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4. 네가 왜 거기서 나와
* * *
비록 원래 있었던 지도는 파티에 두고 나왔지만, 미리 기록 해 두었던 지도의 사본을 토대로 나와 알렉시스 공녀 일행은 퀼른을 향해 바삐 움직였다.
적이 매복중일 것으로 의심되는 곳은 피하고, 워 울프의 발자국 같은 마물의 흔적을 통해 적들의 경로를 예측하며 이동한 결과, 우리는 8일 만에 무사히 퀼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록 일행이 늘어난 여파로 의도치 않게 속도가 느려져서 예상보다 늦게 도착하긴 했지만, 우려했던 식량은 보급 마차에서 빵빵하게 보급을 받았었기 때문에 딱히 배를 곪지는 않았던것이 천만다행 이었다.
"현재 메르덴 숲에 진을 친 마왕군으로 인해, 신원이 확인 되신 분들만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차와 행상인들이 줄 지어 늘어선 성문의 앞으로 다가가, 알렉시스 공녀로부터 신원을 보장받은 덕분에 빠르게 도시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알렉시스 공녀님. 덕분에 무사히 퀼른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아... 아뇨... 저야 말로 오스틴 경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저희 가문의 이름을 걸고,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서로 감사 인사를 주고 받으며 훈훈해진 분위기 속에서, 알렉시스 공녀가 입을 우물거리며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하실 말씀 이라도...?"
"아... 저, 오스틴 경은 이후의 일정이 어떻게 되시나요?"
"음......"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마탑으로 달려가 게이트를 타고 수도로 훌쩍 넘어가고 싶지만, 전시 상황인 지금, 막대한 마나를 소모하는 마탑의 게이트는 신원이 확인된 소수의 인원만 이용할 수 있도록 제한되어 있는 상태 이다.
내가 용사 파티에 소속되어 있던 때 였다면 아무런 문제 없이 즉시 게이트를 열어 주었겠지만, 나 혼자서 게이트를 이용해 수도로 가려고 한다면 아마 이용하기 힘들 것이다.
본래라면 저번에 보낸 마법지를 받은 메텔하임 아카데미 총장 으로부터 게이트 이용 허가서를 받을때 까지 며칠 정도 기다려야 하겠지만.. 알렉시스 공녀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느새 북적거리는 시장 거리의 모습이 시야에 담기기 시작하고, 이곳 저곳에서 들려오는 돈이 오고가는 소리를 잠시 듣고있던 나는 이윽고 알렉시스 공녀에게 물었다.
"공녀님 께서는 수도로 돌아가실 예정 이십니까?"
"아... 네! 이번에 전선으로 온 것은, 아카데미 졸업 전 방학 기간 동안 마지막으로 실전 경험을 쌓으려고 온 것이라서...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곧 수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혹시 메텔하임 아카데미에 재학 중 이신지..."
"네. 올해로 3학년 이랍니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빠르지.
"실례가 안된다면, 수도까지 제가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마침 저도 수도로 가야 하는 상황인 참인지라.."
"네! 저도 오스틴 경이 동행 해 주시면 든든할 것 같아요."
좋아. 이걸로 게이트를 이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럼, 게이트는 언제 이용하실 예정 이십니까?"
"오늘은 여관을 찾아서 하룻밤을 보내고, 내일 장비를 정비한 뒤 수도로 돌아가려 했습니다만... 사실 요즘 마탑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조만간 벌어질 전투를 대비해서 마나를 조금이라도 아껴야 한다면서, 게이트 허가를 잘 내어주지 않고 있..... 오스틴 경? 괜찮으신가요? 땀을 너무 많이 흘리시는데요..."
"........"
"오... 오스틴 경...?"
알렉시스 공녀의 부름에도, 나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대화 도중 무심결에 시선을 돌렸던 순간, 어디선가 많이 봐 왔던 흑발 포니테일과, 그 밖의 익숙한 외형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숲을 벌써 빠져나온 거지?
아니. 저 여자들이 숲을 빨리 빠져나온 것이 아니다.
예상보다 3일이나 지체된, 내가 늦게 온 것이다.
