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의 척후 담당이었다-12화 (12/106)

〈 12화 〉 12. 기회는 언제나 절체절명의 순간에

* * *

"어... 그... 그레이시 님! 이쪽에..."

이따금 보이는 핏자국과, 드문드문 새겨진 전투의 흔적을 따라 바삐 움직이던 맥스와 용사 일행은 어느 넓은 공터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보급 부대가 또..."

여기저기 흩뿌려진 마차의 잔해와 피, 그리고 난폭하게 긁힌 전투의 상흔.

경계의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보던 맥스와 아드리엔은, 이내 주변에 적이 보이지 않자 무기를 슬며시 내렸다.

"주변에 적은 없는 것 같네... 맥스 라고 했나? 이런 주변 경계는 원래 척후의 역할이야. 앞으로는 혼자 알아서 하도록 해."

"어... 네... 죄송합니다."

맥스와 함께 앞장서서 걷던 그레이시는, 잔해를 조사하기 위해 용사와 함께 마차로 다가갔다.

"이 흔적... 아까랑 비슷한 것 같은데?"

"음... 아무래도 보급 부대를 노리는 놈들이 있는 듯 하군."

이번에도 역시 긴 사정 거리를 이용한 무자비한 학살의 흔적이 여기저기 새겨져 있음을 확인한 그레이시와 용사가, 파티원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움직인 순간.

"....려...."

어디선가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에, 둘의 다리가 우뚝 멈춰 섰다.

"...그레이시. 방금..."

"음... 나도 들었다."

꿀꺽. 침을 삼키며, 잠시 눈을 감고 청각에 온 정신을 집중하자, 또다시 희미한 목소리가 그레이시와 용사의 귓가에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려... 줘.... 살... 려..."

"...생존자."

"생존자가 있나..?"

계속해서 들리는 구슬픈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던 그레이시와 용사는, 이윽고 소리가 나는 마차 내부를 살펴보기 위해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살려... 줘... 살려..."

마차의 내부를 경계의 눈초리로 슬쩍 살펴보는 용사와 그레이시.

"...저게, 뭐야...?"

그 안에는, 마치 밀가루 반죽처럼 생긴 기괴한 물체가 꿈틀거리며 계속해서 살려달라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사알려.... 줘...."

마치 슬라임처럼 쉴 새 없이 꿈틀거리는 구 형의 물체가, 용사와 그레이시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 했다.

"...일단 물러나 봐."

그레이시를 잠시 뒤로 물러나게 한 용사는 꿈틀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괴한 물체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 물컹

"살려... 줘.... 살.."

"......위험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마물 같지도 않고..."

손에 착 감기는 보드라운 촉감에, 마치 슬라임처럼 말랑거리는 탄력을 가진 물체를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는 사이, 어느새 곁에 다가온 마야가 눈을 빛내며 용사가 만지작거리는 물체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물은. 아니야... 마물의 냄새가. 나지 않아. 마물 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에 가깝다.

라는 생각이 마야의 머릿속을 번뜩이며 지나가는 순간, 용사의 손에서 꿈틀거리며 계속해서 형체가 변화하던 물체에서, 새빨간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확­ 하고 퍼지는 마력의 향기...

...설마?

"용사!! 그거 어서 손에서 놔!!!"

마야는 헐레벌떡 지팡이를 고쳐 잡고 방호 마법을 전개하며 용사에게 소리쳤다.

"어... 이게 뭔데?"

"빨리 멀리 던져!! 함정이야!!"

바로 그때, 용사의 손에 붙잡혀 있던 물체가 번쩍, 빛나며 주변에 퍼진 붉은 마력을 순식간에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용사가, 정체불명의 물체를 마차 내부로 다시 던져 넣으며 그것이 용사의 손에서 떠나가는 순간.

­ 퍼어엉!!!!!!!!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붉은 마력을 응축시켜 폭발한 그것으로부터, 피안개가 뭉개 뭉개 퍼지기 시작했다.

"크으윽..!!! 콜록 콜록! 아드리엔!! 맥스!!! 이사벨! 어서 이리로!"

"용사님! 용사님!! 괜찮으신가요?!"

"콜록..!! 으윽... 마야 덕분에.. 살았어..."

"이사벨! 어서 치료를..!"

