카리나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무척 소중하고 대단한 사람이 온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
“하아….”
어렴풋이 예상되기는 했다. 어차피 또 그 크라우스겠지. 용의 왕이자 이 학교 이사장님 되신다는.
나를 사로잡고 에이든을 피투성이로 만든 그 녀석 말이다. 생각만 해도 머리에 피가 오르고 좋지 않은 감정들이 북받친다.
그래서 오고 싶지 않았는데, 카리나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이 몸은 같이 여자가 된 다른 아이들보다도 여리고 약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그 잘난 얼굴이나 다시 보자.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낯짝이니까.
기헨의 일이든, 에이든의 일이든. 내 무슨 일이 있어도 복수하고 마리라, 크라우스.
가능한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다.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일치하는 때도 있는 법. 내가 꼭 너는…!
끼익. 단상 옆에 야트막하게 난 문이 열린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기다리던 그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때였다.
“으, 응?”
광증이 모두를 덮친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