"...이 씨발."
"오스틴 경...?"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 우리 어서 여관으로 갑시다!"
"하지만 저는 먼저 상부에 보고를 해야..."
"아, 그럼 제가 먼저 가서 숙소를 잡아 놓겠습니다! 어느 여관이 괜찮은지 제가 잘 알거든요!"
"알겠습니다.."
곧바로 우리가 묵을 여관의 위치를 알려준 뒤, 알렉시스 공녀를 배웅해준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씹... 이 씨이팔... 하필이면 거기서 딱 봐 버리냐... 왜 여기에 있는거야?"
본래라면 지금 숲에 있는 마왕군 7 군단을 지휘하는 제 7군단장, 꼭두각시 아가일을 상대하고 있어야 하는 용사 파티가, 대체 왜 퀼른에 와 있는 걸까.
"염병할... 마주치면 일단 곱게는 안 끝난다."
용사의 성질머리를 오랫동안 봐 온 나는, 자신들을 내버려 두고 말도 없이 떠난 나에게 얼마나 분노하고 있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래도 혹시라도 마주치게 된다면, 철저히 무시로 응대할 것이다.
내게 파티로 돌아와 달라고 애를 써도, 매정하게 떨쳐 내리라.
나는 갑자기 몸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서늘한 오한에 몸을 부르르 떨며 여관을 향해 이동했다.
".....찾았다."
내가 지나간 방향을 바라보며, 고양이 귀를 쫑긋거리는 어느 수인 마법사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한 채로.
* * * * *
여관에 도착 해서 곧바로 알렉시스 공녀와 내가 머물 방을 하나씩 잡은 뒤, 가방에서 작은 숫돌을 하나 꺼내어 날이 조금 무뎌진 숏소드를 손을 보기 시작했다.
삭삭 거리는 소리와 함께, 전투의 흔적이 점점 벗겨지며 다시금 날카로운 칼날의 모습으로 되돌아 가는 하이 메탈제 숏소드를 보고 있자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칼날을 가는 소리는, 언제나 들어도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것 같단 말이지.
"후... 힐링 된다. 아 시팔 너무 좋네."
비록 방금 전에는 '불미스러운 사고' 가 일어날 뻔 했지만, 어차피 내일이면 게이트를 타고 수도로 훌쩍 떠날 예정인 나에게는 별로 상관 없는 일이다.
아까 시장에서 알렉시스 공녀가 했던 말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뭐, 별일 있겠어?
용사와 떨거지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생각해보니, 내가 왜 무서워 하는 거지?
이미 파티를 탈퇴한 내 입장 에서는, 그녀들이 밥을 쑤건 죽을 쑤건 내 알 바가 아니다.
애초에 내 잘못으로 파티를 빠져 나온 입장이면 할 말이 없겠지만, 이번 일은 순전히 나를 대하는 그녀들의 태도로 인해 생겨난 문제다.
등을 맡겨야 하는 동료를 무슨 노예 부리듯이 부려 먹는데, 만약 그런 푸대접을 끝까지 견딘다면 그건 사람새끼가 아니거나, 성적 취향이 그 쪽 이거나 둘중 하나 일 것이다.
설사 다시금 마주친다손 쳐도, 그녀들을 매몰차게 거절할 준비가, 나는 되어 있다.
그렇게 온갖 잡생각을 하다가, 점점 삼천포로 빠지던 생각이 오늘 저녁을 뭘 먹을지에 대한 것으로 넘어가며 휘어진 볼트를 바로 잡으려던 찰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알렉시스 공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똑 똑
"오스틴 경. 잠시 괜찮으신가요?"
"예, 나갑니다."
예리하게 잘 갈린 숏소드의 날을 흡족한 표정으로 잠시 바라보고, 그대로 칼집에 꽂은 뒤 볼트를 내려두고 문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벌컥 여니, 어느새 무거운 중갑을 벗은 채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있는 알렉시스 공녀가 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 다름이 아니라, 아직 저녁 식사를 하지 않으신 것 같아서요."
"아... 잠시 무기를 정비 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군요.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함께 저녁 식사를 들지 않으시겠어요?"