폭발과 동시에 펼쳐진 마야의 방호 마법을 뒤집어쓰고 몸을 비틀며 피해 낸 덕분에 목숨은 건졌지만, 코 앞에서 그대로 폭발을 받아낸 용사의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마력의 파동으로 인해, 피가 줄줄 흐르는 옆구리를 붙잡은 용사는 이사벨에게 치료를 받으며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 저벅 저벅

핏빛 안개가 조금씩 걷히며, 또 다른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역시 대륙의 희망인가. 피의 고름을 바로 앞에서 당하고도 살아 있다니."

점점 다가오는 발소리가 잦아들고, 이내 안개가 걷혔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용사."

"....데팔...!"

용사 일행과 그들을 포위한 데팔의 롬팔리아 습격대가, 서로를 노려 보며 조용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걸리적 거리던 그놈이 없으니, 이런 얄팍한 함정에도 걸리는군. 오늘이야말로 네년들의 목을 베어 그분께 진상하겠다."

"해 볼 테면 해 봐..!"

데팔이 쥔 청색의 창이 크게 진동하며 떨리고, 용사가 뽑아든 성검 역시 이에 질세라 웅웅 거리며 환한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어... 용... 사님...?"

"...맥스. 전투 준비해."

얼떨결에 활에 화살을 매긴 맥스는, 자신과 일행들을 향한 농밀한 살의가 담긴 시선에 본능적으로 알아 차렸다.

나는 여기서, 죽는구나. 하고.

* * * * *

"무슨 풀이 내 키보다 높이 자라? 씨벌거, 확 불 질러 버리고 싶네."

자꾸만 눈가를 스치며 간지럽히는 풀 때문에 내가 조용히 욕지거리를 내뱉자, 내 옆에서 주변을 탐지하던 로빈이 팔꿈치로 나를 툭 치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 가까워졌어요. 거리는 200걸음 정도... 숫자는... 대충 30명 정도가 모여 있어요. 보급 부대 일까요?"

"뭐, 30명 씩이나 감지된다면 보급 부대겠지."

내가 걸리적거리는 풀을 제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로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아까 들린 어린아이의 목소리는 대체... 뭘까요?"

"낸들 알아? 뭐, 우리 공녀님처럼 어디 높으신 분 자제라도 되나 보지."

보통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찾아오는 귀족가의 자제들은, 위험한 최전선 보다는 보급 부대나 후방 대기조에 많이 배치되는 편 이니까.

그렇게 서른 걸음 정도를 걸었을까. 갑자기 땅 위의 자갈들이 살짝 떠오르고, 곧이어 엄청난 폭발음이 귀 안을 폭력적으로 파고들어 왔다.

"꺄읏...! 이건..?"

"뭐... 뭐야...?"

알렉시스 공녀와 내가 어안이 벙벙해진 채 얼빠진 소리로 말하자, 큰 소리가 귓가에 울림에도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던 로이먼이 숨을 한번 크게 들이키더니 플레일을 움켜쥐며 입을 열었다.

"...사악한 기운에 코가 마비되는 것 같군요. 더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어... 그래 뭐... 네가 그러면 그런 거겠지... 알렉시스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네에... 조금 놀란 것뿐이에요.."

당황하기도 잠시, 이내 분위기를 추스르고 긴장한 표정을 지은 우리는, 주변을 경계하며 조심스레 소리의 근원지로 다가갔다.

"...싸우고 있다. 데팔과 마주한 건가?"

멀리서 들리는, 병장기가 부딪치며 내는 쇠 소리에, 우리는 발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로빈의 탐지에 걸린 존재들로부터 100 걸음 정도 남은 거리까지 다가가자, 울창한 초록색의 지옥이 갈라지며 돌연, 평탄한 공터가 눈앞에 펼쳐졌다.

"....저건..."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함께, 피와 살이 튀는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스물 남짓 되어 보이는 리빙 아머 들과, 앞장서서 적들을 향해 창을 휘두르고 있는 데팔.

그리고...

"...저년들이 왜 여기 있어?"

그런 데팔의 연격을 정신없이 받아치고 있는, 용사년과 똘마니 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뭐지? 아가일을 쫓던게 아니었나?

뜬금없이 튀어 나온 용사 일행들 때문에 잠시 당황하여 굳어 있으니, 용사와 똘마니들이 수적 열세와 데팔의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연격에 점점 밀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옆구리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니, 아마 습격이라도 당한 모양인데...

...굳이 도와야 하나?

"...야, 로이먼. 그냥 싸움 막바지에 데팔만 죽이고 목만 베어 갈까?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런데, 나 사실 용사랑 사이가 별로...?"

방금까지 내 뒤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던 로이먼의 자리에는, 로이먼의 거구에 눌린 풀들만이 보였다.

뭐야, 이 새끼 어디 갔지?

내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로이먼을 찾고 있자, 별안간 로빈이 내 어깨를 톡톡 건드리며 앞을 가리켰다.

"선배님... 저기..."

반사적으로 로빈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앞으로 향한 나는, 저절로 이가 아득 물리며 온갖 욕이 머릿속에 들어찼다.

"....아, 씨발. 진짜."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곧장 데팔과 마주 보고 서 있는 로이먼을 향해 뛰쳐나갔다.

저 병신, 진짜!

* * * * *

"크윽... 마야! 플레임 스톰은 언제쯤 준비 돼!"

데팔의 창을 받아낸 용사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 쳤지만, 이미 영창에 온 정신을 집중한 마야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젠장... 그게 함정이었어?! 이 씨발...!'

­ 챙!

한 합이 더 오가고, 데팔로부터 잠시 거리를 벌린 용사는 피 섞인 침을 퉤, 뱉어냈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함정을 눈치챘다면... 함정임을 눈치채고 습격에 대비를 했다면... 아마 상황은 더 낫지 않았을까?

그런 용사의 머릿속에는, 뜬금없게도 오스틴의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나 날카로운 눈초리로 함정을 제거해 주고, 미리 경고를 해 주었던 오스틴의 존재감이 다시 한 번 용사, 이유정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비겁하다고 해도 좋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네년을 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테니..."

그런 그녀를 향해, 아가일의 인형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을 한 데팔이 다시 한 번 창을 겨누었다.

용사는, 이사벨이 잠깐 치유의 빛을 쏘아준 탓에 간신히 피가 멎은 옆구리가 다시금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힘을 주어 성검을 그러 잡았다.

숨이 가빠오고, 입에서 또다시 뜨거운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을 느끼며, 용사는 마야의 영창 시간을 벌기 위해 다시 한 번 데팔의 창에 맞섰다.

검과 창이 수십합을 맞부딪치고, 땀과 피가 뒤섞이며 전투의 열기를 고조시키던 찰나.

"....?"

데팔의 등 뒤로, 한 명의 사제가 걸어 나오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무슨."

데팔 역시 등 뒤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용사와 거리를 벌린 후 등 뒤로 고개를 돌려 사제에게로 시선을 고정 시켰다.

갑작스레 나타난 제 3자로 인해, 리빙 아머들과 일행들의 전투 역시 잠시 중단 되었다.

"...네놈은 누구냐. 용사와 한패인가?"

데팔은 창 머리를 돌려 갑작스레 나타난 사제를 향해 창을 겨누었다.

데팔의 감각이, 눈앞의 사제가 위험하다고 본능적으로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가라앉고, 데팔의 물음에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던 사제는 이윽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

그러한 사제의 기이한 행동에, 데팔은 물론 용사와 일행들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제를 쳐다보았다.

계속해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사제는, 이내 고개를 다시 내리곤 데팔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이건, 흔치 않군."

"죽고 싶지 않다면 꺼져라. 지금 당장 사라지지 않는다면, 용사와 한 패인 것으로 간주하겠다."

데팔의 협박에도, 사제는 물러나지 않았다.

눈앞의 사제는 그저, 손을 천천히 내려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플레일과 기괴하게 생긴 채찍을 양손에 쥔채 눈을 붉게 빛내고 있었다.

흉흉하게 빛나는 플레일이 절그럭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자, 데팔은 알 수 없는 불안함에 몸을 움찔 거렸다.

여지껏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던 눈앞의 사제는, 무기를 양 손에 거머쥔 채로 마침내 데팔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분께서 네놈의 죽음을 원치 않으신다. 흔치 않은 일이지."

".....뭐라?"

"바커스와 마찬가지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 주겠다."

몇 달 전 돌연 사라져 버린 바커스의 이름이 눈앞에 있는 사제의 입에서 나오자, 데팔은 난생 처음 느끼는 오싹함에 창을 꽉 움켜쥐었다.

"...그분께서 네놈의 사지를 원하신다. 사악한 존재여."

사제의 뒤에 있던 풀 숲이 다시금 갈라짐과 동시에, 가시 달린 채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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