"예. 물론 괜찮습니다. 그럼, 바로 가실까요? 제가 좋은곳을 알고 있거든요."
그렇게 알렉시스 공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어느덧 저녁 시간대로 붐비는 여관을 빠져나온 우리는 식당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 했다.
"공녀님 께서는 메텔하임 아카데미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까?"
"그럼요. 제가 다니는 아카데미 인데, 모르는게 이상하지 않을까요..?"
"아...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무기를 정비 할 때는 온갖 잡생각을 하는지라..."
이런 저런 잡담으로 어느새 대화에 점점 빠져들때 쯤, 식당에 도착한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 테이블을 잡고 음식을 주문 했다.
"오스틴 경은, 어떤 경위로 용사님이 계신 파티를 나오게 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하하... 이게 참, 그리 밝은 이야깃거리는 아니라서 말입니다. 뭐.. 파티 멤버들과 작은 마찰이 있었다는 말씀 밖에는 드릴 수 없겠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그녀들은 일단은 세상을 구할 용사 파티 이다.
전 파티원인 내가 그러한 용사 파티에 대한 안좋은 사실을 들먹이게 된다면, 나에게는 기분 좋은 복수가 될 지언정 용사 파티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은 좋지 못하다.
애초에 나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제대로 용사다운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고 말이지. 아마 내가 말한다 한들 내 말을 믿어줄 사람은 손에 꼽을 것이다.
조금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다고 생각되는지, 방금전과 다르게 말수가 적어진 알렉시스 공녀 덕분에, 우리는 음식이 나올 때 까지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를 감출 수 없었다.
이대로는 밥을 먹어도 체할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입을 열었다.
"그... 공녀님. 혹시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내일 최대한 빨리 게이트를 이용할 수 있을까요? 제가 사정이 있어서, 급히 수도로 가 봐야 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는 대로 마탑으로 이동 하겠습니다."
그래. 용사파티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안좋은 일들은 얼른 추억의 저편으로 보내버리고, 나는 새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비록 내 멋대로 파티를 탈퇴 하면, 어떤 불이익이 있을지 모르지만...
마왕을 잡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파티를 나가버리는 것이, 얼마나 책임감 없는 행동 인지는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나를 한계까지 몰아 넣었던 것은 마왕군의 군단장도, 쉴새없이 몰려오는 마물들의 군세도 아닌, 같은 파티원들 이었던 그녀들과 용사 였다.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애초에 내가 필요 없다고 떠들어 대기도 했고...
이 참에 내키는 만큼 편하게 쉬고, 가고 싶었던 여행도 가보자.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해치운 우리는,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 가며 여관으로 돌아 왔다.
"그럼, 알렉시스 공녀님. 편안한 밤 되십시오."
"아... 네! 오스틴 경도 좋은 밤 되세요."
상투적인 인사를 끝내고,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내일 아침 일찍 마탑으로 출발 하기 편하도록 미리 장비들을 점검하며 짐을 꾸리기 시작 했다.
"볼트... 수도에 가면 좀 더 사야겠다. 쇠뇌는... 아직 멀쩡 하네. 현도 아직 탄탄하고..."
그나저나, 내가 수도로 돌아간다면 그 교관님은 어떤 반응을 보여 주실까.
이런 저런 잡생각을 하다가, 어느덧 짐을 다 꾸리고 목욕을 한 뒤 욕실 문을 열고 나오던 찰나.
똑 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수건으로 머리를 비비적 거리며 방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알렉시스 공녀가 무언가 깜빡한게 있나?
나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곧바로 방 문고리를 잡아 돌리며 문을 열었다.
"알렉시스 공녀님? 뭐 하실 말씀 이라도......."
문이 열리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알렉시스 공녀가 아니었다.
"...오스틴. 오랜만.."
나를 노예처럼 부려먹고 비참하게 푸대접을 했던, 증오해 마지 않는 파티원들 중 하나.
문 앞에는, 고양이 귀를 쫑긋거리며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수인 마법사 한 명이 서 있었다.
".....마야."
네가 왜 여기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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